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의 불평등

by 김명준

“내재적 쾌락은 꽤 다대한 비용의 삶의 불운을 대가로 치르고서 얻어진 것이다.”

-데이비드 베나타-


소변 보는 쾌락을 느끼려면 일단 소변 마려운 고통을 느껴야한다.

헤도니아라 불리는 감각적 쾌락은 결핍의 해소, 항상성의 회복을 전제할때 더 강력하다.(배고플수록 더 맛있어진다)

노르웨이의 심리학자 시리 레크네스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예상보다 고통의 강도가 덜해질 때 고통을 실제보다 덜 느끼며 심지어 기분 좋게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쾌락과 고통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처음부터 소변이 마렵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배출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쁘지 않다.

배출하는 쾌락을 느끼지 못했다는 박탈감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억지로 배출하려는거야말로 고통이다.

그리고 소변 보는게 무조건 쾌락인지도 의문이다.

나 같이 만성 골반 통증 증후군 있거나 전립선염, 요로결석 등등 무쾌감증이 있는 사람한테 소변은 고통일 뿐이다.


헤도니아(감각적, 순간적 쾌락)가 아닌 유데모니아(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자아실현의 행복)로 불리는 예술 감상의 쾌락 역시 조건적이고 불평등하다.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같은 예술 작품이라도 감상자가 어떤 계급이냐에 따라 취향이 갈린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같은 미술작품은 일반인들에겐 정말 까다로운 그림이다. 학교를 통해 미술에 대한 고등교육을 받고 어렸을때부터 칸트의 무관심 미학 이론 등을 배우며 자라온 사람들만이 그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 즉, 문화자본을 얻게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 문화자본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계층 집안의 아이는 어릴때부터 미술관에 가는게 익숙하지만 빈민층 집안의 아이는 미술관에 갈 일이 거의 없다.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 이후 아우라의 권위가 몰락하면서 예술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졌다고 말했지만 부르디외는 접근성만 좋아졌을뿐 결국 취향이라는 또 다른 권위가 세워졌다고 폭로한다. “나만 이 예술을 가지고 있다.”는 권위에서 “나만 이 예술을 이렇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는 권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이 불평등을 주로 계급의 측면에서 다루었지만 나는 장애학, 신경다양성의 관점에서도 확장 가능하다고 본다. 나 처럼 자폐나 만성통증, ADHD가 있는 사람에게는 해석 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집중자체가 어려울때가 많다.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이 실패하는 것이다. 결국 예술 작품 감상은 문화자본 뿐만 아니라 특정 신체적 조건과 인지적 조건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한, 유데모니아는 타인과의 관계, 사회적 연결을 핵심으로 두고 있다.

이 역시 불평등하다. 적응장애나 눈 마주침조차 어려운 자폐는 사회적 상호작용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장애인, 저소득층, 난민, 동성애자 등은 사회적 배제의 위험을 겪는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총 다섯가지다.


1. 헤도니아적 쾌락은 고통을 전제로 할때 더 강력하다.

2. 고통이 없는 존재에게 쾌락 결여는 손해가 아니다.

3. 쾌락이 모두에게 동일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4. 어떤 존재에게는 쾌락의 보상조차 없다.

5. 쾌락은 생리학적 구조이며 신체 조건에 좌우된다.


쾌락은 조건적이며 고통과 죽음은 필연적이다. 삶에 있어서 고통이 더 본질적이며 따라서 쾌락 추구보다 고통 최소화를 더 우선으로 생각해야한다. 물론 제일 좋은건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도 이에 동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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