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합리주의 전통 철학자들은 의식이 있기에 인간이 특별하고 의식, 숙고(의식의 고도화)가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그 의식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만성통증을 앓고 있는 나는 사유, 의식보다 몸의 고통이 먼저 나의 존재를 증명시키며 자폐 스펙트럼, ADHD, 우울증, 불안장애는 그 고통을 더욱 악화시킨다.
몸의 고통은 언어를 파괴하고 나라는 세계를 파괴한다.(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그렇게 파괴된 세계에서 의식은 해결책은 커녕 오히려 고통을 유발하는 장치가 되며 그 의식의 고통은 다시 몸의 고통을 증폭시키는, 서로가 서로를 좀먹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큰 공감이 되었던 고대 중국 철학자 장자, 그리고 20세기 노르웨이 철학자 페테르 베셀 삽페는 의식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해냈다.
이 둘은 시대도, 문화도, 분위기도 다 다르지만 의식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전복시킨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삽페에게 의식이란 과잉진화(마치 뿔이 과대하게 자란 큰뿔사슴처럼)의 산물이고 멈출 수 없는 비극이다.
“생명의 통일성에 난 구멍, 생물학적 역설, 가증스러운 것, 부조리, 끔찍한 본성에 대한 과장. 생명은 목표보다 한참 더 나아간 나머지, 자기 자신마저 산산조각 냈다. 종은 외견상 전능한 정신으로 지나치게 중무장했지만, 그만큼 스스로의 안녕well-being에 위협이 된다.“
-페테르 베셀 삽페 <마지막 메시아(1933)> 중 일부(토머스 리고티의 책 <인간종의 음모(이동현 옮김)>에서 발췌)-
짐승과는 다르게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걸, 우주에서 먼지만한 존재라는걸 ‘의식’함으로써 고통 받는다.
영화 <군중(1928, 킹 비더)>에서 주인공이 압도적인 숫자의 군중들 앞에서 절규하는 장면, 그리고 세계인구 80억명이 되어버린 2020년대를 살아가는 나라는 무력한 존재, 더 나아가, 모든 생명체들이 고통이라는 감각을 공유하는 지구라는 행성과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 …. 이 모든걸 지각할 수 있게 된 의식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육체는 감옥보다 좁은데 의식은 우주보다 무한해졌다.
더 이상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의식하는건 불가능해졌다.
생존을 위해 진화해온 의식이 곧 생존을 의심할 수도 있도록 진화되어버린것이다.
삽페는 비관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도 정직한 윤리주의자였다.
그가 말하는 의식의 고통이란 나 자신의 고통 뿐만 아니라 타자의 고통을 의식하는 고통 역시 포함되어 있다.
“Then woman awoke, too, and said that it was time to go out and kill something. And man took up his bow, fruit of the union between the soul and the hand, and went out under the stars. But when the animals came to their water-hole, where he out of habit waited for them, he no longer knew the spring of the tiger in his blood, but a great psalm to the brotherhood of suffering shared by all that lives.”
-페테르 베셀 삽페 <마지막 메시아(1933)> 영문(Open Air Philosophy 사이트에서 발췌)-
사냥할 시간이 다가왔으나 물웅덩이에 모여든 동물들을 보고 더 이상 호랑이(포식자)의 솟아오르는 기운이 아닌, 오히려 지구상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공유하는 고통이라는 감각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는 내용이 맨처음에 나온다.
그가 말하는 고통의 의식은 타자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에 응답할 수 밖에 없는 능력,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을 모든 생명체로 확장해 너무나도 뼈저리게 인식한 결과다.
결국 변호사 출신인 삽페는 세상에 대한 매우 급진적인 진단을 내린다.
기존의 변호사 출신 철학자들인 벤담이나 베카리아는 계몽주의 한복판에 서서 개혁을 외치는데에 집중했지만 1차 세계대전을 경험해본 삽페에게 개혁 같은건 없으며 최선의 윤리는 번식을 중단함으로써 고통의 재생산을 멈추고 자연스럽게 멸종하는 것이다.(반출생주의)
그리고 이는 단순한 냉담함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큰 우주적 공감피로로부터 도출된 결론이다.
“동전은 심사숙고 후에야 거지에게 주어지지만, 아이는 고민 없이 잔혹한 우주에 내던져진다”
-페테르 베셀 삽페(https://youtu.be/u4m6vvaY-Wo?si=T_58-uF0AUWNPyIw 32분 30초부터)-
분쟁, 빈부격차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시대인 춘추전국시대의 철학자 장자는 의식이 쓸데없는 구별짓기(성심)를 하기 때문에 고통이 시작된다고 봤다.
(성심이 긍정적인 의미(도와 합일하는 마음)로 쓰인건지 부정적인 의미(분별하는 마음, 작게 이루어진 마음)로 쓰인건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었으나 <이종성, 2003, 장자 철학에서의 ‘성심’에 대한 성찰, pp.1-26>에 따르면 결국엔 부정적인 의미 쪽이 더 우세하다고 한다.)
