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A-7

제13장 사건과 노래 제14장 사랑과 인간

by 김진광

제13장 사건과 노래


아주 먼 길

20년도 더 된 오래전 어느 날 늦은 밤, 그는 경기도 안산의 공장지대를 걷고 있었다. 멀리서 매연과 뒤섞인 짙은 안개를 뚫고서, 가늘게 늘어진 멜로디가 들리는 듯 마는 듯, 끊어질 듯 말 듯 들려왔다. 그로부터 상당 기간 동안, 생각날 때마다 그 멜로디의 출처를 찾아 수소문하다가 마침내 찾아내었다. 지금 생각하면 밤과 안개와 매연과 멜로디와 그때의 감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다 보니 더 센치멘탈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문득 돌아보면 같은 자리지만 난 아주 먼 길을 떠난 듯했어”로 시작하는 가사가 눈에 들어왔다.


이때를 기점으로 그는 실로 오랜만에 70~80년대 즐겨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듣기 시작하였다. 그때의 노래들을 밀린 숙제하듯이 무작정 찾아 들었다. 오래된 노래들은 다행히 인터넷 공간에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점에서 미국의 랜드연구소와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이 만든 세계에 신세를 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음악을 주로 듣고 있다.


인간은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지혜를 수긍하면서도, 직관과 감정의 손짓을 거부하지 못하고 결국 받아들이는 존재인 것 같다. 아흔아홉 개의 기적이 한 가지 우연으로 무너져 내리는 참담함과 아쉬움을 경험하고야 말더라도 말이다. 나에게 교통사고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늘그막이 되어서 젊을 적에 가지 않은 길을 가지 않은 것으로 다행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인간도 있을 것이고, 가지 않은 길에 섣불리 들어가 낭패를 보고 평생 후회하며 살아가는 인간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기적 유전자(selfish gene)와 밈(meme)의 합작품인지, 아니면 강한 지남력을 가진 생명현상의 일부인지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자료는 찾기 힘들지만, 정상은 하나일지라도 정상에 오르는 길은 무수히 많기 마련이다.


니체가 회귀와 권태를 주제로 삼았던 19세기 말은 자연과학이 막 불타오르던 시대였다. 아마도, 니체는 원자핵에 양성자와 중성자가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궤도 운동을 한다는 원자론과 에너지보존의 법칙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이 원자적 상황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보통의 인간보다 훨씬 나은 초인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자가 일정한 궤도에 있지 않고 구름이나 반죽 상태에서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암흑구름과 반죽 속에서 인간이 자유의지로 행동할 수 있는 여유(composure)와 동력(dynamics)이 발생한다. 전자는 입자일 수도 있고 파동일 수도 있다. 전자는 구름 속에 확률적으로 존재한다. 한편, 중성자가 양성자의 수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 정확하게 말하면 타원운동을 한다는 명제는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질량을 가진 모든 사물은 중력을 가진다는 명제도 쉽사리 거역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처럼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진실들도 근본 전제가 무너지면 달라질 수 있다.


우주와 생명의 명제들 앞에서 인류는 아직도 서툰 존재라 할 수 있다. 아니면, 인류는 유전자의 태생적 엇갈림이나 또는 살아가면서 얻은 트라우마로 인하여 의사결정을 회피하려는 결정장애(決定痴)일 수도 있다.


우금치

1894년 11월 20일부터 12월 7일 사이에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牛禁峙) 고개에서 조선 관군과 일본군으로 구성한 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동학군은 참패하고 농민혁명은 좌절로 막을 내렸다.


동학군은 전봉준의 남접 1만 명, 손병희의 북접 1만 명이었다. 이에 맞서는 관군은 1천 명, 일본군은 5백 명 규모에 불과하였으나, 개틀링 기관총(Gatling gun)과 야포 등 신식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동학군은 40여 차례의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번번이 시신이 산처럼 쌓이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관군의 추격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군이 사살되었으며 생존자는 500여 명에 불과하였다.


