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A-8

제15장 위진남북조 제16장 TIT FOR TAT

by 김진광

제15장 위진남북조


황건적

위진남북조 시대는 220년부터 589년까지 370년에 걸친 시대로서, 위진시대와 남북조시대 사이에 해당하는 304년부터 439년까지 약 140년 동안 이어진 치열한 5호16국 시대가 있다.


중국 역사에서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220-589)만큼 드라마틱한 시대도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는 중국 역사상 최대 분열기라는 평가와 함께, 이민족과 한족이 뒤엉켜 보여줄 만한 것은 모두 보여준 이합집산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 시대가 단순히 중국의 흑역사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러한 평가는 다분히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주의적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끊임없는 전쟁 중에서도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은 고구려와 백제에 불교를 전할 만큼 종교에 집착하였으며, 중앙아시아의 도시국가 구자에서 포로로 잡혀 온 구마라습(鳩摩羅什, Kumārajīva)은 후진(後秦)에서 300여 권에 달하는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한자로 번역하는 쾌거를 이루어내기도 하였다.


이 시대는 군신관계와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유교와 법가의 한계를 넘어, 불교와 도교의 중흥으로 북방 민족과 중국 민족의 융합을 어렵사리 이루어낸 의미심장한 시대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영웅과 간웅들이 교차하였다. 이에 대한 자료들은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비롯하여 충분히 많이 남아 있다.


한(漢)나라 말기에 외척과 십상시(十常侍)라 불리는 환관들의 횡포와 부패가 만연하고 농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지구의 날씨도 소빙하기 시기에 들어서면서 농작물 수확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중국에서도 훗날 로마제국이 이민족 용병에 의존하다 패망의 길로 접어든 것과 같은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곳곳에 도적 떼들이 창궐함에도 한나라 중앙정부는 이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하자 지방의 세력가들을 중심으로 군벌화하였다.


184년 장각(張角)이 도교 교단인 태평도(太平道)를 앞세우고 “창천이사 황천당립(蒼天已死 黃天當立, 푸른 하늘은 죽고 누런 하늘이 서리라)”을 기치로 들고 나서니 황건적(黃巾賊)의 난이다. 중국 역사에서 최초의 종교적 반란으로 기록된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위·촉·오의 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하였다.


위·촉·오

한나라 말기 조정은 외척과 환관의 싸움터였다. 명문 집안의 정치가였던 원소(袁紹, 155-202)가 십상시(十常侍)와 2,000여 명의 환관들을 살해한 사건을 기화로, 양주 군벌 동탁(董卓, 139-192)이 정권을 장악한다. 190년, 도주했던 원소가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하여 압박해 오자, 동탁은 수도인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도망친다. 동탁이 여포(呂布)에게 살해당하면서 천하는 군웅할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시작은 조조와 원소였다.


189년, 조조(曹操, 155-220)가 군사를 일으켜 황건적을 소탕하면서 실력자로 부상한다. 조조는 황건적 포로 중에서 재능 있는 인물들을 선발하여 30만 정예부대인 청주병(淸州兵)을 양성하는 등 후일을 도모한다. 조조는 관도 대전(官渡大戰)에서 원소를 궤멸시키고 207년경에는 중국 북부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한다.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 187-251)는 한나라를 멸하고 위(魏)나라를 건국한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명문장가로도 알려진 조비는 뛰어난 행정가이자 외교관으로서 자질을 보였으나, 39세의 나이에 요절함으로써 뜻을 시러펴지 못하였다. 동시대에 위나라는 유비(劉備, 161-223)의 촉한(蜀漢)과 손권(孫權, 182-252)의 오(吳)나라와 삼국을 이루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촉나라 재상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출사표(出師表)를 내고 6차(227-234)에 걸쳐 위나라에 대한 북벌을 단행하였으나, 위나라의 전략가 사마의는 촉한의 약점인 보급망을 차단하는 등 지구전으로 이를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북벌을 앞두고, 제갈량은 유비의 아들인 유선(劉禪)에게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북벌을 감행하는 각오를 밝히고, 그가 없는 동안 뒷일을 부탁하는 내용의 출사표를 올린다. 제갈량의 출사표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감동적이다. 출사표 350자의 중간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신은 본래 하찮은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로 남양의 땅에서 논밭이나 갈면서 난세에 목숨을 붙이고자 하였을 뿐 제후를 찾아 일신의 영달을 구할 생각은 없었사옵니다 하오나 선왕(유비)께옵서 황공하옵게도 신을 미천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려 세 번씩이나 몸을 낮추시어 몸소 초려를 찾아오셔서(三顧草廬) 신에게 당세의 일을 자문하시니 신은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황제를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그 뜻에 응하였사옵니다”


(臣本布衣 躬耕於南陽 苛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候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


“신이 받은 은혜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이제 멀리 떠나는 자리에서 표문을 올리니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씀을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 臨表涕泣 不知所云)


비록 대세에 밀려서 북벌에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초가를 세 번 찾아간다는 삼고초려의 미학은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


오호

249년, 위나라의 실권자 중 한 명인 사마의(司馬懿, 179-251)는 고평릉의 변(考平陵之變)을 기화로 실권을 장악하고, 국호를 진(晉)으로 변경하였다. 손자인 사마염(司馬炎, 265-290)은 위나라 황제의 선양을 받아 서진(西晉, 266-316)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서진은 촉나라에 이어 280년에 남쪽 오나라를 병탄함으로써, 60년간 이어진 삼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서진이 중원을 제패하였다. 초기 10년간 사마염은 청렴하고 유능한 이미지로 율령을 반포하고 토지제도를 정비함은 물론, 친족들을 중심으로 한 봉건제도를 도입하였다. 아마도, 옛 주나라 시절의 이상 국가를 모델로 하여 사마씨 가문의 영구집권을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염은 부여(夫餘)에 받을 빚이 있었다. 북방의 모용선비는 중원에 진출하기 전에 후방에 있는 부여를 먼저 공략하여 숨을 죽여놓을 필요가 있었다. 먼저 부여를 침략하고 5만여 명의 부여인을 납치하여 노예시장에 팔아버리는 횡포를 자행하였다. 사마염은 부여 왕족의 탄원에 따라 부여를 다시 회복시켜 주는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었다. 그러나 사마염의 서진(西晉, 265-317)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사마염에 이어 무능한 사마충이 왕위에 오르자, 양 태후와 황후인 가남풍(賈南風, 257-300)의 권력 싸움이 벌어졌다. 이어서 사마씨(司馬氏)들끼리 서로 대립하며 팔왕(八王)의 난(291-306)으로 이어졌다. 팔왕의 난의 혼란 속에서 분봉 왕들은 이민족을 용병으로 받아들여 군사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민족은 흉노(匈奴), 선비(鮮卑), 갈(羯), 강(羌), 저(氐) 등이었다.


