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하르트와 벨라 타르

by 김명준

“뇌 전문의사들이 내게 처방해준 수천, 수십만 개의 약 덕분에, 이 수백, 수천 가지 약 처방 덕분에 나는 살아가고 있다!… 나는 주사 기구를 언제나 주머니에 가지고 있다. 아니다, 나는 이제 산림학자가 아니다, 나는 이제 연구자가 아니다, 나는 이제는 도무지 연구자적인 자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스물다섯 살 나이에 나는 병든 인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모자를 쓸 권리가 없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모자(김현성 옮김)> p.31-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장광설 문체는 역설적으로 침묵의 효과를 낳는다. 언어로 담는데에 실패하는걸 계속 보여줌으로써 언어 너머의 침묵을 보여준다. 그에겐 형식이 곧 내용이고 수전 손택이 해석에 반대했던거처럼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말하는가에 더 집중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선 언어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한다는 역설을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계에 도달했을때 사다리를 걷어차야한다.

그러나 베른하르트는 언어의 사다리가 아닌 언어의 미끄럼틀을 택한다.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려는 시도는 계속 실패하고 미끄러지지만 바로 그 올라감과 미끄러짐의 반복이 언어의 과잉과 언어의 한계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벨라 타르의 롱테이크 역시 형식이 곧 내용이 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베르그송이 시간의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지속을 말했다면, 벨라 타르는 거의 질식할듯한 롱테이크로 시간의 무의미하고 피로한 지속을 말없이 직접 체감하게 해준다.(특히 <파멸(1988)> 이후 영화들) 베르그송은 흐름을 말했지만 이건 흐름이 아니다. 흐름이라는건 여전히 어떠한 유동성과 자유와 긍정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건 오히려 정체에 가깝다. 고통의 정체 속에서 시간만 지속되는거에 가깝다. 그리고 이 정체 개념은 베른하르트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베른하르트의 문체 역시 의식의 흐름이라기 보다는 의식의 정체에 가깝다.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의식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같은 생각을 곱씹고, 또 곱씹고, 계속 곱씹는 반추를 한다. 또한, 타르의 흑백촬영은 색채라는 해석을 거부한다. 색채를 비움으로써 날것의 진실을 드러낸다.

베른하르트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너무 많이 말함으로써(반-비트겐슈타인) 오히려 침묵에 도달하고(비트겐슈타인) 벨라 타르는 편집이라는 시간의 공간화를 거부(베르그송) 함으로써 오히려 시간의 공허(반-베르그송)에 도달한다.

아도르노가 서정시를 거부한거처럼, 하이네가 척추결핵 이후 낭만주의를 비판한거처럼 그들은 고통의 미화를 거부한다.

베른하르트에게 해피엔딩 같은건 있을 수 없다.

벨라 타르 역시 타르코프스키식 희망을 거부한다.

베른하르트는 냉소 뒤에 우스꽝스러움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지만 벨라 타르는 그마저도 거부한다.

그리고 나는 만성통증, 우울증, 불안장애, 적응장애가 있는 사람으로서 이 예술가들에게 큰 공감을 얻었다.

일레인 스캐리가 말했듯 몸의 고통은 언어를 파괴하고 ‘나’라는 세계를 파괴한다.

베른하르트는 언어의 실패를 통해 그 언어가 얼마나 표현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됐는지 보여준다.

타르는 파괴 이후 절망만 남은 폐허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파괴된 폐허 속에서도 시간은 맹목적으로 지속된다.

시간은 의식에 대한 형벌이다.


“시간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금지되어 있다. 시간의 리듬에 맞출 수 없으므로 시간에 매달리거나 관조하지만, 나는 결코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에밀 시오랑 <독설의 팡세(김정숙 옮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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