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목적 견해를 따르면, 몇몇 자살들은 명백히 비합리적이다. 자살은 모든 목적에 대한 효과적인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목적에 기여하지 않을 때에는 그것은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자살이 합리성에 관한 목적-수단 관념 하에서 전적으로 합리적인 경우가 자주 있을 수 있다는 것도 같은 정도로 명백하다. 만일 자살하는 사람의 목적이 삶을 중단함으로써만 피할 수 있는 삶의 부담을 피하는 것이라면, 자살은 합리적이다.
죽기를 원하는 것이 결코 합리적일 수 없다(또는 거의 절대다수의 경우 합리적일 수 없다)는 것이라면, 그 주장은 지탱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삶이 (거의) 결코, 죽음이 지속된 삶보다도 그러한 여건에서는 더 선호될 만큼 나쁘지 않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 견해는 인간의 끔찍한 여러 조건에 대한 숙지된 반응이라기보다는 확실히 독단일 수밖에 없다.
삶의 부담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이, 죽음이 지속된 삶보다 선호할 만한가를 판단하기에 적합한 상태에 있지 않다는 주장을 논박한다. 그러한 부담은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어 건전한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부담들은 삶이 지속할 가치가 있는지에 관한 결론에 전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germane)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여건에서는 그 부담은 정신을 흐리게 한다기보다는 정신을 집중시킨다.
만일 자살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시점보다 더 이른 죽음에 이르게 해서 문제가 있다면, 적어도 도덕적 행위자의 행동 이외의 원인으로 위협받고 있는 삶을 구하는 것 역시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그 사람의 자연적 운명을 뒤엎는(subvert)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다른 동물들처럼) 인간도 계속해서 살고자 하는 자연적 본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몇몇 여건에서는 사람들이 계속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자연적으로 잃는 것도 또한 참이다. 게다가 왜 우리가 자연적 본능에 순응해야 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사람들은 폭력과 섹스에 대한 본능은 견제되어야 하는 본능으로 보통 생각한다. 우리가 계속 살고자 하는 본능에 반대해서 행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조차 폭력과 섹스에 대한 본능은 견제되어야 하는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자살은 어렵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 결국에는 스스로의 목숨을 앗은 사람들조차도 움직이게끔 하는 가공할 만한 생(生)에의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설사 일부 사람들이 살고자 하는 모든 의지를 잃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를 죽이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았더라면 계속 살기를 원했던 경우이다. 그들은 그들의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자신들의 삶을 앗기 위하여 극복(克服)해야만 했다. 그런 극복은 전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자살을 시도한 사람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고민해보기만 한다는 점, 그리고 시도된 자살이 성공한 자살보다 더 많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는 않다.
삶의 부담이 더 클수록, 친구와 가족의 이익이 존재를 중지하는 자살의 이익을 복멸시키기에 충분한 도덕적 비중을 가질 가능성은 더 낮아진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가족 성원에게 극도의 고통과 수모(degradation)의 조건 하에서도 계속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 사람의 품위를 존중하지 못하는(indecent) 일일 것이다. 그러한 여건에서는, 설사 그녀가 계속 살아 있다고 해도, 그들에 대한 그녀의 의무 중 많은 것 또는 대부
분을 이행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비록 그들은 그녀가 죽으면 그녀의 존재를 그리워 할 테지만, 그녀의 삶의 조건은 그녀에게 지속된 존재를 요구하기에는 너무나 부담이 된다. 그러한 여건에서는, 그녀가 자신의 삶을 끝내는 것이 이기적인 일이 아니라,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계속 살아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이기적인 일이다.
만일 우리가 항상 가역적인 행위 경로만 취한다면 그 선택에는 불가역점이 하나 있게 된다. 즉, 돌려놓을 수 없는 행위 경로를 결코 선택할 수 없다면, 결정을 재고하는 각각의 시점(juncture) 모두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삶의 부담에 대한 죽음 이외의 대응을 하다가 자살이라는 대응으로 결코 전환할 수가 없게 된다. 만일 자살로 결코 전환할 수가 없다면, 비록 마음을 바꾸어서 비자살 대응에서 자살 대응으로 옮겨가고자 해도, 자살 대응을 선택할 수가 없으므로, 처음에 비자살 대응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역적인 일이 되어버린다. 둘째로, 더 중요한 점으로, 불가역적인 결정이라고 해서 그것이 최선의 결정이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우리는 오직, 그러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점을 특별히 더 강하게 확신해야(extra sure) 할 뿐이다. 최종성 논증의 세 번째 판본은, 어떤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자신의 조건이 개선되리라고 여전히 희망할 수 있지만, 일단 죽고 나면 모든 희망이 사라진다는 점을 논거로 삼는다.