5호(五胡)라고는 하나 선비족을 제외하고 강족, 저족, 갈족은 흉노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선비족은 모용(慕容)씨, 탁발(拓拔)씨, 우문(宇文)씨로 대립하고 있었다. 모용씨 중 토욕혼(吐谷渾)은 내분으로 일찌감치 떨어져 나와, 강족이 사는 티베트 인근으로 이동하였다.


흉노는 한나라의 초창기부터 한나라를 괴롭혀온 유목민족이다. 묵돌 선우가 백등산에서 유방을 고립시킨 다음, 굴욕적인 조건으로 형제의 맹약을 맺고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이에 한이 맺힌 한무제는 재위 기간 내내 위청과 곽거병을 앞세워 흉노와의 전쟁을 지속하였다. 한무제의 끈질긴 공략과 대규모 물량공세로 마침내 흉노는 남북으로 분열되었으며(48년), 북흉노는 서쪽으로 밀려가 훈족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충격을 주게 되니,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유발하여 로마제국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남흉노는 한족에 편입되어 왕족을 인질로 맡기는 대신 평화를 얻는 수순으로 진행되었다.


전조와 후조

서진이 팔왕의 난으로 중원이 혼란에 빠지면서, 변방에 살고 있던 흉노를 비롯한 이민족들은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다. 그 시작은 한나라 왕조의 유씨 성을 가진 흉노인에서 비롯하였다.


흉노 유씨 중 유연(劉淵, 252-310)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남흉노 선우의 직계로서, 삼국시대 말기에 수도 낙양에 들어와 인질로 머무르며 명사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문무를 겸비한 유연은 팔왕의 난이 격화되는 중에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279-306)의 용병으로 활동하였다.


흉노족 원로회의에서 유연을 선우로 지명하자, 유연은 독립을 선언하고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 칭하였다. 그 아들인 유총(劉聰)은 낙양과 장안을 함락시키고(311) 태자를 비롯한 3만여 명을 참수하였다(영가의 난 永嘉之亂). 서진의 황제 사마치(司馬熾)가 흉노 유씨들에게 온갖 수모를 당한 끝에 독살당함으로써, 서진은 40여 년 만에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316년).


318년, 외척인 근준(斳準)이 쿠데타를 일으켜 평양(平陽)에 있던 유씨 가문을 몰살시키자, 장수 유요(劉曜, ?-328)가 장안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공신 석륵(石勒)에게 평양의 반란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근준 일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석륵이 평양을 불태운 일로 유요와 석륵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유요가 국호를 조(趙)로 바꾸고 장안에 도읍을 정하고 흉노의 후예임을 선포하니, 이것이 전조(前趙)이며 5호16국 시대의 시작이다.


319년, 갈족 출신의 석륵은 또 다른 조나라를 건국하였으니 이를 후조(後趙)라 한다. 전조와 후조는 대립하여 전투를 계속한 끝에 329년 석륵의 친척인 장수 석호(石虎, 295-349)가 유요의 장안을 함락시키면서 전조는 멸망하게 되었다. 석륵에 이어 석호가 황제에 취임하였으나(349) 아들들을 중심으로 후계자 분란이 일어나 잔혹한 숙청 작업이 이어졌다. 자식들 간의 싸움이 손자에게까지 미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석호는 병약해져서 황제 취임 후 3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그 후 석씨 일가의 물고 물리는 쿠데타 속에서, 석호의 양자이며 한족 출신인 석민(石閔)이 실권을 장악하여 국호를 위(魏)로 변경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리하여 양국(襄國)을 중심으로 한 석지(石祗, 석호의 서자)의 후조(後趙)와 업(鄴)을 중심으로 하는 한족 출신 염민(冉閔, 石閔과 동일인)의 위(魏)가 혼전을 거듭하였다.


염민은 명목상으로는 갈족임에도(실제로는 한족) 갈족에 대한 불신이 커서, 20만 명의 갈족을 살해하는 종족 말살, 즉 인종 청소를 자행하였다. 이는 갈족 전체의 인구수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염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그는 초나라 항우에 버금가는 용장으로서 이민족으로부터 한족을 지킨 영웅으로 평가받기도 하고, 이민족의 손에서 컸음에도 배은망덕하게 이민족을 학살한 인종주의 도살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바야흐로 5호16국의 카오스의 문이 열리고 피아간에 죽고 죽이는 혼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모용 선비의 모용황(慕容皝, 297-348)이 전연(前燕, 337-370)을 세우고 단(段) 선비와 우문(宇文) 선비를 멸하였다. 그는 부여에 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선왕의 시신을 도굴하고 왕의 모친과 왕비를 인질로 삼는 등 뒷배를 단단히 한 다음, 화북의 후조와 전쟁을 개시하였다.


한편, 팔왕의 난에서 살아남은 사마예(司馬睿, 276-322)가 서진의 문패를 가지고 양쯔강 남쪽으로 옮겨가, 동진(東晉, 317-420)을 세우고 간신히 한족의 이니셔티브를 보존하였다.


티베트계 저족 출신 장수 포홍(符洪, 284-350)은 후조의 석호 밑에서 용병으로 일하다 석호가 죽고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틈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포홍(부홍)이 살해당하자 그 아들 부건(符健, 317-355)이 뒤를 이어 장안을 점령한 다음, 전진(前秦, 351-394)을 건국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전진과 전연

357년, 부홍의 손자 부견(符堅, 337-385)이 쿠데타를 통해 전진의 3대 황제에 즉위하였다. 부견은 한족 출신 재사인 왕맹(王猛, 325-375)을 만나 의기투합하였다. 마치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심정이었다고 전해진다.

왕맹의 내치와 개혁 정책으로 전진의 국력은 강대해졌다. 370년에는 왕맹이 직접 총사령관이 되어 전연을 멸하고 주변의 나라들까지 정복하였으며, 마침내 376년에는 화북을 통일하였다. 이제 부견에게 남은 과제는 천하통일이었다.


왕맹 사후 383년, 부견의 전진은 100만 대군을 이끌고 동진 정벌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전진은 군사력이 십 분의 일에 불과한 동진의 정예군에게 비수대전(淝水對戰)에서 참패하였다. 동진의 군대는 의외로 강했다. 일찍부터 부견의 침략에 대비하여 사현(謝玄), 유뇌지(劉牢之), 하겸(何謙) 등의 맹장 밑에 북부병(北府兵)이라는 정예군을 키우고 있었다.