농민군 지도자 중 남접의 전봉준은 순창에서 붙잡혀 1895년 3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지도자 김개남은 먼저 참수당하였으며,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 김덕명은 전봉준과 같은 날에 처형당하였다. 북접의 최시형은 1898년 붙잡혀 사형당하였고, 손병희는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역사가들은 동학농민군이 외세를 물리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계급적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하였기 때문에 지주나 유생층의 지지를 얻기 힘들었다고 평가한다. 인류 역사에서 이상주의가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는 점진주의를 선호한다.


공주 우금치 고개의 전투에서 일본군의 개틀링 건이 내리쏘던 밤에 농민군은 젖은 볏단처럼 무너졌다. 이 전쟁에서는 일본군이 한 발 앞서 있었다. 그들도 칼 든 마지막 사무라이가 신식 무기 앞에서 처절하게 몰살당한 경험과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나긴 밤이었거든 압제의 밤이었거든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 없는 통곡이어든

불타는 녹두벌판에 새벽빛이 흔들린다 해도

굽이치는 저 강물 위에 아침 햇살 춤춘다 해도

나는 눈부시지 않아라

It's been a long night, it's been a night of oppression

It's the soundless wailing that flowed on Ugeumchi Hill

The dawning light shakes in the burning mung bean field

Even if the morning sunlight dances on the winding river

I won't be blinded


우리 민족의 먼 기억 속에서, 부여와 고구려와 발해의 기마궁수의 유전을 다시금 살려내어 모진 세월, 볼 것 못 볼 것 다 보고 살아온 산하, 피로 얼룩진 산하에, 한바탕 거역의 밤을 펼쳐버리고 싶은 것은 누구만의 부정인가?


그날의 일기

임동확 시집「매장시편」에 ‘그날의 일기’라는 시가 있다. 임동확은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의 증언과 기록을 자임하고 나선 많지 않은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외친다. 오늘은 졌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졌다는 것을 담보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상 많은 ‘짐’이 있었다. 고려 1198년, 무신정권의 수장 최충헌의 노비 만적(萬積)은 개경 뒷산에서 5명의 노비와 함께 “삼한에서 천민을 없애버리자”며 거사를 결의하고, ‘정(丁)’자 모양의 깃발 아래 반란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고 100여 명의 가담자들은 생포되어 강물에 던져졌다.


조선 선조 1589년 율곡 이이의 제자였던 정여립(鄭汝立)이 전라북도 진안의 죽도(竹島)에 근거를 두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모반을 일으켰다. 난이 진압된 뒤, 죽거나 귀양 간 선비가 호남은 1천 명, 영남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정철을 중심으로 한 서인이 동인을 모함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라는 게 정설로 알려져 있다.


조선 광해군 1613년, 명문가 출신임에도 서자(庶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데 한을 품은 일곱 명의 서자가 문경새재에서 ‘칠서(七庶)의 난’을 일으켰다. 이 또한 진압되어 박응서, 서양갑 등은 모진 고문 끝에 가족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1618년 칠서의 난을 모티브로 하여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


우금치 전투에서 전봉준이 잡혀 사형당했다는 사실이 영원한 식민지를 담보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광주 민주화운동은 여전히 살아서 이어지고 있다. 다만, 백주 대낮과 같은 시대에, 민족이 민족을 상대로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이다.


“오늘은 우리가 졌다고 하고 / 어느 날쯤 어딘가에 램프라도 켜 두었다 하자”


임동확의 ‘그날’이 과거형으로 잠시 유보된 분노와 증오를 이야기하였다면, 문승현의 ‘그날’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자, 그 희망마저 헛된 꿈이 아니기를 바라는 간절함이다. 문승현은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출신으로 1987년에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그날이 오면’, ‘오월의 노래’, ‘사계’ 등을 작곡하였다.

청계천을 걷다 만나는 어느 기념관 벽면에는, 22살의 나이로 분신한 전태일(全泰壹 1948-1970)의 격문이 당시의 다급함을 보여주는 듯 읽기 힘든 글씨체로 깨알같이 쓰여 있다.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경, 한 손에는 근로기준법을 든 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분신하였다.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자연현상에서뿐 아니라, 역사와 인생에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뉴턴은 위대하다. 민주화를 외치며 화염병을 던지던 학생들 반대편에는, 이를 막은 더 많은 수의 경찰과 군대가 있었고 백골단도 있었다.


