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의 독백[4]

시지프, 카뮈를 읽다

by 글빛누리


시지프의 항변

처음에 신들로부터 나에게 내려진 형벌에 대해 듣게된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신들의 권위를 거스르고 죽음을 조롱한 교만과 속임수가 있었다는 건 잘못되었다 치자.

하지만 자신의 한 행동엔 그래도 누군가에겐 용기와 유머를 주었던 일종의 악의없는 객기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던 일이다.


쪼잔한 신들의 복수

제우스 신이 강의 신 아소푸스의 딸을 납치했던 일이 뭐 그리 잘한 일인가? 잠시 시간을 내어 아소푸스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것은 신들의 권위에선 ‘배신’이라 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정의로운 폭로자’의 행위가 아닌가. 잘못은 자기가 해놓고 사실을 알려줬다는 이유 때문에 가혹한 형벌을 내린다는 것은 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음의 신 하데스를 잠시 묶어서 인간 세계에 잠시나마 ‘죽음이 멈춘 시간’이 찾아오게 된 일도 그렇다. 삶과 죽음의 진지한 주제를 뒤집어보는 일종의 블랙코메디처럼 유머있게 바라볼 수도 있는 문제였다. 어떻게 모든 일에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생각과 똑같은 행동만 하며 살 수 있는가?

잠시 꾀를 내어 저승에서 다시 살아온 시도는 삶에 대한 인간의 집요한 의지를 보여주는 반항아적 패기로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었으니까….

신들은 나를 “교활한 자”라는 별칭으로 나의 능력과 자의식을 훼손하려 했으나 난 그만큼 지혜와 기민함을 지녔던 것이고 다른 경우라면 재치와 유머가 있다고 칭송받았을 그런 사안들이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내가 장난을 건 상대가 신들이어서 이 유머 감각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존재들의 공분을 사긴 했어도 솔직히 그들이 신이랍시고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못된 짓들은 얼마나 구린가 말이다.


신들의 복수.png

형벌의 어이없는 실체

아무튼 나는 이제 무거운 바위를 올림푸스 산 정상까지 올려야 했다. 기가 막힌 것은 내가 거의 다 올려놓자마자 바위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힘을 벗어나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가버렸던 것이다. 바위의 무게도 그렇고, 내가 힘이 좀 세긴 하지만, 하루종일 밀어올린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지는 장면을 보는 사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정말이지 난 그때 내가 세상에서 배웠던 모든 욕들을 허공에 쏟아부었고 그 외에도 나는 산아래로 내려가면서 나의 본능과 상상력이 허락하는 모든 패악스런 말들을 쏟아내었다. 다시 올려? 아니면 도망쳐버려? 하지만 최소한 하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신들의 눈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곳은 없다는 걸. 산아래에 내려왔을 때 나는 그 바위가 마치 출발선처럼 나를 기다리고 서있는 것을 보았다. 발로 한번 차보았지만 내 발만 아팠지 바위로서는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고 덤덤하게 서있었다.

그나 저나 오늘의 일과가 끝났기에 나는 어찌되었건 형벌을 감수했고 내 임무는 끝난 것으로 인지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 때 헤르메스가 와서 말했다. 바위를 산 위에 올리지 못했으니 내일 다시 올려라. 그러면 그렇지 이놈의 신들이 그리 자상한 존재들이 아니란 걸 파악한 나는 다음날 아침 다시 바위 앞에 섰다. 아침이었지만 햇살은 따가웠고 또 굴려올릴 생각을 하니 우울했다.

아무튼 오늘은 산 정상 끝까지 올리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바위는 스스로의 힘으로 또다시 굴러내려가고 말았다. 그때 느꼈던 나의 허망함은 아마 그 어느 때보다 컸으리라. 이런 일이 3,4일 되풀이되자 나는 이제 나의 삶, 나의 운명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흘러갈 건지 알게 되었다.


굴러떨어지는 바위.png


‘시지프스 신화’란 이름으로 부조리를

이러한 나의 형벌에 관한 얘기는 후일 신화란 이름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꽤 알려진 모양인데 그중에서도 카뮈라는 철학하는 친구가 나의 이 형벌에 대해 언급을 하며 꽤 심각한 썰을 풀어내었다. 그는 ‘시지프의 신화’라는 책 속에서 지겹도록 부조리한 세계를 외쳐댔다 한다. 부조리란, 인간이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애쓰지만 세상은 끝내 침묵하는 상황 — 그 불일치 속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내 형벌이 걸려든 건데 말하자면 시지프스 신화는 끝없는 부조리한 삶을 상징하고 있다나 뭐나. 아무튼 나의 이름은 지겹고 출구가 없는 삶의 대명사가 된 셈인데 그의 계속되는 논리는 소위 이 부조리의 대명사인 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신박한 논리였다.