부견은 이민족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명군으로 평가된다. 한족 출신 왕맹뿐 아니라 전연에서 도망 온 선비족 명장 모용수(慕容垂, 326-396)와 강족 장수 요장(姚萇, 331-393)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비수전투 패배 이후 나라가 분열되어 가는 중에, 모용수는 후연(後燕)을 건국하고 요장은 후진(後秦)을 건국한다. 385년 장안이 함락되고 부견은 요장의 포로가 된다. 부견이 끝까지 선양 요구를 거부하자 사형에 처해진다. 이리하여 전진은 394년, 후진의 요흥(姚興, 366-416, 요장의 장남)에게 패하여 멸망하였다.


부견은 한무제를 의식한 듯, 서역 경영에도 관심을 가져 장군 여광(呂光)에게 서역 원정을 명하였다. 여광의 군사는 구자(Kucha, 龜玆) 등 도시국가들을 정벌하고 금은보화와 함께 구자의 왕자 구마라집을 포로로 잡아 귀환하던 중, 전진이 망한 것을 알고 후량(後凉)을 건국한다. 부견의 전진은 고구려 소수림왕 시기에(小獸林王, 372년),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와 아도(阿道)를 차례로 보내와 한반도 불교 전파의 효시가 되었다.

구마라집의 진가를 알아본 인물은 후진의 황제 요흥이었다. 그를 국사로 삼아 사원을 건설하게 하는 한편, 역경사업에 매진한 결과 300여 권의 불경이 한자로 번역되었다. 문자 그대로 ‘관세음보살’이다. 요흥 사후 417년, 후진은 동진의 장군 유유(劉裕, 363-422)의 북벌로 장안이 함락당하고 멸망하게 되었다.


전연(前燕, 337-370)은 선비족 모용씨의 수장 모용황에 의하여 세워졌다. 부여와 고구려, 단씨와 우문씨의 선비족을 공략하여 요동지방의 패권을 확보한 다음, 352년에는 후조를 이은 염위를 멸망시키고 업(鄴)으로 천도하였다. 365년 전연이 동진의 세력권인 낙양을 빼앗자, 이를 만회하고자 369년 동진의 장수 환온(桓溫, 312-373)이 공격해 왔다. 그러나 명장 모용수의 뛰어난 전술과 전진의 구원군 파견으로 이를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모용수가 전연 왕의 견제를 받아 전진으로 망명하였으며, 전연과 전진은 전후 처리 문제로 사이가 멀어졌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370년 전진의 부견이 침공하여 전연은 멸망하였다. 그 후 부견의 전진이 동진에게 패배하여 분열하자 망명해 있던 모용수가 독립하여 후연을 건국한다. 전진은 강족 장수 요흥에게 접수되어 후진으로 변모하였다.


모용선비와 고구려

모용선비와 부여, 고구려는 오래되고 씻을 수 없는 악연이 있다. 요동 지방을 근거로 하는 모용선비는 요서 지방에 기반을 둔 우문선비와 대립하는 가운데 동쪽으로는 고구려와 경계를 두고 충돌을 반복하였다. 모용외(慕容廆, 269-333)는 285년 눈엣가시 같은 부여를 침략하여 1만 명의 주민을 노예시장에 팔아버렸다. 346년에는 모용외의 아들인 모용황(慕容皝, 297-348)이 재침하여, 부여의 5만여 주민을 포로로 삼고 왕은 자살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그 후 부여의 유민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부여를 세웠으며, 나머지는 고구려에 편입되거나 북쪽으로 피난하여 두막루(豆莫婁)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우는 등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서진이 팔왕의 난으로 중원에 대한 힘을 잃어가자, 모용선비는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강화하였는데 여기에는 나름 사연이 있었다. 고구려 미천왕(美川王, ?-331)이 전연의 지배하에 있었던 낙랑군과 대방군을 수복하는 한편, 우문선비 및 단선비와 손잡고 모용선비를 견제하였다. 갈족 석씨 왕조인 후조도 우문선비와 동맹하여 모용선비에게 적대적이었으며, 저족 부견의 전진도 동진을 함께 친 후 배신을 한 사건으로 전연과 친하지 못하였다.


337년, 전연을 창업한 모용황은 고국원왕(故國原王, ?-371)의 고구려를 침략하여, 수도인 환도성을 함락하고 부친 미천왕의 시신을 도굴하여 가져가는 한편, 왕의 어머니와 부인까지 납치해 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일을 계기로 고구려는 전연에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고국원왕은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371)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와신상담 고구려는 고국양왕(故國壤王, 355-392)과 소수림왕(小獸林王, 355-384)에 이은 광개토왕(廣開土王, 374-413) 3대에 걸쳐 전쟁을 준비하였다. 먼저 392년에 백제와 전쟁을 개시하여 396년에는 항복을 받아냈다. 395년에는 북부여의 옛땅을 차지하고 있는 거란족을 정벌하여 포로로 잡혀갔던 유민을 되찾았다. 398년에는 숙신(肅愼), 일명 읍루(挹婁)를 정벌하고, 400년에는 신라를 도와 백제, 왜, 가야의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마침내 404년부터 3년여에 걸쳐 전연의 후신인 후연을 정벌하여 지금의 북경지방을 공략하고 요동 지방을 점령하였다.


408년, 고구려계 고운(高雲, ?-409)이 후연을 멸망시킨 뒤 북연(北燕, 407-436)을 건국하자 비로소 우호관계에 들어갔다. 고운은 본래 고구려 혈통이었으나 조부가 전연으로 끌려와 정착한 인물이다. 397년 모용부가 후연의 제2대 황제로 등극한 후, 고운이 반란군을 진압하고 모용씨를 하사받아 모용운(慕容雲)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그 후 모용희를 제거하고 나라 이름을 북연(北燕)으로 하여 황제에 등극하고 성을 고(高)씨로 되돌렸다. 고구려 광개토왕은 즉시 사신을 보내 예를 갖추어 두 나라 관계가 회복되었다.


동진

동진이 383년 비수대전에서 승리하여 위기를 극복한 뒤, 환온의 아들 환현(桓玄)이 내부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황제 안제(安帝)의 선양을 받아 초(楚)를 건국한다. 그러나 이듬해 명장 유유(劉裕, 363-422)가 거병하여 안제를 복위시켰다. 유유는 후연의 침공을 격퇴하고 요흥의 후진을 멸망시키는 등 정예군인 북부군(北府軍)을 데리고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위진남북조 시대 동안 한족 출신 장수 중에서 군사적 재능이나 정치적 감각에서 가장 뛰어난 장수로 평가받는 유유는 모용수를 넘어 조조에 비견되는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산동을 완전히 접수하고 낙양과 장안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유유가 선양을 받아 나라를 건국하니 유송(劉宋, 420-479)이다.