이방인

구보다 사키(久保田早紀, 1958-)는 1979년 도쿄의 전철 안에서 가사가 떠올라 ‘이방인(異邦人)’을 작곡하였다고 한다. 노래 속의 주인공은 어느 날 아침 일찍, 페르시아의 오래된 도시 거리를 걸으면서 흘러간 추억을 되새기며, 아직도 잊지 못한 누군가를 생각한다.


子供たちが 空に向い 両手を ひろげ

Kodomo-tachi ga sora ni mukai ryōte o hiroge

아이들이 하늘 향해 두 팔을 활짝 펼치며


鳥や 雲や 夢までも つかもうと している

Tori ya kumo ya yume made mo tsukamō to shite iru

새와 구름, 꿈까지도 붙잡으려 애쓰네


その 姿は きのうまでの 何も 知らない 私

Sono sugata wa kinō made no nani mo shiranai watashi

그 모습은 지난 날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의 나와 같아


あなたに この 指が 届くと 信じて いた

Anata ni kono yubi ga todoku to shinjite ita

당신에게 내 손이 곧 닿을 거라 믿고 있었지


空と 大地が ふれ合う 彼方

Sora to daichi ga fureau kanata

하늘과 대지가 맞닿은 아득한 저편에서


あなたに とって 私 ただの 通りすがり

Anata ni totte watashi tada no tōrisugari

그대에게 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존재인가요


ちょっと ふり向いて みただけの 異邦人

Chotto furimuite mita dake no ihōjin

잠시 뒤돌아볼 뿐, 나는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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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場へ 行く 人の波に 身体を 預け

Ichiba e iku hito no nami ni karada o azuke

시장을 오가는 사람 물결에 몸을 실어


石だたみの 街角を ゆらゆらと さまよう

Ishidatami no machikado o yurayura to samayou

돌이 깔린 길 모퉁이를 느릿하게 헤매이네


祈りの声 ひずめの音 歌うような ざわめき

Inori no koe hizume no oto utau yōna zawameki

기도 소리, 말발굽 소리, 노래하듯 술렁이는 소음


私を 置き去りに 過ぎてゆく 白い朝

Watashi o okizari ni sugite yuku shiroi asa

날 남겨둔 채 지나쳐가는 하이얀 아침


時間旅行が 心の 傷を なぜかしら 埋めてゆく 不思議な 道

Jikan ryokō ga kokoro no kizu o naze kashira umete yuku fushigi na michi

시간여행이 마음의 상처를 왠지 치유하는 듯 신비한 길


サヨナラ だけの 手紙 迷い 続けて 書き

Sayonara dake no tegami mayoi tsudzukete kaki

안녕이라 적은 편지를 망설이다 끝내 쓰고


あとは 哀しみを もて余す 異邦人

Ato wa kanashimi o moteamasu ihōjin

슬픔에 짓눌린 나는 이방인


White Night

대한민국의 보컬그룹, 포레스텔라(Forestella)가 부른 백야(White Night)는 태초의 우주와 지구를 노래한다.

Lost stories long to be heard

A murmur of history

Will it ring true, the call of the earth

A hope is surrounding me in this sea of green

There is magic in these trees

잊혀진 옛이야기를 들려주게

역사의 속삭임

대지의 울려 퍼짐

초록빛 바다에서 나를 감싸는 희망의 숨결

나무들 사이에 깃든 마법

포레스텔라가 노래하는 세계에서 인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Free your colors

Mountains rise once more

Sing your chorus

Oceans crash like a storm”

너의 색으로 물들여라

산들은 다시금 솟아 오른다

너의 목소리로 노래하라

바다는 폭풍으로 부서진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새로운 모험을 시작할 만큼 희망적이다.