‘행복한 시지프’?

카뮈는 내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했단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행복? 나? 매일같이 이 빌어먹을 바위를 굴려 올리는 내가 행복하다고? 이 친구, 제정신인가 싶었다. 철학자라는 작자들이 다 그렇지. 실제로 돌 하나 굴려본 적도 없으면서 관념의 세계에서 그럴싸한 말들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니까 수백 번, 수천 번 이 바위를 밀어 올리고 또 그게 굴러떨어지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조금씩 이 친구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성찰하는 시지프.png

운명을 똑바로 바라보라

카뮈는 내가 산을 내려올 때, 바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올 때가 중요하다고 했다. 그 순간이 바로 '의식'의 순간이라고. 내 운명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순간이 가장 비극적인 동시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인정한다. 산 아래로 내려올 때 나는 생각한다. 정말 많이 생각한다. 처음엔 분노뿐이었다. 저 위선적인 신들에 대한 증오, 이 불공평한 형벌에 대한 원망.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깨달았다. 신들은 내 몸은 묶어놓았을지 몰라도 내 생각까지는 묶어놓지 못했다는 것을.

이 바위는 내 것이다. 이 형벌도 내 것이다. 신들이 준 것이긴 하지만, 그걸 감당하는 건 나다. 매일 아침 이 바위 앞에 서는 것도 나고, 그걸 밀어 올리는 것도 나고, 그게 굴러떨어지는 걸 보는 것도 나다. 그리고 다음날 또 시작하는 것도 나다.


카뮈는 내가 운명보다 우월해질 수 있다고 했다. 운명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걸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일 때 말이다. 음, 이건 좀 철학자답게 빙빙 돌려 말한 거고, 내 식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신들은 내게 형벌을 줄 수 있지만, 그 형벌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내가 결정한다.

행복하냐고? 글쎄, 행복이라는 단어가 적절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바위를 밀 때 더 이상 신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저들의 승인도, 저들의 분노도 필요 없다. 이건 이제 나와 이 바위 사이의 문제가 되었다. 순수하고 명료한, 어쩌면 아름답기까지 한 투쟁.


매일 매일 다른 삶을…

매일 아침 나는 이 바위 앞에 선다. 어제와 똑같은 바위, 어제와 똑같은 산. 하지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매일 나는 조금씩 달라진다. 더 강해지거나, 더 지혜로워지거나, 아니면 그냥... 다른 사람이 된다.

카뮈가 맞았다. 부조리는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부조리를 의식하는 순간,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그것의 희생자가 아니다. 나는 그것의 주인이 된다.


신들이 내게서 빼앗으려 했던 것은 나의 지혜자유였다. 하지만 그들이 내게 준 영원한 형벌 덕분에, 나는 매일 아침 그 지혜와 자유를 다시 발견한다. 나는 이 지겨운 반복을 통해 오히려 영원한 반항을 획득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이 바위를 민다. 신들이 시켜서가 아니라, 이게 내가 할 일이기 때문에. 이게 내 삶이기 때문에.

매일 아침 내가 이 산 아래에 서서 이 바위를 밀어 올리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나는 신들의 의지에 복종하는 노예가 아니라, 내 운명을 온전히 이해하고 감수하는 부조리한 세상의 유일한 영웅이 된다.


행복하냐고 다시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행복은 아니다. 하지만 내 방식대로, 나는 충분하다."

그리고 내일 아침, 나는 또 이 바위 앞에 설 것이다.


이 글은 '철학자와 함께일상의 부조리를'이란 제목의 매거진 시리즈의 제 4편 글입이다. 나름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이니 많이 읽고 의견을 제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편 예고: “인터메조 II: 시지프와 니체의 가상의 만남”


같이 볼 시리즈 글:


철학자와 함께 일상의 부조리를 마주하다[1]https://brunch.co.kr/@b4884283c32a44c/80

카프카와 함께 부조리를 들여다보다 [2]https://brunch.co.kr/@b4884283c32a44c/81

인터메조: 강아지가 된 나 — 21세기판 『변신』[3] https://brunch.co.kr/@b4884283c32a44c/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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