의식이 우리에게 “이건 ‘나’고 이건 ‘나비’다.” 라고 선을 긋도록 만듬으로써 고통을 준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인위적으로 분별하려는 시비지심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는 ‘가정에서의 나’, ‘직장에서의 나’, ‘SNS에서의 나’ 등등 우리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분별을 한다.
그리고 여기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정상성 담론은 장자가 비판한 성심이 어떻게 권력에 의해 제도화되고 작동하는지에 대한 심오한 틀이 된다.
푸코에 따르면,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시대 이후로 사회는 이성과 비이성, 정상과 비정상을 임의적으로 분별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문명(이성)이 스스로를 문명이라 정의하기 위해선 광기(비이성)라는 타자를 발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장자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명백히 도와의 합일을 방해하는 성심이 발현된 어리석은 짓이지만 사회는 일부러 의식(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음으로써 이 성심을 유도했다.
와이즈먼 감독의 충격적 데뷔작인 티티컷 풍자극(1967) 같은 영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메사추세츠 같은 학업능력(MIT 등)이 좋고 잘 사는 주조차 아니, 어쩌면 잘 사는 주였기 때문에 정신장애인이나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인권이 매우 좋지 못했다는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비정상이라고 낙인 찍힌 사람들은 사회적 규율을 내면화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비정상이라고 여기고 나는 정상적이어야만 한다는 정상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된다.
‘비정상인 나’와 ‘정상이고 싶은 나’를 분별하지만 그 사이의 간극은 메워지지 않고 더 큰 고통을 유발한다.
삽페가 말한 의식의 과잉은 진화적 측면에서, 장자가 말한 성심은 사회적 측면에서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악화되었다는걸 알 수 있다.
다른 철학자들이 “고통을 어떻게 의식해야하는가?”를 묻는다면 장자와 삽페는 “의식하는거 자체가 고통이 될 수 있다.” 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 의식이 고통이 되는 메커니즘엔 ‘분열’이 있다.
삽페에게 이 분열은 의미를 갈망하는 유기체와 무의미한 우주 사이의 근본적인 균열이다.
반면, 장자에게 이 분열은 성심이 실재에 가하는 인위적인 구획이다.
삽페는 ‘생명의 통일성’(삽페의 표현대로라면), 장자는 ‘도와의 합일’이 의식에 의해 분열될때 고통을 낳는다.
의식이 고통이라는 비극적 부산물을 낳을 수 있다는건 심리학적으로도 설명 가능하다.
<조성연, & 조한익, (2021), 대학생의 반추 하위유형인 자책 및 숙고, 긍정․부정 과거지향 사고 그리고 우울의 관계, pp. 449-478> 한양대 연구논문에 따르면 반추는 자책(침습적 사고)과 숙고(분석적 사고)라는 두 하위유형으로 나뉘는데 자책이 낮고 숙고만 높다면 우울 수준은 낮지만 자책이 높은데 숙고까지 같이 높아버리면 우울 수준도 제일 높아져버린다.
숙고가 해결책이 되는게 아니라 오히려 자책을 더욱 깊게 파고들어 우울을 증폭시키는 고문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숙고뿐만 아니라 우울증과 강하고 일관되게 연결되는 자책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자책이란 자신의 현재 상황을 달성하지 못한 어떤 기준과 비교할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장자의 성심이나 아까 전 삽페가 말한 지각의 비극과 유사하다.
“인간은 친숙한 세계 속에서 강인하지만, 삶의 품속에서 누릴 영적 조화, 순수, 내면의 평화를 내어주고 얻은 대가인 자신의 강인함을 저주한다.”
-페테르 베셀 삽페 <마지막 메시아(1933)> 중 일부(토머스 리고티의 책 <인간종의 음모(이동현 옮김)>에서 발췌)-
인간은 강인한 의식을 얻었지만 그 의식은 오히려 인간 자신의 결핍들(영적 조화, 순수, 내면의 평화)을 더욱 선명하게 보도록 만든다.
심리학적 자책과 삽페의 의식 모두 자신의 결핍을 지각하고 비교함으로써 고통스러워지는 것이다.
또한, 뇌 회로인 DMN(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은 내면에 주의 집중 할때 활성화 되는 영역인데 이 영역이 지나치게 활성화 되는 순간 우울과 불안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는 장자와 삽페가 말한 의식의 고통이 왜 일어나는지 그 메커니즘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물론, 이들이 다루는 고통은 실존적, 형이상학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심리학만으로 환원될 수 없다.
하지만 심리학적 반추, 철학적 반추 둘 다 자기 참조적 의식의 반복적 작동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둘은 ‘의식비판’ 이라는 키워드에는 묶이지만 진단에 있어서 차이점 역시 존재한다.
장자는 의식이 현실을 명료하게 보지 못하게 만들때 문제라고 진단하고 삽페는 의식이 현실을 너무 명료하게 보게 만들때 문제라고 진단한다.
이건 심리학계에서 말 많은 우울증적 현실주의(Alloy & Abramson의 가설) vs 우울증의 부정적 인지 왜곡(Aaron Beck) 논쟁과 비슷해 보인다.
