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카뮈를 읽다
처음에 신들로부터 나에게 내려진 형벌에 대해 듣게된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신들의 권위를 거스르고 죽음을 조롱한 교만과 속임수가 있었다는 건 잘못되었다 치자.
하지만 자신의 한 행동엔 그래도 누군가에겐 용기와 유머를 주었던 일종의 악의없는 객기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던 일이다.
제우스 신이 강의 신 아소푸스의 딸을 납치했던 일이 뭐 그리 잘한 일인가? 잠시 시간을 내어 아소푸스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것은 신들의 권위에선 ‘배신’이라 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정의로운 폭로자’의 행위가 아닌가. 잘못은 자기가 해놓고 사실을 알려줬다는 이유 때문에 가혹한 형벌을 내린다는 것은 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음의 신 하데스를 잠시 묶어서 인간 세계에 잠시나마 ‘죽음이 멈춘 시간’이 찾아오게 된 일도 그렇다. 삶과 죽음의 진지한 주제를 뒤집어보는 일종의 블랙코메디처럼 유머있게 바라볼 수도 있는 문제였다. 어떻게 모든 일에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행동만 하며 살 수 있는가?
잠시 꾀를 내어 저승에서 다시 살아온 시도는 삶에 대한 인간의 집요한 의지를 보여주는 반항아적 패기로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었으니까….
신들은 나를 “교활한 자”라는 별칭으로 나의 능력과 자의식을 훼손하려 했으나 난 그만큼 지혜와 기민함을 지녔던 것이고 다른 경우라면 재치와 유머가 있다고 칭송받았을 그런 사안들이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내가 장난을 건 상대가 신들이어서 이 유머 감각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존재들의 공분을 사긴 했어도 솔직히 그들이 신이랍시고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못된 짓들은 얼마나 구린가 말이다.
아무튼 나는 이제 무거운 바위를 올림푸스 산 정상까지 올려야 했다. 기가 막힌 것은 내가 거의 다 올려놓자마자 바위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힘을 벗어나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가버렸던 것이다. 바위의 무게도 그렇고, 내가 힘이 좀 세긴 하지만, 하루종일 밀어올린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지는 장면을 보는 사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정말이지 난 그때 내가 세상에서 배웠던 모든 욕들을 허공에 쏟아부었고 그 외에도 나는 산아래로 내려가면서 나의 본능과 상상력이 허락하는 모든 패악스런 말들을 쏟아내었다. 다시 올려? 아니면 도망쳐버려? 하지만 최소한 하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신들의 눈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곳은 없다는 걸. 산아래에 내려왔을 때 나는 그 바위가 마치 출발선처럼 나를 기다리고 서있는 것을 보았다. 발로 한번 차보았지만 내 발만 아팠지 바위로서는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고 덤덤하게 서있었다.
그나 저나 오늘의 일과가 끝났기에 나는 어찌되었건 형벌을 감수했고 내 임무는 끝난 것으로 인지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 때 헤르메스가 와서 말했다. 바위를 산 위에 올리지 못했으니 내일 다시 올려라. 그러면 그렇지 이놈의 신들이 그리 자상한 존재들이 아니란 걸 파악한 나는 다음날 아침 다시 바위 앞에 섰다. 아침이었지만 햇살은 따가웠고 또 굴려올릴 생각을 하니 우울했다.
아무튼 오늘은 산 정상 끝까지 올리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바위는 스스로의 힘으로 또다시 굴러내려가고 말았다. 그때 느꼈던 나의 허망함은 아마 그 어느 때보다 컸으리라. 이런 일이 3,4일 되풀이되자 나는 이제 나의 삶, 나의 운명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흘러갈 건지 알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형벌에 관한 얘기는 후일 신화란 이름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꽤 알려진 모양인데 그중에서도 카뮈라는 철학하는 친구가 나의 이 형벌에 대해 언급을 하며 꽤 심각한 썰을 풀어내었다. 그는 ‘시지프의 신화’라는 책 속에서 지겹도록 부조리한 세계를 외쳐댔다 한다. 부조리란, 인간이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애쓰지만 세상은 끝내 침묵하는 상황 — 그 불일치 속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내 형벌이 걸려든 건데 말하자면 시지프스 신화는 끝없는 부조리한 삶을 상징하고 있다나 뭐나. 아무튼 나의 이름은 지겹고 출구가 없는 삶의 대명사가 된 셈인데 그의 계속되는 논리는 소위 이 부조리의 대명사인 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신박한 논리였다.
