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나를 붙잡은 순간/ 『일상의 블랙홀』21화
'어릴 적 들은 이야기'를 쓰다 보니 이와 유사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생각난다.
당시 우리는 전생 후의 척박한 삶 속에서 무엇 하나 보장된 것 없는 절퍽한 삶 속에 하루 하루를 보냈다. 희망의 해가 비친 적은 거의 없었고 거의 내내 천둥, 우뢰, 번개, 소낙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바다 위의 초라한 배처럼 우리의 일상은 오늘 하루가 그럭저럭 지나갈 수 있으면 다행스런 그런 습기 찬 하루 하루였다.
그렇게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를 다녔다. 학교엔 고아들이 많았고 그들 머리엔 누구 할 것 없이 머리 버짐, 유식한 말로 두부백선이라는 곰팡이 서식이 왕성했고 그 자리엔 다들 허옇게 머리털이 빠져 쌍둥이 같은 두상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어머니를 갖고 있었던 우리 남매는 그들과 비교해서 조금은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거다. 하지만 공책은 지워서 다시 썼고, 읽을 수 있는 책은 고아원에서 빌려 읽은 두권의 위인전이었던 그 시절 어머니는 우리 남매를 먹이는 데에는 지극정성이셨다. 미군부대에서 차가운 물에 군복을 손빨래하다 돌아오는 어머니의 손에는 항상 이상하고 괴이힌 먹을 것이 들려있었다. 군고구마, 호떡도 있었지만, 가끔가다가는 미군부대의 씨레이션, 빠다(버터) 등도 우리는 섭취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열정은 하지만 이상한 곳까지 뻗쳐있었다. 가끔가다가 시뻘건 피가 묻어 있는 종이에 싼 것들을 자랑스럽게 사들고 오셨는데 바로 생간이었다. 어떨 땐 익혀서 먹이기도 했지만 (그 맛은 정말 형편없었다), 보통은 생간 그대로 양념장에 찍어 먹이셨는데 유난히 이 음식을 거부했던 우리 남매를 위해 온갖 좋은 말로 회유하고 협박하던 어머니는 결국 1원이라는 거금을 우리 앞에 보여주며 이것을 먹으면 주겠노라고 유혹을 하기도 했다. 1원이면 당시 아랫길 대학교 광장의 뽑기를 몇번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아저씨가 펼쳐놓은 지난 만화책을 어두워질 때까지 읽을 수 있었던 엄청난 기회의 자산이었다.
심지가 굳셌던 누나는 한사코 거부했지만 유약한 성격과 효심을 타고났던 나로서는 이 기회의 1원 앞에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들었던 이야기 속의 어머니처럼 어머니는 한 조각 먹고 인상을 찌푸리는 나에게 '먹어. 더 먹어'하며 어르고 달래고 협박하는 이야기 속의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몇조각 안되었지만 결국 임무를 완수하고 1원을 받아든 나를 보는 어머니의 눈빛은 '오늘만큼은 제대로 먹일 수 있었다'는 뿌듯함으로 인자하게 빛났고 초롱불 켜는 손마디에 가벼움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익힌 간은 아직도 싫어하지만 생간을 찍어 먹을 기회가 되면 나는 어김없이 그 1원과 뽑기의 달콤함, 그리고 끝없는 상상의 꿈을 펼쳐주었던 만화책의 세계로 빠져든다. 지금은 인지 능력도 가물가물한 노모는 옛날 시절 얘기로 대화가 이어지면 아직도 축음기처럼 똑같은 말을 되뇌인다. "참 그땐 어떻게든 너희들을 먹여야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지..." 어머니의 눈가에 아스라이 만족스런 결기가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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