Skies come alive, rain down, awaken my soul

Whisper your secrets to me

I begin my adventure for you”

하늘은 살아나 비가 내리고 내 영혼을 일깨운다

부디 네 비밀을 속삭여줘

널 위한 나의 모험을 시작하리라


백야는 빛, 공간, 초록바다, 나무, 산, 하늘, 비와 영혼과 더불어 태초에 시작된 우주의 탄생을 기억한다. 디스토피아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벗어나 그 옛날 자연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노래한다.


제14장 사랑과 인간


사랑법

강은교(姜恩喬 1945-)는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그녀가 번역한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의 결혼 송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중남미 열대림에 서식하는 ‘알멘드로(Almendra)’라는 나무는 생존 전략으로 번개를 선택한다고 한다. 번개를 유인하여 누설전류로 주변의 경쟁식물을 제거하고, 몸체에 기생하고 있는 덩굴도 태워서 하늘과 바람이 통하게 하고 그늘을 없앤다고 한다. 한 번의 번개는 약 1억 볼트의 전압과 최대 20만 암페어의 전류를 생성하고 섭씨 3만 도의 온도를 수반하는 무지막지한 에너지이다. 알멘드로는 어찌하여 이런 무모해 보이는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생물은 생명의 순환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다. 단 한 번의 산란을 위해 지구의 강과 바다를 돌아 상상을 초월하는 먼 길을 회유하는 연어와 장어가 있는가 하면, 사마귀와 살모사는 교미행위 한 번에 기꺼이 몸을 던진다. 마치 죽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간절하고 처절하게 목숨을 건다. 사즉생(死卽生)이 아니라 사즉사(死卽死)의 길이다.


지브란은 처절하게 목숨을 거는 사랑에 매달리지 말고, 기둥 사이에 바람이 통하고 나무 그늘을 피할 정도의 여유로운 삶을 권하고 있다. 지나고 보니, 적당한 거리두기는 현명한 선택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브란과 같은 과인 강은교 시인은 ‘사랑법’에서, 떠나고 싶은 자의 홀로 떠나는 모습과 잠들고 싶은 자의 홀로 잠드는 모습을 실눈으로 보고 침묵할 것을 조언하고 있다.


떠나고 싶은 자 / 떠나게 하고 / 잠들고 싶은 자 / 잠들게 하고 /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 침묵할 것


인간 사이에 사랑의 후과가 대부분 집착으로부터 연유하기에, 실눈 뜨고 침묵하라는 상당히 유력한 처방전마저도 당사자에게는 견디기 힘든 노릇일 것이다. 그렇다고 침묵의 대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침묵 후에 남는 것은 힘든 기억들이다. 뇌의 램메모리에 상주하여 한동안 뒤흔들어놓기도 하고, 시시때때로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극히 비생산적인 활동을 동반한다.


따라서 침묵은 그나마 중간이라도 가는 데, 그럼에도 메모리 효력은 약해질지언정 지울 수는 없다는 걸 감당할 수 없을 바에는, 차라리 죽을 때까지 사랑이라는 요물을 피해 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요즘처럼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린 나이에 사랑의 기술을 습득하고 헤어질 연습을 해두는 것이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이성복 시인이 명상처럼 말한다. 이별하는 순간이 와서야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사랑의 깊이를 아는 순간 이별은 찾아오고 또 다른 사랑으로 덮어쓰기 전까지는 침묵만이 답이다.


그리하여,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 그대 등 뒤에 있다


디도

고대 로마의 국민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 기원전 70-19)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권유에 따라, 장편 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s)」를 쓴다. 비록 미완성에 그쳤지만, 이 작품이 후대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아이네이스는 로마 건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아이네이아스(Aeneas)를 주인공으로 하여 총 14권으로 구성된 서사시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관심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제4편 디도(Dido) 여왕이다.


기원전 9세기 페니키아의 항구도시 티로(Tyre)의 왕은 유언으로 디도와 피그말리온(Pygmalion) 남매에게 왕위를 맡긴다. 구약성경에도 티로의 왕이 솔로몬왕을 위해 신전과 왕궁을 짓는 데 필요한 레바논의 백향목과 기술자를 지원하는 대목이 나온다. 피그말리온은 디도의 남편 시카이오스(Sychaeus)의 재산에 눈이 멀어 그를 죽인다. 위험을 눈치챈 디도는 그를 따르는 귀족들과 함께 페니키아를 탈출하여, 지중해를 가로질러 북아프리카 카르타고(Carthago 튀니지)에 도착한다. 원주민 왕이 디도 일행에게 황소 한 마리의 가죽으로 덮을 만큼의 땅을 주겠다고 하자, 디도는 소가죽을 잘게 조각내어 이어 붙여 최대한 길게 하여 땅을 에워싸고 도시를 건설하였다.