이 판본의 문제점은 그것이 자살의 목적을 흔히 놓친다는 것이다. 자살을 실행하는 사람은 그의 조건이 완화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는 그의 현재 조건이 그저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의 상황이 나중에 얼마나 개선되던 간에, 그때까지의 기간을 견뎌낼 만한 가치가 아예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설사 스스로를 죽이는 결정이, 자신의 미래 전망에 관한 판단에 기반해 있다고 해서, 지속된 삶 쪽으로 지나치게 신중을 기하여 치우치는 것이(err on the side of continued life) 항상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때때로, 개선의 아무런 현실적인 희망이 없을 때에도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조건이 개선되리라는 거의 없는 것과 같은 가능성과, 그 중간시기의 끔찍한 부담으로 괴로움을 겪을 것이 확실함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삶의 질에 대한 자기-과소평가(self-underestimates)는 자신의 삶의 질에 대한 자기-과대평가(self-overestimates)보다 훨씬 덜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심리적
연구들은, 꽤나 결정적으로, 인간이 그들 자신의 복지에 대한 과장된 이해를 갖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우리의 복지에 대한 우리의 자기평가는 신뢰할 수 없다. 신뢰할 수 없는 이유는 거의 항상 우리가 우리 삶의 질이 실제로 그런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우리가 실제보다 더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낙천 편향은 사람들에게 몸에 너무나 깊이 배어 있어서(so deeply ingrained in people)(특히 이 편향들의 진화적인 뿌리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이 그러한 편향을 가진다는 점을 간단히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인은 망상(妄想)이 완고함(obstinacy)으로 굳어진 것에 불과하다. 낙천 편향에 대한 증거는 꽤나 명백하다. 삶의 질에 대한 자기 평가의 신뢰성을 정직하게 평가하고 싶은 사람은 이 편향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 이 편향을 정말로 인식하는 사람은, 그들의 삶이 지속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자기 평가를 훨씬 더 적게 기각할 것이다. 염세적이고, 우울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불행한 이들 중 많은 수는 실제로는, 인류의 대다수(the bulk of humanity)를 구성하는 쾌활한 낙천주의자들보다, 그들의 삶의 질에 대해 훨씬 더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주체의 삶이 얼마나 좋게 또는 나쁘게 느껴지는지가 명백히 그 자체로 중요하다. 그 실제 질에 관계없이 말이다. 만일 그것이 지속할 가치가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명백히도 죽음을 선호할 만큼 그렇게 부담스럽지는 않은 것이다. 설사 객관적으로는 죽는 게 더 낫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특정한 자살들을 존중하기 꺼리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들의 삶의 질을 과
소평가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위 경우와 비슷한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 지각은 그러지 않았을 경우보다 그들의 삶을 더 못하게 만든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삶이 지속할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면, 그들의 삶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 되어 죽음을 선호할 정도가 된 것이다. 비록 그들의 지각이 오류일지라도 그래서 이런 면에서는 비합리적일지라도, 죽음에 대한 그들의 선호는 다른 면에서는 합리적일 수 있다-그들의 삶이 얼마나 부담스럽게 느껴지는지를 감안할 때, 죽음은 그들에게 최선일 수도 있다.