이어서 하급 병사 출신의 소도성(蕭道成, 427-482)이 실권을 장악하여 유송의 고명대신(顧命大臣) 심유지(沈攸之)를 제압하고 선양을 받아 남제(南齊)를 건국하였다. 20년 뒤, 소연(蕭衍, 464-549)이 선양을 받아 양(梁)나라를 세우고 50년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그는 불교를 장려하고 율령을 제정하는 한편, 토지제도를 개편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양나라를 이어 진패선(陳覇先, 503-559)이 후경(侯景, ?-552)의 반란을 제압하고 북제(北齊)의 침략을 격퇴하여 진(陳)나라를 건국하였으나, 588년 수(隋)나라 양제(楊帝)의 50만 대군에 의해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북위

5호 16국 시대 말기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선비족의 일파인 탁발(拓跋)씨가 옛 대(代)나라를 재건하여 국호를 위(北魏, 386-534)로 세우고 화북으로 진출하였다.


395년, 탁발규(拓跋珪, 371-386)의 북위와 이를 견제하려는 모용수의 후연이 참합피(參合陂)에서 맞붙었다. 북위 군사의 기습으로 패퇴한 후연은 5만에 가까운 병사가 포로가 되어 산 채로 생매장되었으며, 살아남은 자는 불과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439년 북위는 후연의 명장 모용수가 병사하자, 40만 대군으로 후연을 토벌하고 화북을 통일하였다.


탁발규는 여러 부족들을 해산하여 중국식 호적에 올리고 선비족과 한족을 동화시키는 등 한화정책을 적극 시행하는 한편, 자신도 탁발씨를 원(元)씨로 개명하고 선비족과 한족의 결혼을 장려하였다. 이로써 선비족 고유의 소박한 전투정신은 크게 약화되었다. 유목민족이 정주생활을 하면서 정주의 편리함에 물들면, 고유의 소박함과 상무정신(尙武情神)은 사라지게 된다. 왕놀이에 재미 붙이고 금준미주의 맛을 향유하는 것은 중독적이어서 목숨을 걸 만하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5호들은 팔왕시대 용병의 형태로 중원에 본격 진출하였다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성씨를 내세워 국가를 세우거나 찬탈하고 황제에 오르기도 하였다. 흉노에 이어 모용선비와 저족, 갈족, 강족, 탁발선비가 차례로 중원에 진출하였다가 정주생활의 용광로에 빠져서 융화되고 말았다. 5호16국의 전쟁에서 민족이 멸절되는 수준의 홀로코스트급 사건이 수차례 발생하였다. 모용선비가 북부여를, 염위가 갈족을, 탁발선비가 모용선비에게 자행한 일이 대표적이다.


북위는 초기의 폐불정책과는 반대로 적극적으로 숭불정책을 시행하였다. 북위 시대는 쿠샨왕조의 간다라 미술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쪽으로 전파되는 등 불교가 전성기를 구가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훗날 화려함의 극치라 표현하는 석굴들이 조성되었다. 전진 시대에 개착한 돈황의 막고굴(莫高窟)로부터 북위 시대에 시작한 평성의 운강석굴(雲崗石窟)과 낙양의 용문석굴(龍門石窟)이 수나라와 당나라에 걸쳐 완성되었다.

북위는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를 의식하여, 백제와는 요서 지방을 경계로 적대관계를 형성하였다. 이에 대하여 백제는 남조와 조공관계를 맺으며 대응하였다. 고구려의 광개토왕에 이은 장수왕은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신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한성)을 점령하였다.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고 여기에 가야와 왜가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응하였다.


북위와 백제

북위는 고구려와 합동작전으로 484년, 488년, 490년 3차에 걸쳐 백제를 대규모로 침공하였으나 백제 장수들의 결사 항전으로 거듭 패퇴하였다. 백제 동성왕이 남제(南齊) 왕실에 보낸 문서에 따르면,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예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 장수의 이름을 거론하며 포상 의사를 밝혔다. 양나라의 문장가 소자현(蕭子顯, 487-537)이 편찬한 「남제서(南齊書)」에 따르면, 사법명에게는 지금의 군산을 봉토로 하사하였으며, 찬수류에게는 김제, 해예곤에게는 보성, 목간나에게는 광주를 봉토로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위와 백제의 전쟁은 당시 화북의 패권을 장악한 강자와의 전쟁이라는 점과 북위가 해전에 익숙하지 않은 점에서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반면, 북위가 요서(遼西) 지방에 있는 백제의 식민지를 침공한 것이라면, 백제의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그리스가 지중해 연안의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들을 경략한 사실이나, 페니키아가 북아프리카 지방을 식민지로 둔 사실 등에 유추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 판단된다. 백제가 북위를 물리친 것은 그리스가 2차에 걸쳐 페르시아 대군과 치른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79-449)에서 승전한 것과 비견될 수 있다.


전쟁은 병력 규모민으로 결정되는 싸움은 아니다. 전진의 백만대군이 십 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동진에게 비수전투에서 패하였으며,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백만대군을 동원하고도 십 분의 일에 못 미치는 고구려에게 패하고 살수에서 수공에 휘말려 패망하였다.


북제와 북주

탁발선비의 북위는 성씨를 원(元)으로 바꾸는 등 한화정책을 꾸준히 지속하여 마침내, 수도를 평성(平城)에서 낙양(洛陽)으로 천도하였다. 이는 6진의 난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524년, 북방 6진에서 난이 발생하였다. 육진(六鎭)은 북방 몽골고원에서 할거하던 유연(柔然)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러다 보니, 육진 출신 장수들을 중심으로 북위의 주도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수도가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함에 따라, 메인스트림이 옮겨가면서 육진 출신이 소외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마침내 파륙한발릉(破六韓拔陵)이 반란을 일으켰다. 북위는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유연의 지원을 받아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육진의 난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흉노와 갈족의 혼혈인 이주영(爾朱榮, 493-530)이 하음의 변(河陰之變)을 일으켜 북위 조정에 대한 실권을 장악한다. 하음의 변은 528년, 이주영이 태후와 후계자를 황하에 투신시키고 신하 1,000여 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주영의 부하 장수인 모용선비계 고환(高歡, 496-547)이 이주씨 일당의 폭정을 비판하고 이들을 토벌하여 효무제(孝武帝)를 옹립하였다. 고환의 가문에 대해서는 한족인 발해 고씨(渤海 高氏)라는 설과 선비족 출신이라는 설 또는 고구려계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효무제가 고환을 피하여 궁궐을 장안으로 옮겨 선비족 출신인 우문태(宇文泰, 505-556)에게 의지게 되자, 북위는 업(鄴)을 중심으로 하는 동위(東魏)와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하는 서위(西魏)로 분열된다. 믿었던 우문태가 효무제를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니, 동위는 고씨의 북제(北齊, 550-577)로, 서위는 우문씨의 북주(北周, 557-581)로 나라 이름을 바꾸어 대립하였다.