<Metacognition and depressive realism: evidence for the level-of-depression account, Nicholas C Soderstrom et al. Cogn Neuropsychiatry. 2011 Sep.> 논문에 따르면 경미한 우울증은 현실적일 수 있으나 임상적 우울증은 부정적 인지 왜곡이 있다고 한다.
장자의 진단은 이 임상적 우울증에 더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장자가 말하는 현실(도, 자연)은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에 심리학에서 말하는 현실과 내용물이 다를 수 있으나 그 현실을 대하는 의식의 왜곡 방식(메커니즘)은 유사하다.)
삽페가 말한 고통은 우울증 여부와는 상관없지만 낙관편향이 사라졌을때 오는 불안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또한, 장자의 성심은 예측 부호화 이론과도 접점이 있다.
예측 부호화 이론이란 뇌가 과거의 경험을 통해 내부적으로 생성한 세계 모델을 바탕으로 감각 정보를 끊임없이 예측하며, 실제 감각 입력과 예측 사이의 차이인 예측 오차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이론이다.
. <이종성, 2003, 장자 철학에서의 ‘성심’에 대한 성찰, pp.5> 논문에 따르면 장자의 성심은 공간과, 시간과, 교육에 의해 구속되는데 이는 곧 예측을 고착화시켜 유동적인 실제 감각 입력(장자가 말하는 도(道), 자연)과 차이가 벌어지고 “나는 이런 사람이고 재는 저런 사람이다“, “나는 무조건 실패할거다”, “나는 비정상이다.”라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예측을 하게 되는 메커니즘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삽페가 말하는 지각의 비극은 오히려 이 예측 오차가 너무 최소화된 상태다.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와 의식의 고통이라는 세계모델이 미래에도 절대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예측을 만들며, 실제 감각 입력(실제로도 이 의식을 없애는건 불가능)은 이 세계모델을 끊임없이 확인시켜주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의식에 대한 비판 역시 의식을 통한 비판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식 역설이다.
의식을 넘어서기 위해선 먼저 의식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장자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뒤 좌망(잠시 앉아서 모든 분별을 잊는다), 심재(마음을 비우다) 를 통해 진인이 되어 그 사다리를 걷어찰 수 있다고 말한다.
분별적 사유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무상 삼매와도 접점이 있다.
하지만 삽페는 그 사다리가 끝이 없으며 걷어찰 수 없다는 비극 그 자체를 말한다.
그에게 의식이란 오용(인식론적)이 아니라 오류(존재론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장자와 삽페는 서로 정반대의 세계관(인간의식은 자연의 일부로 회복될 수 있는 것 vs 인간의식 자체가 자연이 낳은 오류)을 전제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즉, 의식이야말로 인간 고통의 핵심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삽페는 인간들이 이 고통을 어떻게든 견디기 위해 네 가지 방어기제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1. 고립(불안한 생각들을 회피)
2. 고정(가족, 자본 등 사회적으로 가치있어 보이는 것들에 기댐, 사회문화적으로 구속된 집단적 성심 역시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
3. 주의전환(오락 등)
4. 승화(예술, 문학, 철학, 빅터 프랭클의 창조적 가치등)
삽페는 네번째 방어기제를 택했으며, 내가 이 에세이를 쓰는것 역시 (삽페의 관점에서)네 번째 방어기제인 승화에 해당한다.
삽페는 이 모든걸 해결책이 아닌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폄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글쓰기를 통해 의식의 고통을 잠시나마 내려놓는다.
이야기 치료에서는 ‘나’와 ‘문제’를 분리하는걸 ‘문제의 외재화‘라고 부르는데 글쓰기 역시 ‘고통에 압도당하는 나’에서 벗어나 고통을 텍스트라는 하나의 대상으로 옮김으로써 ’나‘와 ‘고통’을 분리하는 외재화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현대의 심리치료법 중 하나인 ACT(수용전념치료) 치료는 장자의 초월적인 해결책, 삽페의 불완전한 방어기제를 넘어선 제 3의 길을 제시한다.
ACT란 의식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관찰자의 입장으로서 의식을 수용하는 치료다.
불안하거나 우울한 생각이 들어도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 내 머릿속에 ~~한 생각이 있구나“ 라고 바라보는 것이다.
장자의 해결책이 초월적이고 해방적인 분위기라면 ACT는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분위기다.
장자와 삽페 그리고 ACT까지 의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뜻깊다.
추가)참고로 글쓴이는 삽페의 말에 더 공감하며 ACT는 차선책일 뿐 진정한 윤리는 아이를 낳지 않는것이라 생각한다.
의지를 오류로 본 쇼펜하우어나 존재 자체를 오류로 본 에밀 시오랑 등등 모두 삽페의 견해와 유사하며 반출생주의로 귀결된다.
(참고로 이 글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도덕의 끝인 칸트와 욕망의 끝인 사드 후작을 병치함으로써 보편적 원칙주의라는 동일한 메커니즘을 발견해낸 방법론에서 영감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