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그 술자리는 평소와는 확실히 달랐어.

by 진짜비밀입니다

A는 중학교 동창이지만 친해진 건 17살 때였으니 고딩 친구라고 호칭 정리를 하고 시작하겠다. 난 어제 내 고딩 친구 A와 둘이서 매콤한 즉석 닭발에 소주 6병을 아주 얼큰~하게 부셨다. 놀랍게도 이 술자리는 저녁 6시쯤부터 시작돼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이게 뭐가 놀랍냐 할 수 있겠지만, 어제 우리는 단 1초도 쉬지 않고 이제 막 썸을 타기 시작한 커플 마냥 8시간을 내리 떠들었다. 화장실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자리 이동도 없이 버너 위에서 팔팔 끓는 국물 닭발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여자들의 수다력을 십분 발휘한 것이다. 사장님 죄송하고 사랑합니다. 사장님네 닭발은 제가 살면서 먹어본 모든 발 중에 가장 맛있는 발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 얘기부터 요즘 이상형은 무엇이고 결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가 어떻게 살고 있고, 걔랑은 왜 헤어졌었는지 등등 대화의 주제를 빠르게 바꾸어가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걔가 걔랑 아직도 만나고 있다는 얘기는 진짜 충격이었고 난 원래 입은 닫고 귀는 여는 쪽이 좋다는 신념하에 살면서 친구들한테 웃기고 까부는 말들을 제외하고는 내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편이다. 근데 어제는 신기하게도 내 입에서 별의별 얘기가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친구가 고갤 열심히 끄덕이며 경청해 준 덕인지 알코올의 힘이 대단했던 건지 모르겠으나 나는 어제 그 누구보다 수다스러운 아줌마였다.


난 고등학생 때 소외되는 친구를 무시하기가 힘들어 자주 공부를 뒷전으로 미루고 친구들을 챙기곤 했는데 이게 때로는 후회가 되기도 하며 지금은 함께 취미를 공유할 수 있고 성숙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섬세한 사람을 만나고 싶고, 요즘 내 머리가 커지며 점점 더 엄마랑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고 느껴 슬프기도 하고, 미래에 내 자식이 심리적 혹은 경제적으로 결핍을 느끼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 내가 이 두 가지를 전부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을까? 하면 자신이 없어서 내 인생에서 결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무섭고 싫어서 어쩌면 결혼을 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 중 평생 하나를 해야 한다면 인간은 욕망에 취약한 동물이라 좋아하는 취향은 언제든지 바뀌기 때문에 잘하는 일을 택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어차피 돈은 평생 모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펑펑 쓰고 싶어 한다. 그리고 2년 전, 호주 워홀에서 외국인들의 마인드가 너무 자유롭고 좋아서 외국에서 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하고 오늘 닭발 컨디션이 정말 미쳤다고, 서비스로 주신 떡 튀김은 더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난 평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 줄 정말 몰랐다. 어쩌면 얘기를 하다 보니 뇌 속에서 이리저리 떠돌던 생각의 조각들이 한데 모여 그럴듯하게 정리된 것 일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평소 아무 생각 없이 보고 듣는 것들이 나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느꼈다. 당시에는 머리를 말리거나 밥을 먹으며 적막함을 깨 주는 용도로 틀어놨던 매체들이 어느새 내 가치관이 되어 그로부터 다양한 생각을 갖게 된 게 신기했고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어제의 술자리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단순 유희가 아니었고 친구 얘기를 들으러 간 자리에서 예상치 못하게 나를 마주한 시간이었다. 꾸밈없고 진솔한 나의 무의식을 말이다. 물론 재미도 엄청 있었다. 대화의 주제가 전환되는 순간들이 아주 빠르면서도 자연스러운 것이 영락없는 아줌마들 같아 웃겼고, 내 얘기를 두 손 꼭 마주 잡으며 들어주는 친구에게 고마웠고 그런 친구를 사귀어둔 내가 많이 기특했다. 나는 어제 아주 오랜 시간 행복했다. 끝으로 걔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 어제의 술자리가 종종 생각나 언제든 나를 편하게 찾아주면 참 좋겠다. 걔의 앞날이 다채로운 물감으로 가득 채워진 팔레트 같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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