북제는 5대 황제 고위(高緯, 556-577)에 와서 쇠퇴하였다. 고위는 간신들의 말에 속아 넘어가 그동안 북제의 군사력을 지탱해 오던 명장 곡률광(斛律光, 515-572)과 고장공(高長恭, 541-573)을 숙청하고 주색잡기에 열중하다가, 북주와 남조의 진나라로부터 양면으로 공격을 받았다.


한편, 북주의 3대 황제 우문옹(宇文邕, 543-578)이 권신 우문호(宇文護, 513-572)를 제거하고 577년 북제를 공격하여 멸족을 당하였다. 고씨 일족은 북주 우문씨에 의해 멸족을 당한다. 고위의 어머니 호태후(胡太后, ?-581)는 살아남아 수도 장안에서 기녀로 살아가다가 수나라 초기에 사망하였다. 그녀가 며느리에게 남긴 유명한 말이 “爲后不如爲娼 更有樂趣(황후보다 기녀로 사는 게 더 재미있다)”였다고 한다. 훗날 사가들에 의해 호태후는 ‘창녀 황후(meretrix augusra)’로 불리었던 로마의 황후 메살리나(Messalina, 20-48)와 이집트의 팜므파탈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 기원전 69-30)에 비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주도 무능한 왕실로 인하여 오래가지 못하였다. 결국 외척인 양견(楊堅, 541-604)이 득세하여 선양을 받아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니 수(隋)나라다. 선양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우문씨 집안의 우문초가 전횡을 휘두르는 양견을 죽일 목적으로 연회 자리를 만들었으나, 이를 눈치챈 양건의 측근들에 의해 암살 시도는 실패하였다. 양건은 우문씨 일족을 주살하였다.


북제와 북주는 북위의 지나친 친불정책에 대한 반동으로 불교와 도교를 탄압하며 호화(胡化)정책을 시행하였다. 북위 시절에 장려하던 원(元)씨 성을 다시 선비족의 성씨로 개칭하도록 권장하였다. 종래 북위의 한화(漢化)정책이 북주의 호화(胡化)정책과 뒤섞이자 호한혼혈의 관롱집단(關隴集團)이라 불리는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수나라와 당나라까지 이어지며 지배권력층이 되었다.


호한혼혈 정책의 대표적인 제도로 부병제(府兵制)를 꼽을 수 있다. 이는 호한의 구분없이 국민 개병제를 기반으로 한 병농일치제로서, 평시에는 예비군이 되어 고향에서 농사에 종사하다가 교번제로 차례가 되면 군사훈련을 받는 대신에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였다. 부국강병에 성공한 제도로 평가된다.


유목민족이 서쪽으로 간 까닭

4세기 중국의 화북지방과 중앙아시아는 이민족의 부침이 극심한 시기였다. 그만큼 민족 이동이 심하였는데 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이 부분은 공원국의 「유목문명기행」에서 많은 암시를 받았다. 유목민족은 언제든지 살던 곳을 버리고 이동할 수 있는 민족이다. 정주민족과는 다르게, 잃을 것이 많지 않고 이동 수단도 충분하였으므로 그들은 노예로 잡혀 사느니 차라리 도망을 택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특징인 이동성(mobility)인데, 이동성에는 상대적으로 문자가 자리 잡을 기회가 없었으며 문자문화가 전승·발전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한 우물만을 파지 못하고 의식주의 상당 부분을 농경 정주민족에게 의존해야 했으나 상대적으로 싸움기술은 발달하여 유사시에는 약탈과 전쟁도 불사하였다.


탁발선비의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고 6진을 설치하는 등 북방을 강화하고 수시로 유연을 침략하니, 몽골고원에 자리 잡은 유연(柔然)은 식량 교역이 막혀서 겨울철에 고비사막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은 더욱 위험하고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유연은 타림분지와 트랜스옥시아나(Transoxiana)에 흩어져 있는 오아시스 도시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이동하였다. 트랜스옥시아나는 아무다리아 강과 사르다리아 강 사이의 비옥한 지역으로서 8세기 이전에는 소그디아나(Sogdiana)라고 불렸다. 대표적인 도시로 사마르칸트(Samarqand)와 부하라(Buxoro)가 있었다.


유연이 서쪽에 방향을 정하고 천산(天山)산맥 서쪽으로 이동하자 곧이어 월지의 한 지파인 에프탈(Ephtalite)이 뒤따랐다. 서남쪽에서는 페르시아의 사산(Sasan)왕조가 파르티아(Parthia, 기원전 247-기원후 224)를 멸망시키고 몰려오는 유목민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유목민은 오아시스 도시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사산왕조를 피해 더 서쪽으로 이동하여 볼가강을 넘어 동유럽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앞서 한나라 무제가 흉노를 오르도스(Ordos) 고원에서 몰아내자, 흉노의 일부는 서쪽에 있는 기련(祁連) 산맥 근방으로 이동하였는데 그 여파로 월지가 본거지를 서쪽으로 이동하여 그리스계 박트리아(Bactria)에 정착하였다. 그 결과, 그리스의 조각과 인도의 대승불교가 융합되어 간다라 미술이라는 동서혼혈문화가 형성되었다. 어찌보면, 간다라 미술은 알렉산더 왕이 꿈꾸던 헬레니즘 문화의 효시로 평가된다. 부처님의 조각상은 특정 민족보다는 코스모폴리탄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375년경, 훈족이 서쪽으로 가는 흐름에 휩쓸려 유럽으로 들어간다. 훈족(Huns)의 수장 아틸라(Attila, 406-453)가 신의 채찍을 마구 휘두르니 이 충격으로, 게르만족 등 기존에 살고 있던 민족들이 서로마로 몰려 들어가자 로마제국은 이민족의 쇄도에 익사하는 수순에 들어간다. 훈족은 흉노족과 동일한 민족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유목민족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기련산맥 근처에서 2천 년 된 향나무의 나이테를 분석해 본 결과, 338년부터 377년까지 약 40년 동안, 대규모 가뭄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가뭄의 영향은 유목민들이 천산산맥과 일타이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간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대규모 가뭄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는 기후변화(climate change), 기후위기(climate crisis), 또는 기후비상사태(climate emergence)라는 말로 설명된다. 엘니뇨 현상 또는 기타 알 수 없는 요인으로 하늘에 구름이 생기지 않으니 비가 내리지 않았다. 대지는 뜨거워지고 가뭄이 계속되자 농작물 생산은 급감하였다. 이러한 영향은 잉여생산물이 별로 없는 유목민족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찾아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관측되고 있는 지구 기온의 상승 속도와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증가 속도는 지구 역사상 가장 빠른 것으로 보고된다. 지구의 온도는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1800년대 후반보다 1.2도 더 상승하였으며, 10년마다 평균 0.2도씩 상승하고 있다. 지구는 2천 년 만에 또 다른 민족 대이동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구 대재앙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 인류는 결자해지의 결단을 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


제16장 TIT FOR TAT


빅데이터

데이터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인공지능(AI) 기술이 발달하면서 컴퓨터가 데이터를 처리할 뿐만 아니라, 결과물을 추론, 생성, 판단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에 로봇이나 사이버네틱스로 외관을 갖추게 되면 장차,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새로운 종족이 탄생할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것이 인터스텔라의 TARS나 CASE가 될 수도 있고, 블레이드 러너의 전사나 JOY가 될 수도 있고, 터미네이터가 될 가능성도 있다. 이미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드론이 기대 이상으로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까운 미래에서 전쟁의 주역은 휴머노이드(Humanoid)일 가능성이 크다.


