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대한민국 죽음사용설명서
병원 중환자실이나 요양병원에서 환자에게 연명의료와 돌봄 의료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환자에게 고통을 유발할 수 있는 대표적인 시술로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사용, 인공영양공급, 혈액투석과 함께 승압제 사용, 항생제 투여 등 약물치료 행위가 대표적이다.
여기서는 한 번 시작하면 임종 전까지 중단하기 어려운 인공호흡기 사용과 인공영양공급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 이들은 한국 병원에서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존엄한 죽음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장애물이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존재하는 임상 현장에서는 디테일이 법과 제도를 무력화시키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호흡을 보조하는 장치는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 호흡보조장치의 분류
비강캐뉼라(nasal cannula): 코에 끼워 산소를 공급하는 장치, 산소 농도 24~40%이며 편안하고 장기간 사용 가능하다.
단순 산소마스크(simple mask): 코와 입을 덮는 마스크 형태, 산소 농도 40~60%이며 말하기와 식사가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다.
벤츄리 마스크(venturi mask): 산소 농도 24~50% 범위에서 조절이 가능, 특히 COPD(만성 폐쇄성 폐질환) 환자에게 사용 가능하다.
NRB 마스크(non-rebreather mask): 산소 농도 최대 90~100%까지 공급할 수 있다. 응급 상황에서 사용 가능하다.
인공호흡기(mechanical ventilator): 기관 삽관을 통한 침습적 연결로 사용되며, 중환자실, 수술실, 응급실에서 사용, 환자의 상태(전신 마취, 자발호흡 가능 여부 등)에 따라 다양한 모드로 설정 가능
ECMO(체외막산소공급, extracorporeal membrane oxygenation): 심장과 폐 기능이 심각하게 저하된 환자의 혈액을 몸 밖으로 빼내어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를 제거한 뒤 다시 몸속으로 돌려주는 장치
한국의 연명의료결정법은 연명의료를 중단하더라도 통증 완화, 영양∙수분 공급, 산소의 단순 공급은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단순 산소 공급‘은 비강캐뉼라와 여러 종류의 산소마스크를 의미하며, 인공호흡기나 ECMO는 중단이 가능한 연명의료에 해당한다.
중환자실에서 환자가 의식을 잃고 자발호흡이 미약하여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경우, 인공호흡기가 연명의료 중단 대상에 해당한다고 해서 곧바로 제거하는 것은 가족과 의사 모두에게 매우 난감한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은 코마, 식물인간 상태, 중증 호흡부전, 약물∙마취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연명의료결정법의 핵심 쟁점 중 하나이다. 의료진은 ’임종과정‘ 판정을 최대한 미루고 가족 전체의 합의를 종용하면서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지연할 가능성이 크다. 가족은 효도 콤플렉스와 경제적 부담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며, 결국 집안 어르신이나 목소리가 큰 사람의 의견에 따라 결정이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 병원에서는 일단 인공영양이 시작되면 사망 전까지 중단하기 어렵다. 신체 기능과 인지 능력이 쇠퇴하여 식물인간과 같은 무의식 상태가 되어도 영양 공급은 계속된다. 요양시설의 노인 환자들은 기력이 쇠하고 삼킴 기능이 약해지면 가족들이 인공영양을 시행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인공영양은 코를 통해 위까지 급식관을 삽입하여 영양분을 직접 주입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게 어려우면 위루관을 통해 직접 위에 삽입하기도 한다.
요양병원에서 인공영양은 높은 의료수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기계호흡장치와 정맥영양은 ’의료 최고도‘, 급식관을 통한 인공영양은 그다음 등급인 ’의료 고도‘의 수가가 적용된다. 현행 연명의료결정법에서는 어렵게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내려 기계호흡장치를 제거하더라도 인공영양 공급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인공영양으로 생명이 유지되는 몸은 입력(input)과 출력(output)만 존재하며, 나머지 부분은 미생물이 증식하는 훌륭한 배지(培地, medium)에 불과하다. 감염은 반복되고 강력한 항생제 투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의사 박중철은 의사라는 직업의 도도함에 어울리지 않게 말기환자의 심정을 공감하며 진솔하게 토로한다.
