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규했다. 그러나 이 절규가 개인적인 불행으로부터 나온 절규인지, 아니면 현상계의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고통의 뿌리를 지각함으로써 밀려오는 절규인지 모르겠다.
그 고통의 뿌리는 정신의 우주가 육체의 감옥에 갇혀버린 시점으로부터 나온다.
비존재의 이데아 속에서 무한한 고요와 평화를 누리던 정신은 어느날 신으로부터 존재의 형벌을 선고받고 육체라는 감옥속에 갇힌다.
그리고 육체는 정신을 죽음이라는 유한하고 운명적인 결말로 이끈다.
인간이 마취를 통해 육체의 고통을 제거할 순 있어도, 정신의 고통은 온전히 제거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정신의 고통을 제거하려는 모든 시도는 곧 신에 대해서, 운명에 대해서 반항하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는다.
정신은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유한성의 운명을 어떻게든 거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항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저항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쇼펜하우어가 말한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의지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비존재로 돌아가려는 의지조차 역설적으로 존재의 증거이며 실현될 수 없는 의지를 재생산해 존재를 오히려 더 고통 속으로 빠뜨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장자가 추구한 무위,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아타락시아 모두 이 비극 앞에서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다.
고향으로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늦었고 삶에도 죽음에도 구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