예전에는 자료(data)를 가공하여 유용한 자료가 되면 정보(information)라고 개념을 정의하였다. 오늘날 빅데이터(Big Data) 시대에서는 이런 구분이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모든 자료는 가공하기에 따라, 사용하기에 따라 유의미한 정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게임에서 한번 실패한 데이터라 할지라도 다음 차례에서 승리하기 위한 반면교사로 활용될 수 있다.


데이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시계열 데이터(time series data)와 일정 시점에서 단층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크로스섹셔널 데이터(cross-sectional data)로 구분한다. 통계학이나 계량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시간을 내생변수로 하는 데이터를 분석함에 있어서, ‘변화’를 중요하게 다룬다. 어떤 변화(change)는 추세(trend)와 순환(cyclical)과 계절요인(seasonal)과 불규칙요인(irregular)으로 구분되며, 이 중에서 추세를 추출해내는 작업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계량분석학자들은 시계열 데이터를 가지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연립방정식 모형을 만들어서 궁극적으로 원하는 해를 찾는 방식을 취하였다. 웬만한 경제연구소는 경제성장모델이나 산업연관분석모델 하나쯤은 가지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류의 모델들을 운영해 보니 여러 가지 한계점을 노정하였다. 지나치게 인위적인 튜닝과정을 거치거나, 정책적으로 결과를 미리 정해놓고 역산(逆算, reverse operation)을 하는 등 모델은 전시용 또는 합리화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 밖에도 시계열 데이터는 자기상관(autocorrelation)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서, 과거의 데이터만으로 미래를 예측하려는 기술적 분석(technical analysis) 모델이 유행하였다. 데이터에 작위를 가하지 않고 데이터가 스스로 답을 내도록 함으로써 연립방정식 모델이 가진 ‘양심의 가책’을 회피하고, 예측이 틀려도 기계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기법도 인간의 작위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데이터의 주기와 이동평균, 데이터에 대한 가중치, 매개변수(para meter)의 값을 정하기에 따라 예측치가 달리 나오기 때문이다. 한 번의 예측이 맞았다 하더라도 이를 다른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정확도를 올리면 예측치의 신호 발생 타이밍이 너무 늦어지고, 신호를 빨리 하면 정확도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딜레마를 극복할 수 없었다. 또한 펀더멘탈이 수반하지 않은 테크니칼을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에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VAR(vector auto regression) 등 컴퓨터를 사용한 기법이 개발되기도 하였으나 정답이 없다가 답이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패턴분석에 답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대량의 데이터를 분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2020년대 접어들어 대량의 데이터를 다루는 기법과 그래픽카드가 발전함에 따라서 AI가 유의미한 결과물을 산출해 내기 시작하였다. 데이터를 빨리 검색하고 처리해 주는 수준을 넘어 원하는 답을 생성해 주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허위 응답을 지능적으로 생성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AI 시대에서 인류는 충실한 비서 역할을 하는 조이(Joy), 대리 로봇(Surrogate), 우주 식민지를 개척하는 전사, 노동자, 주치의, 법률가, 의사, 심지어 배우자까지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인류 최초의 신화였던 일처다부제 또는 일부다처제의 판타지가 실현될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인공지능 로봇이 기억 데이터를 바탕으로 인류가 5만 년 전에 일으켰던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을 다시 일으키지 말라는 법도 없다. 앞으로 인류는 AI 로봇의 배신과 반역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과 같은 추세의 빅데이터와 나노컴퓨터라면 인공지능이 수많은 직업군을 대신해 줄 것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인류는 일정 나이가 되면 인생을 올스톱하고 유유자적하면서 적게 일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는 공상적 유토피아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유토피아로 가는 과정에서 빅데이터의 길목에 지켜서서 큰소리치는 위대한 독재자들을 만나는 것은 불가피할 것이다. 이를 ‘신형 독재’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카오스 계는 두 종류가 있다고 설명한다. 1단계 카오스(level one chaos)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 반응하지 않는 카오스다. 예를 들어 ‘날씨’는 무수히 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컴퓨터 모델을 더 정교하게 만들어 기상예측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 반면에 2단계 카오스(level two chaos)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시장이나 정치나 역사는 2단계 카오스의 영역이다. 주식 가격이나 혁명을 예측할 수는 없다. 이를 통계학적으로 말하자면, 자기상관(autocorrelation) 또는 공분산(covariance)을 제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珍光은 생각한다. 수많은 데이터가 착종하는 가운데, 시간이라는 내생변수를 제외하면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주의 시간과 공간 중에서 공간은 무한히 팽창하고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관점을 유지한다면, 또는 시간은 없고 사건의 연속만 있을 뿐이라면, 과학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할 것인가? 시간에 대해서는 장을 달리하여 따로 서술하고자 한다.


이에는 이

농부 카인(Cain)이 양치기 아벨(Abel)을 죽였을 때, 살인죄에 관한 처벌 규정은 없었다. 카인은 야훼 앞에서 아벨을 모른다고 거짓 진술을 하였다. 야훼는 카인이 아벨이 흘린 피로 인하여 땅의 저주를 받아 유랑하는 신세가 될 것임을 예고하였다. 이로부터 카인의 후예인 인류는 태생적인 죄인으로서 율법으로 다스림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운명의 메타포에 감금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과 악에 대한 고뇌는 히브리인의 고뇌이기 전에 차라투스트라의 고뇌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는 좌우에 보후 마나흐(Vohu Manah)와 아샤 바히스타(Asha Vahista)를 배치하였다. 최고신 ‘지혜의 빛’ 옆에서 인간의 선행을 측량하여 천국으로 이끄는 ‘선한 생각’이라는 신과 선악을 심판하는 ‘정의와 진실’이라는 신이 보좌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주위의 적으로부터 내 가정과 재산을 지키면서, 아샤가 인도하는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사유는 인지혁명의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1901년 프랑스와 이란의 공동 발굴팀이 이란의 고대도시 수사(Susa)에서 설형문자가 새겨진 돌기둥을 발견하였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성문법전인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이다. 기원전 1776년에 제정하여 본문 282개 조로 구성된 이 법전은 귀족, 평민, 노예 계급에 따라 재판절차, 절도, 군사, 농업, 주택, 채권 채무, 공탁, 친족, 상속, 양자, 이혼, 축첩, 근친상간, 상해, 치사, 임산부 보호, 직업별 책임, 임차, 노예 등 광범위한 분야에 관한 300여 건의 판결 목록을 열거하고 있다.