“마지막 순간은 최대한 평온하게 삶을 마감하고 싶다. 혹시 운이 좋아 병이 아닌 노화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구차한 연명보다는 집에서 스스로 음식을 조절하며 평온하게 삶을 마감하고 싶다. 만약 내게 병이 생겨 부득이하게 통증 조절과 같은 의학적 돌봄이 필요하다면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되, 마치 장례식장을 고르듯 꼼꼼하게 병원을 물색할 것이다. 나를 자기 자존심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는 철부지 의사는 피하고 싶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이 있다. 박중철 의사의 방법은 한국적 현실에서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음식 조절을 통한 자택사망의 경우, 이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자살방조 혐의로 처벌받을 수 있는 위험을 안겨주어서는 곤란하다. 따라서 존엄한 단식사를 온전하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고립된 상태에서 행해져야 한다. 이것을 가족이 용납하기가 쉬울까, 아니면 스스로를 ’실종(失踪, disappearance)‘ 상태로 만들어야 하는가.
병원에서 맞이하는 죽음은 대부분 병원이나 의사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운에 맡겨야 하는 게 현실이다. 생전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신당부해 두었다 하더라도, 내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 이르면 임종과정에 대한 판단은 늦어지고 연명의료는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의식이 사라진 뒤에는 의료진의 편도체에 이상이 생기거나 가족 중 누군가의 콤플렉스가 발동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남는 것은 질환 없이 노화로 자연사하고 싶은 소망뿐이다. 그러나 신이 나의 몸에 자연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신을 원망할 수 없다. 창조주가 자기 물건을 어떻게 다루든 우리는 신을 배신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주어진 여건에서 나는 나의 자유의지로 할 수 있을 만큼 해 볼 것이다, 아니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뭔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는 것이 있을 테니, 덤으로 사후 세계에 대한 장밋빛 소망은 여전히 살아 있을 테니‘
珍光의 경험에 따르면, 왜 투신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은 굳이 남의 아파트 옥상까지 찾아가 뛰어내리는지 알 수 없다. 발코니 창문으로 돌진하거나 가스에 불을 붙이는 행위는 홧김에 순간적으로 저지르는 경우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투신자살을 계획한 사람들은 며칠 전부터 여러 장소를 답사하여 현장을 물색하고, 날을 정해 옥상 한편에 가져온 짐과 신발, 양말을 가지런히 놓아둔 뒤 뛰어내린다. 신발을 벗고 뛰어내리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저승에서는 신발이 필요 없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저승이 짐도, 신발도, 양말도 필요 없는 곳이라면 이승보다 더 나은 곳일지도 모르겠다.
혼자 사는 사람이 사망한 뒤 집주인, 이웃, 건물 관리인 등이 시신을 발견하면 즉시 경찰(112) 또는 소방서(119)에 신고해야 한다. 경찰은 출동하여 현장을 보존하고 변사 사건으로 취급한다. 검안 의사가 시신 상태를 확인하는 동안 경찰은 가족관계등록부 등 행정자료를 통해 연고자를 확인한다.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거나 가족이 시신 인수를 거부하여 무연고자로 확정되면, 경찰은 지자체에 시체검안서와 검시필증을 제출한다. 지자체는 지정된 장례업체에 연락하여 장례 절차를 진행한다.
시신이 화장되어 유골이 안치될 즈음, 고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유품정리사 또는 특수청소업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주로 고독사, 자살, 타살로 숨진 사람들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유품을 정리하여 가족에게 전달하며 주변을 청소하는 일을 담당한다.
유품정리사 김새별∙전애원의 저서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 서문에서는, 드라마처럼 마지막 순간에 가족과 함께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천 명 중 한 명에게나 겨우 주어지는 행운이라고 이야기한다. 죽은 자들이 남긴 흔적을 통해 미루어보는 그들의 일생은 생각보다 더 처연하다. 물론 유품정리사가 담당하는 죽음은 결코 행복한 죽음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사연도 많다. 그래서 육신이 떠나는 날까지 이승은 차별적이다. 만약 사후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 억울한 일일 것이다.
