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들은 이야기

-사소하지만 나를 붙잡은 순간/ 『일상의 블랙홀』20화

by 글빛누리

어렸을 때 어머니로 부터 들었던 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이유에선지 그 얘기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선연하게 기억에 남아 있어 나름 이야기글로 만들어 소개해 보고자 한다.



새벽 다섯 시, 순이네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골목 어귀에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길을 잃은 새 한 마리 같았다.


"엄마, 배고파."


일곱 살 큰놈 철수가 잠결에 중얼거렸다. 다섯 살 작은놈 영수는 아직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형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라. 김 부자네 잔치 가서... 거기서 실컷 먹자."


순이는 아이들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아이들의 체온이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김 부자네 큰아들 혼사였다. 동네에서 제일 잘 사는 집이라 잔치도 크게 한다 했다. 순이는 사흘 전부터 품을 팔러 다녔다. 설거지고 청소고, 무엇이든 하겠다고.


전쟁이 끝난 지 겨우 두 해. 남편은 흥남에서 피난 나오다가 실종되었고, 그 후로 소식이 없었다. 아이 둘을 데리고 서울 변두리 판잣집에서 어떻게든 버텨왔지만, 겨울이 길어질수록 살림은 더욱 막막해졌다.


"어머니, 일찍 오셨네요."


김 부자네 큰며느리가 마당으로 나왔다.


"네, 마님. 뭐든 시키시면..."


"아이들도 데려오셨네요. 괜찮아요. 뒤뜰에서 놀게 하세요."


순이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이들을 맡길 데가 없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잔치는 성황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순이는 쉴 틈 없이 그릇을 나르고 설거지를 했다. 철수와 영수는 마당 한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뛰어노는 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얘들아, 이리 와서 밥 먹어라."


점심때가 되자 주인집 며느리가 아이들을 불렀다. 순이는 손을 닦으며 달려왔다.


"아, 저희가 뭘..."


"괜찮아요. 애들이 배고프겠어요."


뒤뜰 구석진 곳에 작은 상이 차려졌다. 흰 쌀밥에 고기 몇 점, 나물 반찬이 수북했다. 철수와 영수는 눈이 둥글어졌다.


"먹어."


순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은 숟가락을 들고는 한참을 망설였다. 이런 밥상이 낯설었다. 집에서는 늘 보리밥에 짠지 몇 점이 전부였으니까.


철수가 먼저 한 숟가락을 떠 먹었다. 그러자 영수도 따라했다. 곧 두 아이는 정신없이 밥을 퍼 먹기 시작했다.


순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가가 뜨거워졌다. 언제 저 애들이 저렇게 맛있게 먹는 걸 봤던가.


"엄마..."


한참 후 철수가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배 불러. 더 못 먹겠어."


영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배가 불룩하게 나와 있었다.


순이는 아이들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이들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엄한 표정을 지었다.


"더 먹어."


"엄마, 정말 배 불러..."


"더 먹어, 이놈아. 더..."


순이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언제 또 이런 밥을 먹게 될지 모르잖아. 언제 또 배불리 먹을 수 있을지...


철수가 엄마의 표정을 보더니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영수도 따라했다. 더는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밥을 억지로 한 숟가락, 두 숟가락...


"그래, 그렇게... 더..."


순이는 아이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해가 저물어 잔치가 끝났다. 주인집에서 남은 음식을 조금 싸주었다. 순이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어둠이 내린 골목길을 걸었다.


"엄마, 오늘 정말 맛있었어."


철수가 말했다.


"응, 배도 안 고파."


영수도 덧붙였다.


순이는 대답 대신 아이들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 손 안에는 따뜻한 희망이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지만, 오늘만큼은 아이들이 배불렀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더 먹어, 더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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