그러나 함무라비 법전과 십계명과 도피성(City of Refuge)만으로는 인간의 사적 보복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는 없었다. 공영국의 「유목문명기행」에 의하면, 한반도 출신으로 여진(女眞)에 들어가 금(金)나라의 시조가 된 함보(函普)는 복수가 복수를 낳는 보복의 순환 고리를 끊는 방책으로 다음과 같은 답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살인자의 가족이 노예 1명, 암수 말 10쌍, 소 10마리, 황금 6냥을 부담하면 피해자의 가족을 사적으로 복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형사 처벌과 민사 책임을 결합한 아이디어인데 이 정신은 몽골의 법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피해자에게 장례비용으로 소매은(燒埋銀) 50냥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대부분의 나라에서 형사상 유죄판결과 동시에 손해배상을 병과하도록 법제화하고 있다.


최근에 시행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 중 한 명은 국가적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없애고 배상책임을 상속자에게도 승계할 수 있도록 제안하였다. 반헌법적인 연좌제는 적용하지 않는 대신, 물적 배상책임은 대를 이어 존속하도록 한다면 과연 매국노나 친일파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인지 의문이다. 역사상에서 매국노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설명하는 게 정확한 경우가 많았다.


때는 1200년대 후반기 몽골제국 시절, 칭기스칸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1남과 2남은 서로 알력이 심하여 후계자에서 제외되고 3남인 오고타이가 칸의 지위를 승계한다. 그 후 4남인 툴루이의 부인 소르각타니 베키의 정치력으로 황제의 권위는 툴루이의 자식들인 몽케와 쿠빌라이에게 이어진다. 몽케의 시대에 여몽전쟁에서 고려가 항복하자 몽골은 고려의 태자를 인질로 요구한다. 고려 왕실은 왕준을 인질로 보낸다. 원나라에서 왕준은 칭기스칸의 외손녀와 결혼한다.


고려 왕실의 후손인 왕준(王綧)은 몽골의 고려 침략에 협력한 고려인 장수 홍복원(洪福源)과 갈등하는 관계였다. 왕준의 처가 몽케 칸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여 홍복원은 죽임을 당한다.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洪茶丘)는 이에 적개심을 품고 몽골의 앞잡이가 되어 고려에 들어와 진도와 탐라까지 추격하여 삼별초의 난(三別抄의 亂, 1270-1273)을 토벌한다. 이로써 홍대순(洪大純), 홍복원, 홍다구로 이어지는 남양 홍씨 3대의 매국 행위가 완성된다. 홍다구가 잘한 일도 있다. 중국에서 수박씨를 가져와 개성 근처에서 처음 재배하였다. 한 여름에 즐겨 찾는 수박에 대하여 우리는 홍씨 집안에 빚을 지고 있다.


한강

기원전 1776년 함무라비 왕이 성문법을 공포하였다. 공교롭게도 기원후 1776년, 신대륙의 시민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다.“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이들은 창조주에게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포함하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도킨스의 진화생물학에서는, 인간은 창조되지도 않았고 평등하게 진화하지도 않았다. 진화는 평등이 아니라 차이에 기반을 둔다. 창조주 같은 것은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맹목적인 진화 과정 뿐이다. 생명은 당연한 것이며 자유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행복은 측정할 수 없으며 쾌락만이 존재할 뿐이다. 자연의 질서는 전적으로 이기적 유전자에 의존하는 안정된 질서인데 반하여, 상상의 질서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상상의 질서는 신화에 근거하며, 신화는 인간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곧 사라지고 만다.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韓江)은 2025년 3월 친위쿠데타를 시도한 대통령에게 보내는 성명에서, “훼손되지 말아야 할 생명, 자유, 평화의 가치를 믿습니다. ‘파면’은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일입니다”고 선언하였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이 생명, 자유, 행복을 내세운 데 비하여 한강은 생명, 자유, 평화를 보편적 가치로 이야기하고 있다. 행복이 지극히 개인적이라면 평화는 전지구적이다.


珍光의 생각으로는, 문학상은 다른 노벨상들에 비해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뉴턴이 그의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튀코 브라헤와 케플러의 천문자료가 없었다면 중력의 법칙을 알아내느라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질량불변의 법칙과 에너지보전의 법칙을 전제로 한 것이다. 아직도 아담 스미스와 케인즈와 마르크스의 개념 틀을 벗어난 새로운 경제학은 찾아보기 힘들다. 과학은 발명이 아니며 발견일 뿐이다. 평화상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작위적이다. 그러나 문학상은 인류가 문자로 신화를 기록한 이래 누적되어 온 상상과 창작의 산물이다. 그만큼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영리한 AI가 시와 소설의 상상력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도 관심거리가 될 것이다.


2024년 12월 3일 22시 23분, 대한민국 대통령이 비상계엄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친위쿠데타는 3시간도 되지 않은 12월 4일 01시 01분에 국회의 결의에 의하여 해제되었다. 공식적으로는 04시 30분이다. 미국의 델타포스에 비견되는 대한민국의 707특수임무단(707th Special Missions Group)을 신형 기관단총으로 무장시켜 230년 전 한반도의 우금치 전투에 투입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유능한 직업군인들을 모독하고, 518에 이어 또 하나의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반동적 무능이 저질러진 현장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서 12월 10일, 스웨덴 스톨홀름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상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시상식에서 노벨재단 이사회 의장은 한강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역사적 트라우마 속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탐구한 작품’이라 평가하였다. 여기서 역사적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라 함은 518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소년이 온다(Human Acts)’와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We Do Not Part)’를 지칭한다.


작가 한강은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뒤집어야 한다”고 발언하였다. 이로부터 4일 후, 2024년 12월 14일, 대한민국 야당의 원내대표는 대통령 탄핵소추안 제안 연설에서, “과거가 현재를 도왔고, 죽은 자가 산자를 구했다”며 탄핵안 가결을 촉구하였다. 2025년 4월 4일 11시 1분, 대한민국 서울 종로구 북촌에 있는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는 헌법재판소장이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결정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재판관 8명의 1개월여에 걸친 평의(平議)의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이었다. 마침, 시내 극장에서는 영화 콘클라베(Conclave)가 상영되고 있었다.