시체가 4주 이상 방치된 현장은 악취와 파리떼, 그리고 혈흔뿐이다. 따라서 탈취와 소독 작업이 우선이다. 먼저 오존 살균기와 청소기를 사용하여 악취와 벌레를 제거한 다음, 부패물로 오염된 이불이나 매트리스를 치운다. 그다음에는 벽지를 완전히 제거하고 새로 도배하며, 기계를 이용해 마루나 타일 바닥을 뜯어내 접착제까지 제거한 뒤 다시 깔아야 한다. 부패물이 스며든 문지방이나 붙박이장도 반드시 철거해야 한다. 고인들이 남긴 유품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진 액자 뒷면이나 수의 속에 감추어 둔 현금과 집문서,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와 빈 술병들, 그리고 도벽이나 저장 강박의 흔적이 발견된다.
대부분의 자식들은 부모의 고독사 현장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한다. 부모를 방치했다는 죄책감이 새삼 떠오르기 때문이다. 드물게 현장에 들어온 자식도, 고인이 누워 있던 전기장판 밑에 빼곡히 깔린 오만 원짜리 지폐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진다고 한다.
머리맡에 칠백만 원이 든 봉투와 유서를 남기고 떠난 고인1은 유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살지 못해 떠나는데, 나 때문에 주인아주머니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됩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이 돈으로 모두 완벽하게 보상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돈을 빌려가고 갚지 않은 아는 형에게도 아무런 해가 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폐지를 수집하여 생활하던 고인2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세탁기, 냉장고, 밥솥, 전자레인지, 두툼한 점퍼를 받을 사람을 미리 지정해 놓고 떠났다. 마지막 날까지 성경책을 필사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전직 판사였으나 정치적 탄압을 받아 오랫동안 가택 연금 생활을 했던 고인3은, 이후 경비원으로 일하며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가고 있었다. 지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생전에 시를 즐겨 썼다. 장례식장에는 그가 생전에 밥을 해 먹여주던 서른 명 남짓의 노숙자들이 모였다. 그날 그들은 몸을 깨끗이 씻고 차림새를 단정히 하고 왔다. 식사를 대접하려 하자, 그들은 여태 얻어먹었는데 가는 길까지 염치없이 얻어먹을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른 키를 넘지 않는 문손잡이에 목을 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발이 닿는 위치가 아니라, 삶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에 달려 있다.
어렵게 가족을 찾아 연락이 닿아도 시신 인수를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인수를 거부당한 시신은 의학 해부용으로 쓰이거나 화장된다.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가족을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민등록이 말소되면 기초생활보장 수급 대상에서 제외되고 돌봄 서비스도 받을 수 없다. 존재하지만 제도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세상에 무연고자는 없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사람과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가난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병원 사망의 비존엄성을 이야기하고 죽음의 의료화와 제도화를 비판하는 동안, 어떤 인생은 지병과 장애, 우연한 사고, 가정불화 한 번으로 일생은 물론 자녀들까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그전까지는 다른 인생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삶이었다.
삶의 종착역에서 방 안에 쓰레기가 쌓여가는 모습은 생명 에너지가 소진되고 있다는 증거다. 그때가 되면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그 현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그것마저 무관심하게 되면, 죽음의 수레바퀴는 어김없이 굴러온다.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일본인 목사 사사오 데쓰사부로(笹尾錢三郞, 1868~1914)가 1897년에 작사했고, 한국의 음악가 박재훈(1922~2014)이 1967년에 작곡한 곡이다. 이 노래의 3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다가와 /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 /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고향집에 돌아가 / 아버지의 품 안에서 영원토록 살리라/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장례식장에서 이 찬송이 들리면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부르게 된다. 이는 우리가 공평하지 못한 세상을 지나오면서도 비록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하는 사후 세계를 염원하기 때문이다. 과학이나 기술만이 이 세상을 운행하는 유일한 원리가 될 수는 없다. 염원이 단순한 염원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을 바라고 믿으면 실체(substance)가 된다. 사후 세계에 대한 논의는 제2부에서 살펴볼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