진정으로 자기 삶의 질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을 살펴보자. 우리가 그에게
그의 삶이 실제로 더 낫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하는 나의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괴로움을 경감(relief)해주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의 삶의 질을 잘못 과대평가하고 있는 사람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경우에, 우리는 그의 괴로움을 실제로 증가시키게 된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면, 그가 그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그를 죽이게끔 하는 지점에까지 이를 수 있다. 본인 스스로 자신에 대한 진실을 얻는 대가로 추가적인 부담을 기꺼이지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다른 사람이 그런 맞교환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일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비대칭적인 반응들을 갖고 있을 때에는, 그것은 과대
평가하는 사람들이 과소평가하는 사람보다 오류에 덜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삶에 부담을 추가로 더하는 것이 그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역자-삶의 질에 대한 과소평가를 교정하는 일은 그르지 않은 반면에 삶의 질에 대한 과대평가를 교정하는 일이 그를 수 있다는 비대칭성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어떤 사람의 삶의 질이 실제로 충분히 끔찍해서, 낙천주의가 그의 사태를 더 나쁘게 만들 뿐이라면, 세심한 친구(sensitive confidant)가 개입하는 것이
적합할 수도 있다. 확실히,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자신의 조건에 관한 더 냉철한(sober) 견해가 초래하는 단기적인 추가적인 부담이 미래의 훨씬 더 큰 부담을 실제로 모면하게 해주는(spare)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서 신뢰받고 있는 친구나 가족은 삶의 질의 과대평가를 교정해주어도 된다. 그런 친구나 가족은 그 비참한 사람에게,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자살을 거론하여 그를 합당하게 비난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안심시켜 줄 수도 있다.
자신의 삶의 질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도 과대평가하는 사람도 합리성 면에서 결함이 있다. 자살에 대한 비판자들은 그들의 삶의 질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의 합리성 결함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과대평가가 훨씬 더 만연해 있다. 더구나 과대평가의 만연함을 감안할 때, 비록 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질을 과소평가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과소평가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과소평가한다고 이야기되는 사람들이, 그들 주위의 대다수보다 더 정확하게 그들의 삶의 질을 평가하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자살의 합리성은 본인이 자신의 삶이 얼마나 좋은가를 정확하게 평가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로 환원될 수는 없다. 삶의 질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합리적인가의 문제와, 자기 삶의 질에 대한 지각을 고려하였을 때 자살이 합리적이냐의 문제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자신의 삶의 질에 대한 지각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항상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어떠한 의미도 아예 창조하지 못한다.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긍정적인) 충격을 갖지 않는다. 그러한 여건에 있는 드문 사람들이, 그들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 있게 만듦으로써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들은 그들의 삶이 인간세계에서
갖는 의미를 (어느 정도) 갖는다고 생각할 근거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정말로 충분한 인간세계에서 갖는 의미를 창조할 수 없고 그들의 삶이 다른 어떠한 벌충하는 특성들을 갖고 있지 않다면, 자살이 정말로 합당할 수도 있다. 죽음은 여전히 나쁠 것이다. 그러나 나쁜 질의 전적으로 무의미한 삶보다는 덜 나쁠 것이다.
태어나지 않은 이들은 아무런 조건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아예 곤경에 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을 운명에 처해져 있지 않다.
새 사람들을 창조하는 것은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은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하게 된 곤경에 관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장 과감한 (그리고 아마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대응은 자신의 목숨을 앗는 것이다. 나는 자살을 살펴보는 논의를 별도의 장에서 벌써 했다. 나는 이 대응에 대하여 매우 제한된 방어를 제시했다. 이것은 삶의 질이 너무나 나빠서 삶이 지속할 가치가 없을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이익이 자기 자신의 이해타산적인 죽음에 대한 이익을 압도할 정도로 큰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나의-심지어 유일한-합리적인 대응이다. 나는 영원의 관점에서의 의미의 부재가 자신의 삶을 끝내는 합당한 근거를 제공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여하한 의미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최선의 대응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앗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도록 삶을 살아가려는 시도에 의해서 최선으로 다루어진다. 그렇게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은 자살을 고려하는 사람들이 꼭 해야 하는, 삶의 질 평가에 한 요인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자살은 유일한 대응이 아니다. 실제로, 자살은 인간 곤경의 일부 측면에 대한 대응일 뿐이다. 그것은 삶의 나쁜 질에, 그러한 조건에서의 지속된 삶의 부담을 제거함으로써 대처한다. 자살은 보통의 경우에는 삶에 의미를 더하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게는 해줄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가장 명백하게는, 자살은 죽음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는 나쁘지 않을 때조차도) 나쁘다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대신에 그것은 죽음의 나쁨을 앞당겨 실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