트로이의 장수 아이네이아스(Aeneas)는 전쟁 패배 후 탈출하여 칼타고에 도착한다. 그는 늙은 아버지를 등에 업고 어린 아들과 함께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고, 여왕 디도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그러나 제우스신은 헤르메스를 보내어 아이네이아스에게 카르타고를 떠나 새 나라를 세우라고 명령한다. 아이네이아스는 디도의 간청을 뿌리치고 떠난다. 절망한 그녀는 아이네이아스가 남기고 간 물건을 쌓아 불을 지르고 불길에 몸을 던진다. 불길 속에서 디도는 아이네이아스를 저주한다. 아이네이아스는 이탈리아반도에 도착하여 로마 건국의 시조가 된다. 디도의 저주는 훗날 로마와 칼타고의 포에니 전쟁으로 이어진다.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146)에서 카르타고는 결국 패하고 철저히 파괴되었다. 디도의 복수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로마제국의 20대 황제 세베루스(Septimus Severus, 191-211)는 북아프리카 출신 페니키아인이었다. 그는 태양신 바알을 섬기는 여성과 결혼하였는데, 왕후의 조언에 따라 기독교를 혹독하게 탄압하였다. 이 시기에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오리겐의 부친 레오디데스와 스승 클레멘트가 처형당하였다.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Dido가 몽환적인 목소리로 「White Flag」를 노래한다.


I will go down with this ship

I won’t put my hands up and surrender

There will be no white flag above my door

I’m in love and always will be

나는 이 배와 함께 가라앉을 것이다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내 문 앞에 백기는 없을 것이다

나는 사랑에 빠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카다 요시코

오카다 요시코(岡田嘉子 Yoshiko Okada, 1903-1992)는 무성영화 시대 일본의 당대 최고 인기 여배우였다. 그녀는 1938년 1월, 국경경비대 위문공연을 핑계로 하여, 영화감독이자 남편인 스기모토 료키치와 함께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의 얼어붙은 라파엘 루스 해협(일명, 라페루즈 해협)을 건너, 사랑의 도피이자 사상의 도피를 한다.


부부는 어렵게 북위 50도 선을 넘어 소련령 사할린에 들어섰으나, 소련당국은 두 사람을 스파이 혐의로 체포한다. 서로 생사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1939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재판에서 오카다는 범죄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10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는다. 남편 스기모토는 혐의를 끝까지 부인하다 총살형에 처해진다. 당시 스기모토는 일본 공산당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국가 소련에서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


오카다는 재심을 탄원하였으나 무시된다. 1947년 석방되어 모스크바 일본어 방송국의 아나운서로 활동하면서도 예술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석방 전 5년간은 소련당국의 비밀 임무에 종사하였다는 루머도 있다. 그녀의 생존 사실이 일본에 알려진 것은 실종된 지 14년이 지난 1952년이었다. 1972년 도쿄시장의 주선으로 35년 만에 귀국하여 잠시 연예활동에 종사하였으나, 1986년 은퇴하고 러시아로 돌아간다. 그녀는 1992년 모스크바 병원에서 8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오카다는 한일병합(1910년), 러시아혁명(1917년), 관동대지진(1923년), 만주사변(1931년), 2차 세계대전(1939-1945)의 풍랑 속에서 당시 유행하던 공산주의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서구의 자유연애 사상만으로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대의 흐름에 무작정 흔들려갔다고 하겠다. 당시 일본 사회는 수백 년 동안 퇴적되어 온 서구사회의 이념과 과학과 문학과 예술이 전쟁과 함께 한꺼번에 몰려왔다. 프론티어에 서 있는 자들이 그것을 작은 용광로에서 녹아내기에는 너무 힘겨웠을 것이다. 많은 자살이 뒤따랐다. 인형의 집의 노라와 부활의 카튜사가 양산되었다.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독일 태생의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이다.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하이데거에게서 배우고 야스퍼스의 지도를 받았다.


