8장: 산장 너머의 풍경과 추억들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학교를 가기 위해 다리로 멀리 돌아 10리길을 걸어 등교해야 했다. 방천이 불어나면 평소 다니던 돌다리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그 긴 우회로는 우리에게 모험이었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풍경들을 만날 수 있었고, 다른 동네 아이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비에 젖은 산길은 미끄러웠지만, 그만큼 신비로웠다.
빗속을 걸으며 누나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들.
인근의 여대에서 매일 들려오던 성악 연습하던 노래소리는 우리 일상의 배경음악이었다. 특히 오후 시간이 되면 여러 목소리가 겹쳐서 들려왔다.
"“도-미-솔-미-도...”
계이름은 한음씩 올라가며 공기 속에 투명한 계단을 그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익숙한 가곡이 흘러나왔고 그 노래소리는 산장의 적막을 깨뜨리는 유일한 문명의 소리였다. 가끔은 정말 아름다운 아리아가 들려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우리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 언니들은 얼마나 좋을까." 누나가 말했다. "매일 노래만 부르고 살 수 있어서."
나도 그 말에 동감했다. 우리에게 노래는 라디오에서나 들을 수 있는 먼 세계의 것이었는데, 저 여대생들은 매일 그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한적한 여름날 주위가 조용한 가운데 여대에서 들려오는 노래소리는 여름 한낮의 노곤함을 더 증폭시켰고 마치 세상이 멈춰버린 느낌을 주기도 했다.
공동묘지를 넘어 앞산 비행장 가는 길에는 아름다운 꽃밭과 초원이 있었다. 봄이면 진달래와 개나리가 만발했고, 여름이면 온갖 들꽃들이 피어났다.
그곳은 우리의 비밀 놀이터였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이라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고, 꽃을 따서 화관을 만들기도 했다. 누나는 꽃 화관을 만드는 솜씨가 뛰어났다.
"이렇게 하는 거야." 누나가 능숙하게 꽃줄기를 엮어서 예쁜 화관을 만들어 주었다. 그 화관을 쓰면 나는 왕자가 된 기분이었다.
수많은 잠자리를 쉽게 쉽게 잡아 실에 묶어 날리던 놀이는 여름의 백미였다. 그 시절 잠자리는 정말 많았다. 손을 뻗으면 쉽게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잠자리에 실을 묶어서 날리면 마치 작은 연을 날리는 것 같았다. 잠자리는 실에 묶여 있어도 열심히 날아다녔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 초원을 뛰어다녔다.
메뚜기를 잡아서 풀가지에 꽂아 구워 먹던 일도 그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다. 다리와 날개를 뜯어내고 내장을 제거한 다음 공터에 불을 피웠다. 지금 생각하면 잔인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자연스러운 놀이였다. 메뚜기를 구워 먹으면 고소한 맛이 났다.
그것은 우리만의 야생 요리였고, 자연에서 얻은 단백질이었다.
오막살이 집 반대 방향으로 500미터 정도 가다보면 누에공장이 있었다. 길쭉한 일층 건물이었는데 근처에 가기만 해도 지독한 냄새가 퍼져 나왔다. 밖에서 언뜻 보기만 했는데 그 안에는 수많은 누에들이 대에 얹혀 꿈틀거리면서 뽕잎을 먹고 있었고 많은 여성들이 그 안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었지만, 그 냄새 때문에 가까이 가기는 어려웠다. 가끔 공장에서 일하는 아줌마들이 점심시간에 나와서 나무 그늘에서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곤 했다. 그들의 얼굴엔 항상 피곤이 배어 있었고, 옷자락에는 누에고치에서 나온 하얀 실가루가 가볍게 내려앉아 있었다
여름 어느 일요일, 집 근처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저기 봐, 저 비행기가 이상하네!" 하고 소리쳤다. 우리는 가리키는 방향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앞산 비행장에서 자주 보이던 경비행기 하나가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며 천천히 하강하는 모습이 보였다.
햇빛에 비쳐 순간순간 반짝이던 비행기는 안에 사람들이 보일 정도로 내려왔다. 우리는 처음엔 신기해하며 바라보았다. 비행기가 이렇게 가까이 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행기의 움직임이 너무 불안정했고, 엔진 소리도 평소와 달랐다.
그 순간, 기체는 순식간에 누에공장과 부딪히며 폭발했다. 그 굉음과 섬광은 우리 바로 옆에서 발생하며 전쟁 경험은 없던 우리 눈앞에 잊혀지지 않을 충격을 선사했다.
폭발음은 온 마을을 뒤흔들었다. 새들이 놀라 떼를 지어 날아올랐고, 개들이 일제히 짖어댔다. 누에공장에서는 검은 연기가 치솟았고, 붉은 불꽃이 하늘을 찔렀다.
우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 있었다. 입이 벌어진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다행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몇 명 없었지만, 조종사 2명과 공장 일꾼들의 죽음은 우리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현장의 기억과 함께.
비행기 추락사고 이후 며칠간 산장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평소처럼 여대에서 들려오던 성악 연습 소리도 뜸해졌고, 어른들은 수군거리며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에공장 쪽에서는 며칠간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바람이 우리 쪽으로 불어올 때면 태운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무거운 기운이 따라왔다. 그 냄새를 맡으면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그날의 충격이 다시 되살아났다.
"앞으로 그쪽으로는 가지 마라."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은 막을 수 없었다. 며칠 후 몰래 누에공장 근처로 가보니 건물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고, 주변에는 검게 탄 잔해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 사고는 내게 죽음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해준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죽음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나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먼 나라의 전쟁 소식 정도였다.
하지만 그날 우리가 본 것은 생생한 현실이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던 비행기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조종사 아저씨들은 어디로 갔을까?" 내가 누나에게 물었다. "하늘나라로 갔겠지." 누나가 대답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그날 밤부터 나는 잠들기 전에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사람이 죽으면 정말 어디로 가는 걸까?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리는 걸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일상이 돌아왔다. 여대에서 다시 노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다시 산과 들을 뛰어다녔다. 하지만 누에공장 쪽으로는 여전히 가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새로운 놀이터를 찾아 나섰다. 공동묘지 건너편에 있는 작은 계곡이었다. 그곳에는 맑은 물이 흘렀고, 물가에는 버들이 늘어져 있었다.
"여기가 더 좋은 것 같아." 누나가 말했다. 나도 동감했다. 이곳은 평화로웠고, 무서운 기억이 없는 깨끗한 공간이었다.
나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누나는 여전히 나와 함께 놀아주었지만, 점점 책 읽는 시간이 늘어났다.
혼자 있는 시간에 나는 자주 생각에 잠겼다. 비행기 사고, 죽음, 이별,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 어린 나이였지만 세상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첫눈이 내리던 날, 나는 계곡에 혼자 가서 얼어가는 물을 바라보았다. 버들가지에는 얼음이 매달려 있었고, 물소리도 작아져 있었다.
이 모든 기억들이 내 어린 시절을 채우고 있었다. 괴기한 산장에서의 무서운 경험들, 자연 속에서의 순수한 즐거움들, 충격적인 사고, 그리고 소중한 만남과 이별들. 그 모든 대비가 내 유년 시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저녁, 여대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아리아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 나도 저 언니들처럼 아름다운 꿈을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꿈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떠 있었고, 산장은 고요했다. 내 어린 시절의 또 다른 한 페이지가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하지만 확실히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