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나스타샤 May 15. 2024

보고 싶은 이금순 할머니

손주 사위를 대하는 할머니의 음식 철학

몸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로 할머니 몸은 삐걱댔다. 눈, 심장, 관절  약만 해도 한주먹씩 먹어야 했다. 손가락 끝에 침을 발라 방바닥 먼지를 꼭꼭 찍어 가며 "눈만 잘 보이면 살겠다."라고 욕심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꽃게를 좋아해 집게 다리를 맨입으로 깨부수어 먹던 할머니는 체 할까 겁난다며 미리부터 숟가락을 내려놓곤 했다. "어서 가야지, 어서 죽어야지"를 노랫가락처럼 반복해서 말하는 것과 다르게 한 끼라도 약을 거르면 큰일 나는 줄 알던 할머니. 


엄마는 일을 하기 위해 잠깐 타지로 나가야 했다. 우리 자매는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다. 할머니는 13살에 시집와 주변머리 없는 할아버지 때문에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았다고 했다. 형편이 할머니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다소 거친 매력의 소유자였다. 


우리 자매를 타박할 때면 ‘개뼉다귀 같은 년, 호랭이가 물어갈 년, 넉 빠진 년, 행맹이진 년’ 등 모든 단어 뒤에 정성스레 '년'을 갖다 붙였다. 그렇다고 막무가내식의 쌍욕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악을 쓰며 드세게 굴었던 할머니도 이웃 사람들에겐 경우 바르고 좋은 아낙네였다. 술을 못해 담배 태우는 게 유일한 낙이라고 이야기했던 작은 체구에 슈퍼우먼이었다.


옛날 못살던 시절, 할머니는 자식들 배곯지 않게 하려고 부잣집 잔치음식을 해주러 다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은 유난히 맛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반찬인데도 할머니가 해주면 달랐다. 


그분은 할머니 집에 가서 식사할 때면 고봉밥을 퍼 줘도 군소리 없이 다 먹어치웠다.  먹쇠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할머니 앞에서는 머슴처럼 우적우적 잘 먹는 척 연기했다. 주는 대로 먹어치우는 모습이 예뻤던 할머니는 더 먹으라는 소리를 연신 해댔다. 


“더 먹어. 키는 멀대 같이 커 가지고 그거 먹어서 돼?” 


할머니의 무한리필은 무한사랑이었다. 그렇게 그분을 향한 할머니의 국자와 주걱질은 쉬지 않았다. 


아이 낳고 기르는 동안 그분은 해외출장으로 집을 자주 비웠고 나는 종종 할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분은 할머니가 우리 집에 올 때면 잊지 않고 용돈도 함께 챙겨 보냈다. 할머니는 말했다. 


“오 서방은 참 착해. 술 먹고 행패 부리기를 하나, 도박을 허나, 계집질을 하나. 착햐.” 


용돈을 받고 하는 립서비스라기엔 칭찬 내용이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분은 나와 살면서 칭찬에 목말라 있었다. 할머니가 하는 적절치 못한 칭찬에도 ‘오 서방’은 만족하며 늘 할머니를 사근사근하게 챙기는 손주사위였다. 


산후조리 할 때도, 젖을 말릴 때도 나는 엄마보다 모르는 게 없는 척척박사 할머니를 찾았다. 하다못해 간밤에 꾼 꿈에 대한 해몽이 궁금할 땐 "내가 꿈을 꿨는데 이건 어떤 꿈이야?"라고 물었다. 할머니라고 어찌 다 알겠는가. 손녀가 궁금해 하니 살아온 연륜으로 잘 버무려진 설명을 그럴싸하게 해 주었다. 할머니는 눈이 어두웠지만 귀는 밝았다. 이야기는 또 왜 그렇게 잘 통하는지. 단짝친구처럼 어떤 얘기든 잘 들어주었다. 


친정 엄마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워낙 말이 없어 답답할 때면 공연스레 할머니에게 전화했다.


“할머니 막내딸이 우리 엄마잖아. 성격이 왜 그래?”

“느이 애미 성격이 원래 그래. 어려서부터 그랬어. 오사바사한 맛이 없어.”


아이들이 자라 손이 덜 갈 때쯤 할머니를 찾을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늬이 집에 좀 가 있으련다. 바람 쐬러간다 생각하고 며칠 가서 있으마.”


그러고 보니 우리가 시골집으로 이사 오곤 할머니가 한 번도 집에 온 적이 없었다. 그날 오랜만에 우리 집에 온 할머니는 더 작고 더 많이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좋다. 이히. 어허이.” 


풀숲 그대로 자리한 집에 와서는 반복해서 “좋다. 좋다” 감탄했다. 뭐가 저리 좋아서 연신 추임새를 넣는지 알지 못했다. 담배를 태우는 할머니는 하루에도 열두 번 현관문 밖을 들락날락했다. 마당을 휘휘 돌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도 했다. 그때마다 할머니 양말과 바지자락에 검불이 붙어왔다. 흙강아지가 되어 온 어린아이를 닦아주듯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닦고 치워야 했다. 


“할머니 이게 뭐야. 옷에 전부 지푸라기 묻히고 들어와서는 바닥에 떨어지고!”

“으흐이. 훠이. 좋다. 네가 암만 뭐래도 조오타.”


내가 큰소리로 잔소리를 해도 할머니는 언짢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진심 기분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저렇게 좋은가. 눈이 좋지 않았던 할머니는 옷에 뭐가 묻어도 알지 못했고 끊임없이 검불을 달고 들어왔다. 


얼마동안 우리 집에서 지냈던 할머니는 오래 집을 비울 수 없어 돌아가야 했다. 할머니네 아파트 입구에 다다랐을 때 할머니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 흘렸다. 자고 가라며 붙잡고 우는 할머니 모습은 엄마와 떨어지기 싫다고 울며 매달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내가 믿고 의지하던 할머니는 어느새 아이처럼 약해져 있었다. 소리치며 타박하던 슈퍼우먼은 온데간데없었다. 할머니를 두고 집에 가는 길은 마음이 무거웠다. 


눈이 안 좋았던 할머니는 화장실 가다 발을 헛디뎌 넘어졌고 고관절이 골절되어 인공 고관절 수술을 받게 됐다. 수술은 잘됐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관절이 2번이나 탈구됐다. 제 위치로 돌려놓기 위한 수술을 두 차례나 더해야 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여러 차례 수술로 할머니는 많이 지쳤다. 90세 가까이 열심히 살았던 할머니는 어떤 것도 애 쓰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작별의 순간은 왔다. 할머니를 보낼 때도 그분은 든든하고 착한 손주사위였다. 어린아이처럼 손수건을 흔들며 울고 있던 그날의 할머니 모습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영상으로 남았다. 


할머니, 거기서는 안 외롭지? 안 아프지? 울 일도 없지? 거기도 우리 집 마당처럼 좋지? 






사진출처 : pexels-pixab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