독일 정부의 유대인 박해가 본격화되면서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1933), 프랑스가 독일에게 점령당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1941). 대학생 때 스승인 하이데거와 사적인 연인 관계였으나, 그가 나치정부에 협력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결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에서 열린 나치 부역자 청문회에서 하이데거를 위해 옹호하는 증언을 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60년 5월 나치 전범 루돌프 아이히만이 남미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 체포되어 이스라엘 특별법정에 서게 되었다. 아렌트는 재판과정을 직접 참관하고 이를 종합하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이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다. 아이히만은 13개월에 걸친 재판 끝에 1962년 5월 사형에 처해졌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부제는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에 대한 보고서’이다. 아렌트는 칸트가 주장했던 악의 급진성(radical evil)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Banality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Banality는 평범성, 일상화, 진부성 등으로 번역되는데, 그녀는 악이라는 괴물은 머리에 뿔을 달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진부할 정도로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특히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은 예수의 가르침이나 맹자의 역지사지에서 강조해 온 가르침으로서 그만큼 지키기 어렵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관계는 단순한 남녀관계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하이데거라는 당대의 실존주의 철학자의 지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하는 일종의 지적 권위에 의한 종속관계로 시작하였던 것 같다. 문제는 게르만 우월주의 성향인 하이데거에게 유대인 아렌트는 어떤 존재였냐는 것이다.


아렌트가 유명해질수록 하이데거는 몰락하였다. 독일이 패전한 후, 1950년 어느 날 두 사람은 재회한다. 하이데거는 우울증 증세로 시달리고 있었다.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편에 서서, 그의 저서의 미국 출판을 돕거나 그의 나치 전력의 흔적을 덮는 데 노력하였다. 두 사람의 연락은 1975년까지 지속되었다.


아렌트가 하이데거와 결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이데거는 젊은 아렌트의 두뇌와 심장에 실존주의의 사상적 구조를 심어 놓았다. 그것은 나중에 서로 마음이 변하거나 외관과 인테리어가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부숴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는 곧 존재의 몰락이자 사망이었으므로, 그녀는 홀로코스트를 넘어서 하이데거를 끝내 지켜내고자 했을 것이다.


결코, 하이데거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그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하이데거는 젊은 아렌트를 일란성 쌍둥이처럼 지배하였다. 그러면서도 아렌트가 인간적인 면에서 자기를 넘어서는 날이 오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렌트 역시 늘고 병들어 초라해진 하이데거라는 형제를 버릴 수는 없었다. 가족처럼 끈끈한 애증으로 얽힌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자, 곧 다른 한 사람이 뒤따랐다.


마담 퀴리

인류 역사상 이와 같은 여성들이 많았던 것 같다.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는 독신으로 살면서 할 말을 서슴없이 하던 지상적인 여성인 나머지 적들의 시샘을 받아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히파티아의 죽음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래도 퀴리 부인은 상대적으로 행복한 경우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X-ray 설비를 장착한 병원차를 직접 만들어 100만 명이 넘는 부상자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라듐의 발견으로 1903년 노벨물리학상, 191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여성 과학자로서 2개의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물리학상을 같이 수상한 남편 피에르가 1906년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퀴리 부인은 남편의 자리를 이어받아 프랑스 최초의 여성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폴란드계 여성에 대한 프랑스 과학계의 차별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노벨물리학상도 남편이 공동 수상을 강력히 탄원하지 않았으면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엑스레이 장비와 암실을 갖춘 차를 만들어 직접 전쟁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다녔으며, 억만장자가 될 수도 있는 라듐에 대한 특허권을 포기하고 노벨상 상금을 전액 기부하여 동전 한 푼 없는 궁핍한 생활을 하는 신세가 되었음에도, 국가는 그녀에게 뇌종 도뇌르(프랑스 최고훈장)에 인색하였다. 그것은 그녀의 논란이 된 사생활과도 관련이 있었다.


