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나를 붙잡은 순간/ 『일상의 블랙홀』19화
오늘 같은 쌀쌀한 날, 낯선 이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세상이 조금 더 살 만한 곳이 되었다. 그리고 내일도 누군가에게 그런 따뜻함의 이유가 될 수 있기를, 작은 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오늘 아침,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11월의 마지막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하늘빛마저 회색으로 물든 아침, 세상이 온통 차가운 색으로 덮여있는 것 같았다. 손끝이 시려와 주머니 속으로 파묻히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무언가가 간절했다.
카운터 앞에 서서 메뉴판의 글씨들이 눈앞에서 흐릿하게 번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마치 봄날 오후의 햇살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추우시죠? 오늘 정말 쌀쌀해요."
시선을 옆으로 돌리는 순간, 회색빛 세상에 홀연히 피어난 한 송이 꽃을 만난 기분이었다. 분홍색 털쉐타를 입은 여성이 볼 가득 번지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 미소는 쉐터의 연분홍색보다도 더 따뜻했고,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웃 같은 친근함으로 다가왔다.
"네, 정말 갑자기 추워졌네요.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맞아요. 저도 아침에 나오면서 깜짝 놀랐어요. 겨울 옷을 제대로 안 챙겨와서 부랴부랴 이거라도 걸쳤어요."
그녀가 자신의 분홍색 털쉐터를 살짝 당기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겨울 추위에 대한 투정 같은 것보다는, 계절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여유로움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색깔이 예뻐요. 분홍색이 정말 잘 어울리세요. 마치 이 차가운 카페에 봄이 걸어 들어온 것 같아요."
그녀의 눈이 초승달처럼 구부러지며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사실 이 색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몇 년 전부터 자꾸 끌리더라고요. 어머니가 늘 입히려 하셨던 색인데, 이제야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요. 나이를 먹으면서 취향도 변하고, 마음도 부드러워지나 봐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스며 있었다. 단순히 옷 색깔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변화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가는 과정에 대한 통찰이 느껴졌다.
주문을 마치고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날씨 이야기에서 시작해 요즘 읽고 있는 책, 좋아하는 음악, 그리고 각자의 소소한 일상까지.
"요즘 마음이 좀 메말라 있었거든요. 일상이 반복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겉핥기식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외로웠어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마음을 나누니까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네요."
내가 속마음을 털어놓자, 그녀의 눈동자에 깊은 공감이 출렁거렸다. 마치 내 마음의 빈 공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차분하고 따뜻한 눈빛이었다.
"저도 그래요. 어떤 날은 세상이 온통 차가운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것 같아요. 그럴 때 이렇게 누군가와 진짜 이야기를 나누면, 그 벽에 작은 문이 하나씩 생기는 것 같거든요.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인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삶의 무게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온기가 담겨 있었다. 위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끼리의 진심어린 공명이었다.
음료가 나왔을 때, 우리는 마치 오랜 친구와의 만남이 끝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아쉬움을 나누며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그녀가 돌아서는 순간, 분홍색 털셔터가 카페의 따뜻한 조명 아래서 부드럽게 물결치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 짧은 만남은 하루 종일 가슴속에 작은 촛불처럼 따뜻하게 타올랐다. 차가운 바람이 불 때마다, 그녀의 미소가 떠오르며 마음 한켠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분홍색 털쉐터를 입은 그녀의 얼굴에 흘러넘치던 따스함,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어린 말들. 때로는 이런 예상치 못한 만남이 일상의 회색빛 무게를 살며시 걷어내주고, 세상이 생각보다 따뜻한 곳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믿게 해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의 분홍색 털쉐터처럼,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색깔 하나를 더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조용히 피어올랐다. 차가운 세상에 온기를 전하는 것이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구나.
오늘 같은 쌀쌀한 날, 낯선 이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세상이 조금 더 살 만한 곳이 되었다. 그리고 내일도 누군가에게 그런 따뜻함의 이유가 될 수 있기를, 작은 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