카뮈는 내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했단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행복? 나? 매일같이 이 빌어먹을 바위를 굴려 올리는 내가 행복하다고? 이 친구, 제정신인가 싶었다. 철학자라는 작자들이 다 그렇지. 실제로 돌 하나 굴려본 적도 없으면서 관념의 세계에서 그럴싸한 말들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니까 수백 번, 수천 번 이 바위를 밀어 올리고 또 그게 굴러떨어지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조금씩 이 친구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카뮈는 내가 산을 내려올 때, 바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올 때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 순간이 바로 '의식'의 순간이라고. 내 운명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순간이 가장 비극적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인정한다. 산 아래로 내려올 때 나는 생각한다. 정말 많이 생각한다. 처음엔 분노뿐이었다. 저 위선적인 신들에 대한 증오, 이 불공평한 형벌에 대한 원망.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깨달았다. 신들은 내 몸은 묶어놓았을지 몰라도 내 생각까지는 묶어놓지 못했다는 것을.
이 바위는 내 것이다. 이 형벌도 내 것이다. 신들이 준 것이긴 하지만, 그걸 감당하는 건 나다. 매일 아침 이 바위 앞에 서는 것도 나고, 그걸 밀어 올리는 것도 나고, 그게 굴러떨어지는 걸 보는 것도 나다. 그리고 다음날 또 시작하는 것도 나다.
카뮈는 내가 운명보다 우월해질 수 있다고 했다. 운명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걸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일 때 말이다. 음, 이건 좀 철학자답게 빙빙 돌려 말한 거고, 내 식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신들은 내게 형벌을 줄 수 있지만, 그 형벌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내가 결정한다.
행복하냐고? 글쎄, 행복이라는 단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바위를 밀 때 더 이상 신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저들의 승인도, 저들의 분노도 필요 없다. 이건 이제 나와 이 바위 사이의 문제가 되었다. 순수하고 명료한, 어쩌면 아름답기까지 한 투쟁.
매일 아침 나는 이 바위 앞에 선다. 어제와 똑같은 바위, 어제와 똑같은 산. 하지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매일 나는 조금씩 달라진다. 더 강해지거나, 더 지혜로워지거나, 아니면 그냥... 다른 사람이 된다.
카뮈가 맞았다. 부조리는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부조리를 의식하는 순간,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그것의 희생자가 아니다. 나는 그것의 주인이 된다.
신들이 내게서 빼앗으려 했던 것은 나의 지혜와 자유였다. 하지만 그들이 내게 준 영원한 형벌 덕분에, 나는 매일 아침 그 지혜와 자유를 다시 발견한다. 나는 이 지겨운 반복을 통해 오히려 영원한 반항을 획득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이 바위를 민다. 신들이 시켜서가 아니라, 이게 내가 할 일이기 때문에. 이게 내 삶이기 때문에.
매일 아침 내가 이 산 아래에 서서 이 바위를 밀어 올리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나는 신들의 의지에 복종하는 노예가 아니라, 내 운명을 온전히 이해하고 감수하는 부조리한 세상의 유일한 영웅이 된다.
행복하냐고 다시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행복은 아니다. 하지만 내 방식대로, 나는 충분하다."
그리고 내일 아침, 나는 또 이 바위 앞에 설 것이다.
이 글은 '철학자와 함께일상의 부조리를'이란 제목의 매거진 시리즈의 제 4편 글입이다. 나름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이니 많이 읽고 의견을 제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편 예고: “인터메조 II: 시지프와 니체의 가상의 만남”
같이 볼 시리즈 글:
철학자와 함께 일상의 부조리를 마주하다[1]https://brunch.co.kr/@b4884283c32a44c/80
카프카와 함께 부조리를 들여다보다 [2]https://brunch.co.kr/@b4884283c32a44c/81
인터메조: 강아지가 된 나 — 21세기판 『변신』[3] https://brunch.co.kr/@b4884283c32a44c/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