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시 모음

by 김명준


제목: 늙는 것의 서러움


어렸을 때 버스를 타면 길가의 집들이 지나가고

버스는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어렸을 때 물가에 서면 물은 가만히 있고

내가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지금 버스를 타면 집들은 가만히 있고

나만 달려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 물가에 서면 나는 가만히 있고

강물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제목: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윤동주 연구」로 박사가 되었지만

윤동주처럼 훌륭한 시인으로 기억되긴 어렵겠고

아예 잊혀져 버리고 말든지

아니면 조롱섞인 비아냥 받으며

변태, 색마, 미친 말 등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칭송을 받든 욕을 얻어먹든

죽어 없어진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저 나는 윤회하지 않고 꺼져버리기를 바랄뿐



제목: 자살자를 위하여


우리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죽을 권리라도 있어야 한다

자살하는 이를 비웃지 마라

그의 좌절을 비웃지 마라

참아라 참아라 하지 마라

이 땅에 태어난 행복,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무를 말하지 마라

바람이 부는 것은 바람이 불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부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는 것은 비가 오고 싶기 때문

우리를 위하여 오는 것은 아니다

천둥, 벼락이 치는 것은 치고 싶기 때문

우리를 괴롭히려고 치는 것은 아니다

바다 속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은 헤엄치고 싶기 때문

우리에게 잡아먹히려고,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려고

헤엄치는 것은 아니다

자살자를 비웃지 마라

그의 용기 없음을 비웃지 마라

그는 가장 용기 있는 자

그는 가장 자비로운 자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 맡은 자

가장 비겁하지 않은 자

가장 양심이 살아 있는 자




제목: 늙어가는 노래


내 나이 아직 어렸을 때에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지

어른만 되면 모든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지

그러나 난 지금 꿈을 이룰 수 없네

나는 이미 어른이기에.

안쓰럽게 푸른 새싹으로 올라와

한스럽게 다 자란 싹으로 피어났던

애닯고 허무했던 나의 희망이여

어쨌든 내겐 아직 희망이 필요하지만

이 얄미운 목숨을 지탱하기 위한

멍텅구리 같은 희망이라도 필요하지만

그래도 나는 희망을 이룰 수 없네

나는 이제 자라나는 나무가 아니라

점점 죽어가는 나무이기에

나는 벌써 어른이기에.

뒤섞인 나날 속에 지쳐 누운 추억의 그림자

초라한 기억 속에서 안간힘쓰며 꿈틀대는

이사랑, 이 욕정, 이 본능!

그러나 나는 사랑을 이룰 수 없네

아, 나는 어른이기에

절망보다 오히려 더 두려운 그 ‘희망’을 믿기엔

이미 너무 똑똑해져버린

…… 서글픈 어른이기에.




제목: 착각은 아름답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착각에서 온다

그러므로 착각은 아름답다

나는 오늘도 착각 속에서 산다

내가 참 잘생겼다는

나의 섹스 테크닉이 뛰어나다는

그래서 나는 언제껏 기다린다

착각 때문에 나를 사랑해줄 여자를

착각 때문에 나와 동거해줄 여자를

하지만 둘 다 서로 착각해야 한다

그게 힘들 것 같아 나는 우울하다





제목: 인생은 팽이치기


팽이가 돈다 돌아

우리의 한 많은 인생처럼

우리의 되풀이되는 일상(日常)처럼

돌고 돌아

우리가 가는 종착점(終着點)은 어디일까

그저 그런

병, 죽음, 윤회

인간의 삶은 팽이처럼 돌아간다

사랑, 돈, 명예

돌고 돌다 지쳐

결국은 허무로 이어지는

결국은 권태로 이어지는

섹스, 페팅, 변태성욕

결국은 피곤으로 끝나는





제목: 다시 비


다시 비

비는 내리고

우산을 안 쓴 우리는

사랑 속에 흠뻑

젖어 있다

다시 비

비는 내리고

우산을 같이 쓴 우리는

권태 안에 흠뻑

갇혀 있다

다시 비

비는 내리고

우산을 따로 쓴 우리는

세월 속에 흠뻑

지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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