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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d Fashioned NuBoi Oct 13. 2024

서사의 한계를 서사로 넘다.

힙합 정규 앨범의 형태에 대한 가장 개인적인 고찰

  힙합씬의 정규 앨범이라는 틀은 참 묘하다. 과거엔 대중적인 곡과 음악적인 곡을 적절하게 섞어 멜로디의 흐름을 맞추는 데서 그쳤다면, 어느 순간부터 ‘서사’와 ‘유기성’을 강조하는 시대가 왔다. <양화>의 히트 이후 이러한 흐름의 앨범들이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이센스의 <Anecdote>, 테이크원의 <녹색이념>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서사적 앨범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가야 하니 노래의 분위기가 비슷해질 수 밖에 없고, 가사 위주로 청취하다보니 피로감이 꽤 크게 다가온다. 아주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번 테이크원의 <상업예술>은 그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다.


  최근 나온 두 정규앨범은 상술한 서사형 앨범의 단점을 적절하게 메꾸며, 메시지 전달에 성공했다. 하나의 경우 멜로디와 분위기 변화를 적절히 주며, 서사의 클리셰를 깨며 한계를 넘었고, 다른 하나의 경우 ‘컨셉’의 도움을 받아 청취자에게 듣는 재미를 줬다.


  <spoiled child:균>은 올해만 벌써 세 번째 풀 사이즈 앨범을 발매한 쿤디판다의 정규 2집이다. 대중 앞에 자신을 내놓은 뒤 오는 불안감과 혼란을 담담하게, 때론 적적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멜로디와 곡의 배치를 활용해 그 서사를 집중력 있게 끌고 간다. 가사의 내용과 어울리는 멜로디를 잘 갖다 붙이며, 한 곡 씩 들었을 때 재미가 떨어진다는 서사형 앨범의 한계점을 잘 깨트렸다. 분명 각각의 곡들이 다른 분위기의 멜로디로 구성되고 각각 다른 소재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비슷한 정서를 형성하며 앨범 전체의 유기성도 놓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피타입의 <street poetry> 이후 가장 완성도 높고, 자주 듣고 싶은 리릭 앨범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쿤디판다의 가사도 훌륭하다. 하지만 현존하는 래퍼들 중 오로지 가사와 랩으로만 지치지 않게 앨범을 끌어갈 수 있는 래퍼는 켄드릭 라마뿐이라 자신한다. 그만큼 힙합앨범의 퀄리티에서 멜로디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크다. 그리고 쿤디판다가 그 맹점을 잘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이번 앨범과 이전 합작 앨범 <송정 맨션>에서 크게 받았다.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단순히 스토리와 메시지만 좋은 것이 아니듯이, 정규 앨범 또한 서사와 유기성 그 이상의 무언가를 전해야 다시 듣고 싶어진다는 걸 오랜만에 느낀 앨범이었다.


  3년 만에 자신의 두 번째 정규앨범을 들고 온 프로듀서 돕플라밍고는 <spoiled child:균>과는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무문관>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앨범은 전체적인 컨셉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한 사람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이 앨범의 타이틀인 첫 트랙은 한 인물(돕플라밍고)이 영화관에 들어가고 타이틀이 올라오는 장면이 담겼다. 첫 트랙부터 앨범을 영화적인 서사로 풀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 뒤로 트랙 사이마다 영화 장면을 묘사하는 내레이션이 등장하는데, 그 대사들이 다 상당히 모순적이다. 그 모순은 우리의 귀를 충분히 끌어당기고, 이에 대해 고민하게 할 만한 트랙이 그 뒤로 등장한다. 그리고 트랙의 피쳐링진을 노래에 명시하지 않는데, 이 또한 배우들을 굳이 일일이 소개하지 않는 영화적 특성을 띤다. 이런 단순한 변화만으로도 우리의 궁금증과 집중력을 가중시킨다. 이게 이 앨범의 첫 번째 차별점이다. 영화를 본다는 상상을 하게 만들며 트랙 뿐 아니라 interlude에도 우리를 집중시키고, 각 장면의 출연진을 기대하게 만들고, 유기성을 고민하게 한다. 우리를 스토리 속으로 끌어들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앨범이지만 <무문관>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앨범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완급조절과 곡의 배치다. 곡의 배치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단연 ‘Intermission’이다. 영화 중간에 쉬는 시간이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두 곡이 배치되는데, 다소 무겁고 시니컬했던 앞선 곡들과 다르게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두 트랙이 나온다. 보이비와 더콰이엇의 쫀득한 랩과 릴러말즈의 독특한 오토튠 활용은 돕플라밍고 특유의 그루비한 비트와 만나 두 귀의 긴장을 충분히 풀어준다. ‘서사형 앨범 중간에 낀 이지 리스닝 트랙은 유기성을 해친다.’는 편견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완급조절까지 훌륭하게 수행하는 배치라 볼 수 있다. 단순히 곡의 배치만으로 완급조절이 가능하진 않다. 각 아티스트와 서사에 알맞은 비트를 적절하게 찍어낸 돕플라밍고의 프로듀싱 능력이 이러한 완급조절을 더 빛나게 해준다.


  근 2년 째 내 머리 속을 맴도는 생각 중 하나가 ‘좋은 정규앨범은 무엇인가.’이다. 서사형 앨범이 고평가 받으며 모든 앨범이 이러한 트렌드를 따라가다 보니, 이전의 앨범들은 왜 명반인가에 대한 이유를 잊어버리게 됐다. 분명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훌륭한 앨범이 많았는데 말이다. 모순적이게도 최근 이 질문을 타파해준 앨범이 앞서 소개한 두 서사형 앨범이다. 결국 좋은 정규앨범은 좋은 곡들을 어우러지게 엮어내며 우리의 귀에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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