4월 21일 부활절 후 첫날,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이 서거하셨다. 4월 26일, 교황의 시신은 성 베드로 광장의 장례미사에 이어 수십만 시민의 애도 속에 로마 시내로 운구되어, 산타 마조레 대성전(Santa Maria Maggiore Basilica)에 안치되었다. 교황청은 5월 7일부터 135명의 추기경이 참여하는 콘클라베를 개시한다고 발표하였다. 콘클라베가 열리는 장소는 성 베드로 성당의 부속 건물인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이다. 천장에는 미켈란제로의 천지창조가 그려져 있다.


죄수의 딜레마

시민의 저항과 동원된 군인들의 소극적 대응으로 친위쿠데타는 실패하였다. 공범 혐의로 체포된 A와 B가 서로 격리된 채로 조사관 앞에 앉아 있다고 가정해 보자.


A와 B가 선택할 수 있는 답안지는 두 가지뿐이다.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거나 죄(罪)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서로 다른 선택을 할 경우 벌(罰)은 가중된다. A가 죄를 자백하고 B도 죄를 자백하면 둘 다, 일정한 양형의 벌을 받게 된다. 그렇지 않고 A가 자백했음에도 B가 죄를 부인하거나, B가 자백했음에도 A가 죄를 부인하면, 죄를 자백한 자는 석방되거나 가벼운 벌을 받는 대신, 죄를 부인한 자는 자백한 상대방이 제출한 증거자료에 따라 가중 처벌을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A와 B 모두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운 좋게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될 가능성도 있다.


이 문제를 명쾌히 분석한 모델이 미국의 정치학자 액설로드(Robert Axelrod 1943-)가 제시한 ‘죄수의 딜레마 게임(PDG Prisoner’s Dilemma Game)’이다. 이 모델을 기반으로 반복 실험을 통해 도출된 결과를 발표한 책이 「협력의 진화(The Evolution of Cooperation)다.


공범인 두 사람은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상대방이 언제 배신할지 모르기 때문에 하이리스크(high risk) 전략을 채택할 수 없다. 그래서 둘 다 죄를 부인하는 의리를 지키기에는 곤란하다. 한 번쯤은 의리를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반복적인 게임에서는 더욱 곤란하다. 아무튼 친위쿠데타의 공범들은 현재까지 대부분 의리를 지키고 있다. 외관상으로는 의리를 지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처벌을 최소화하려는 매우 이기적인 전술전략을 펼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면, 숨겨놓은 이득을 지키기 위하여 형벌을 감수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진화생물학자들의 자연선택론은 자연상태에서는 이기적인 개체, 집단, 또는 유전자만이 우량한 우성인자로 유전하여 왔음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진화의 본질이었다. 그런데 생물계에서는 이타적인 행동이 도처에서 관찰되고 있다. 말미잘과 물고기, 진딧물과 개미, 산호초와 청소물고기와 같이 상호공생하면서 협력하는 이타적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학설이 난무하였다.


생물의 이타적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난관에 봉착한 진화생물학자들에게 액설로드의 이론은 구세주가 되었다. 이른바 생물은 ‘호혜주의에 입각한 이타주의’를 취함으로써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으며, 이러한 이타주의는 진화의 이기적 수레바퀴에 충분히 탑승할 자격이 생긴다는 것이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도 상호협력을 통하여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한 번만 보고 말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거래할 상대방과 하는 게임에서 액설로드는 반복적 상호협력의 전술을 세분화하여 제시한다.


1. 먼저 배반하지 않는다(친절 전략, NICE)

2. 상대의 배반은 즉각 배반으로 응징한다(보복 전략, RETALIATORY)

3. 협력에는 협력으로 대응한다(협력 전략, COOPERATION)

4. 배반에는 한차례 응징한 후 상대가 협력하면 즉시 관용한다

(관용 전략, FORGIVING)

5. 집착하지 말 것(비질투성, non-envious전략)

6. 전략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유지할 것(전략의 단순성, 명료성, clear전략)


그러나 현실 세계는 액설로드보다 더 복잡하다. 공범인 죄수는 초기에는 당분간 자백도 하지 않고 부인도 하지 않는 틈새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시간을 끄는 동안 새로운 정보가 수집되면 이를 이용하여 또 다른 틈새를 추구할 것이다. 피해 갈 여유를 주지 않고 고문과 같은 견딜 수 없는 신체적 위해를 가한다면 둘 다 자백하여 즉, 죄를 인정하여 생명을 포함한 기득권을 포기하거나 주어진 상황과 단절하는 전략을 선택할 수도 있다. 중세의 마녀재판이나 파시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상용 수법이다.


액설로드는 이상의 조건을 충족하는 가장 우월한 전략으로 TFT(팃포탯 Tit for Tat) 전략을 제시한다. TFT 전략은 처음에는 상대방과 협력하고 다음번부터는 상대방이 지난번에 내게 했던 것과 똑같이 따라 하는 단순한 전략이다. 여기에 영악함이 개입하거나 여타 인공적인 개입이 끼어들면 승리할 확률은 그만큼 낮아진다.


珍光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TFT 전략은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시계열분석 방법보다 더 효과적인 전략으로 평가된다. 데이터를 분석하여 예측하는 방법은 단순한 방법일수록 승리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AI 시대에서는 이보다 더 혁신적인 예측 기법이 개발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다. 게임의 양상이 알파고와 인간이 싸우는 게 아니라, 알파고 A와 알파고 B가 승률을 다투는 싸움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다 보면 무한루프에 빠져서 결국은 알파고가 있기 전의 확률분포로 회귀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아무튼, 이기주의를 넘어 이타주의도 설명이 가능해진 마당에, 진화생물학이 일방통행으로 활개를 치고 있다. 최근에는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 나타나 종전의 이론을 비판하는 한편, 각종 문화현상을 생물학의 방법론에 편입하여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 1929-)은 기존의 진화생물학의 천재들이 심리학 방법론을 사용하여 만들어낸 메카니즘(혈연선택, 포괄적합도, 호혜적 이타주의)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철학적인 접근까지 시도하였다. AI 시대에서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융합이 더 빠른 속도로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진화생물학 또는 사회생물학의 도전은 무리한 측면이 많다. 이기적 유전자의 틀에서 생명현상을 해석하려는 시도를 넘어, 신화와 역사와 정치와 문화와 우주까지 확장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다. 앞으로 이기적 유전자의 경계를 넘어서고 확장시키는 메카니즘들이 발견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진화의 자연선택론을 받아들이는 범위 내에서 인정될 것이다.


원자구조론에서 전자의 질서정연한 원운동 모델이 부정되고 전자가 구름이나 반죽 속에 확률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기존의 많은 이론들이 폐기되고 있다. 우주의 9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암흑물질이나 암흑에너지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빅뱅으로부터 쌓아 올린 수많은 천재 과학자들의 전제가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 신의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던 시대에 천동설이 지동설에 자리를 내주리라고는 쉽게 에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현재 이 시각에도 지구는 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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