남편 피에르의 돌연한 죽음 후에 유부남인 동료 과학자 폴 랑주뱅과 불륜 관계에 얽혔다. 주고받은 편지들에서 퀴리 부인은 타인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주체성이 엿보인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스웨덴 노벨상위원회는 그녀에게 노벨상을 거절해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이에 대해, 마리 마담 퀴리는 ‘상은 과학자의 사생활이 아니라 업적에 주는 것’이라며 강변하며 끝내 시상식에 참석했다.


아인슈타인의 전문에 의하면, 그녀는 빛나는 재능과 열정의 소유자임에도 남에게 해를 끼칠 만큼 매력적인 여성으로 평가되지는 않았다. 남편들이 왜 아내보다 외관상 한참 부족해 보이는 여성에게 끌리는가는 연구 과제로 남아 있지만, 이를 단순히 외모로만 평가할 일은 아니다. 남성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선입견과 달리, 색맹인 곤충처럼 노란 색깔만 보고 몰려드는 생물은 아니다. 일부 몰지각한 예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섣부른 일반화는 곤란하다.


허난설헌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본관은 양천이며 이름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다.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의 딸이자 허균의 누님이었다. 허엽과 3남 1녀의 가족이 모두 당대의 문장가였다. 이름이나 자에서 알 수 있듯이, 춘추시대 초장왕(楚莊王)의 부인 번희(樊姬)처럼 지혜로운 여자가 되라는 부친의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허씨 집안은 유교 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적서를 가리지 않았으며 남매간에 우애도 돈독하여, 허난설헌은 한문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다. 허난설헌과 허균은 스승 이달(李達)에게서 배웠다. 이달은 서자 출신이어서 비록 문과에 응시할 수는 없었으나 재능이 매우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이달의 사후, 허균이 외워둔 스승의 시 200여 수와 다른 제자가 보관해 온 130여 수를 모아, 이달의 아들 이재영과 함께 여섯 권의 시집 손곡집(蓀谷集)을 간행하였다.


허난설헌은 15세 무렵에 세도가 집안인 안동 김씨 김성립과 혼인하였으나, 두 사람의 부부 관계는 화목하지 못했다. 시어머니와 사이도 좋지 못하였다고 한다. 남매를 낳았으나 둘 다 잃은 데다 셋째는 유산까지 하였다. 오라버니 허봉과 남동생 허균의 귀양살이로 근심 가운데 27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허난설헌의 작품은 유언에 따라 모두 소각되었다. 그러나 허균의 뛰어난 기억력에 힘입어 난설헌집(蘭雪軒集)으로 편찬되었으며, 임진왜란 후 중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이른 나이에 부모가 점지해 준 세도 집안의 남자와 혼인하여 잘되었으면 좋았겠지만, 과거시험 공부한답시고 주색에 빠져 재수만 하고 있는 남편이 문재가 뛰어난 부인의 재능에 눌려 열등감을 느꼈을 것이니, 둘 사이가 좋았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오라버니와 남동생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란 처지여서 시집에서 만족을 느끼기엔 태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서 자식을 둘이나 잃고 쓴 “곡자(哭子)“라는 한시를 감상해 보겠다.


거년상애녀(去年喪愛女) 작년에 딸을 잃고

금년상애자(今年喪愛子) 올해엔 아들을 잃었다

애애광릉토(哀哀廣陵土) 슬프고 슬프다 광릉 땅이여

쌍분상대기(双墳相對起) 무덤이 나란히 서 있구나

소소백양풍(蕭蕭白揚風)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 불고

귀화명송추(鬼火明松楸) 귀신불이 소나무와 개오동을 밝히네

지전초여혼(紙錢招汝魂) 종이에 불붙여 혼을 부른다

현주전여구(玄酒奠汝丘) 물 한잔을 무덤에 붓는다

응지제형혼(應知弟兄魂) 알고말고 너희들 혼이야

야야상추유(夜夜相追遊) 밤마다 서로 노니나니

종유복중해(縱有腹中孩)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는들

안가기장성(安可冀長成) 편히 장성하기를 바랄 것인가

낭음황대사(浪音黃臺詞) 헛되이 황대사를 읊조리니

혈읍비탄성(血泣悲呑聲) 피눈물로 슬픔에 목이 메인다

* 황대사(黃臺詞) : 당나라 측천무후의 시절, 태자 이현(李賢)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처지를 오이 신세에 비유하여 읊은 시


