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출산을 할때 삶은 좋은것이라는 전제를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좋은’ 삶이라는거의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사람들은 60세에 사망한 사람을 보고 매우 안타까워한다. 왜냐하면 너무 이르게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르다’는 단어엔 더 많은 ‘좋음’을 누릴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동시에 사람들은 90세에 사망한 사람에게는 그 정도의 안타까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90세의 죽음은 60세의 죽음만큼 비극적이지 않은것인가? 삶=좋음이라는 전제가 정말 참이라면 90세의 죽음 역시 200세 까지 살았을때의 좋음을 누리지는 못한거니 똑같이 비극적이어야 하는것 아닌가? 삶이 좋다는건 결국 더 오래 살수록 더 많은 좋음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니 200세, 300세, 400세, 무한세까지 산 인생이 아닌 이상 모든 죽음이 비극적이어야 정상인것 아닌가? 왜 흑사병이 돌던 14세기 유럽시절 60세의 죽음과 2025년 60세의 죽음이 비극의 강도가 다르다는것인가? 좋음의 기준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좋다라는 단어가 얼마나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좋음이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규범이나 타인과의 비교(레온 페스팅거)에 기댄 자의적 기준에 불과하다.
만약 90세의 죽음을 덜 안타깝게 여기는 이유가 90세 이후의 삶이 좋음보다 나쁨이 더 많을거라는 추측에서 나온것이라면 결국 삶=나쁨>좋음일 수 있다는걸 스스로도 인정한 꼴인데 왜 출산할때는 그 나쁨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인 좋음만을 전제하는 것인가?
삶=좋음은 개소리며 출산은 도박이다.
그리고 그 도박은 부모가 했는데 고통은 모두 아이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