버지니아 울프

전혜린(田惠麟 1934-1965)은 일제강점기에 평안남도 순천에서 조선총독부 경찰 관리였던 전봉덕과 김순해의 장녀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문학적 성향이 강했음에도 부친의 뜻에 따라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에는 독일로 유학하여 독문학을 전공하였다. 집안의 중매로 법대 동문인 김철수와 결혼하였으며 귀국하여 31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법과는 어울리지 않은 심성의 소유자가 부친의 뜻에 따라 별다른 이데올로기도 없이 명문 법대에 진학하고, 문학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지식한 법대생과 결혼하였다. 자유연애와 이혼이 죄악시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심적 갈등의 종착역은 대부분 우울증과 자살이다. 루이제 린저와 프랑수아즈 사강과 버지니아 울프를 섞어놓은 것 같은 이미지의 그녀는 린저처럼 카리스마 지향적인 사기 캐릭터의 삶에는 차마 익숙하지 못한 채, 하인리히 뵐처럼 뚜렷한 작품을 내기에도 부담스러웠다. 결국은 사강처럼 쓰고 울프처럼 생을 마감하였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의 가계에는 영국의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섬나라에서 자주 발견되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1895년 모친 사망, 2년 후인 1897년 언니 사망, 1904년 부친 사망, 1906년 오빠 사망 그리고 울프의 잦은 정신이상 증세와 투신 시도로 얼룩져 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략적 근친혼으로 발생한 유전적 장애와 영국 빅토리아 여왕 가계의 혈우병 인자가 러시아와 스페인 왕조에 끼친 영향은 시베리아 호랑이의 지역적 고립으로 인한 근친약세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순혈주의는 천재성과 장애가 엇갈리면서 각종 이상증세를 발현시키는 것이다.


그녀는 1912년에 결혼한 후, 「댈러웨이 부인(Mrs Dalloway)」 등 몇 권의 의미 있는 저술을 남기고 1941년, 옷에 돌을 가득 넣은 채, 우즈(River Ouse) 강에 투신하였다. 남편에게 남긴 유서에는 환청이 들리고 집중력을 잃었다며 더 이상 남편의 삶을 망칠 수 없다는 안타까운 심정이 담겨 있었다.


블룸즈버리 클럽(Bloomsbury Club)은 버지니아의 오빠인 토비 스티븐이 주도하여 만든 영국 엘리트 계층의 비공식적 모임이었다. 작가, 예술가, 비평가, 철학자들로 구성되었으며 토비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버지니아 자매가 이 모임을 이끌었다. 모임의 장소는 버지니아 자매의 저택이었다.


이 모임에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라는 경제학자가 참여한 것은 의외였다. 자유시장론에 경도된 시장주의자들 앞에서 시장에 대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오늘날도 수많은 나라에서 엘리트 경제관료들의 모델이 되고 있는 케인즈의 위상으로 보아 블룸스버리는 다소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에게 부족한 예술적 감수성에 대한 향수를 엉뚱한 데서 찾기 마련이다.


대공황으로 빛을 발한 케인즈 이론이 100년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각국 경제관료들의 이해관계와 부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만으로는 균형에 도달할 수 없으며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그의 이론만큼, 관료 집단에게 자신들의 이니셔티브와 레드테잎(red tape)을 정당화하는 이론은 아직 없을 것이다. 케인즈를 방패로 삼으면서도 가끔 정부실패에 대한 변명으로 밀턴 프리드만의 신자유주의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관료의 무능과 안일함을 변명하는 데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한때, 유행병처럼 인기를 끌었던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디지털 시대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고 있으며, 시장균형론 외에는 대안이 없는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케인즈의 우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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