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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너부리 May 04. 2023

도전만 즐기기

<배우기에 본격적이고 싶은 나>

첫째가 쓴 이야기로 그림책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면서 출판물을 제작할 때 주로 사용되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기억하고 있었다.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서 배울 수 있는지도, 기본적인 수강료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운동을 하는 건물에 컴퓨터 학원이 있어서 그냥 상담이나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문의했다.


작심삼일의 표본이 있다면, 그게 나라는 인간이다. 도전만 즐긴다. 꾸준함과는 사이가 멀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항상 본격적이다. 배우고 싶은 것이 생기면 쉽게 시작하고, 쉽게 멈춘다. 대신에 배우기를 멈추기까지 주어진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한다.


어른이 되어 가장 좋은 일은 어린 시절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며 우리를 키우는 엄마에게 학원비까지 부담하라고는 할 수는 없었다. 일종의 보상심리겠지만, 금방 포기하더라도 재밌어 보이는 일이 있으면 우선 시작했다. 학창 시절보다 어른이 되어 사교육비(?)에 몇 십배는 많은 지출을 했다.


첫째를 낳고, 건강 회복을 위해 남편과 함께 짧은 PT를 받았다. 헬스장을 직접 운영하시는 경력이 오래된 선생님이셨다. 남편의 기량이 훨씬 좋을 텐데, 항상 나를 칭찬하셨다. '못하는데 열심히 해서 혼낼 수 없다고. 정말 열심히 한다고.'  영어, 한국 무용, 민요, 피아노 등 두세 달 정도씩 배우고 싶은 것을 나눠 배우는 동안에도 느리지만 사랑받는 '열심 학생'이었다.


늘 하던 것처럼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프로그램 수업만 듣는 사람은 없단다. 게다가 보통 국비 지원을 받는 취업 준비생들이 수강생의 대부분. 포토샵, 일러스트레이션을 익힌 다음 수업을 들어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하신다. 02년도에 한 학기 동안 교양 수업으로 들은 포토샵 수업 외에 디자인이라고는 아이랑 색칠공부만 한 나에게 있어.....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상담을 해주던 분도 살짝 당황하셨다. 하지만 그냥 집으로 가려던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포토샵, 일러스트레이션 인강을 먼저 듣고, 두 달 뒤에 시작하는 강의를 수강하면 될 것 같단다. 인강을 열심히 듣겠다는 호언장담을 하고 등록을 했다.


하지만 프로그램 사용 문법이 생소한 나에게 디자인의 세계는 문턱이 높았다. 일주일 무료 체험 기간 안에 인강만 듣고 따라잡기에는 나는 이제 옛날 사람이다. 구글 캘린더를 두고, 달력에 일정을 손수 쓰는 아날로그형 인간인 나에게  '인강은 그냥, 인강'이었다. 신경 써주신 마음이 무색하게.. 중도 포기. 책을 사서 읽기도 하고, 이리저리 만져 보았지만, 외계어이다.


무식하니 정말 용감하다. 그냥 직접 부딪쳐 보기로 했다. 비대면으로 수업을 더 많이 듣는지 앉아 있는 수강생 수는 적다. 무얼 배우든 질문이 많은 나는 가능하면 대면이다. 선생님께 상황을 말씀드리고, 너무 신경 쓰지 마시라 말씀을 드렸다.


괜찮다고. 천천히 여유를 갖고 따라오면 된다고 말씀하신다. 분할, 스프레드, 프레임, 도련. 각종 단축키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샘이 말씀하신 기능의 위치를 찾는 것도, 이해의 속도도 확실히 느리다. 이것저것 해보느라 바쁜데 다른 수강생들은 뚝딱 해낸다. 자질구레한 질문도 당연 내가 가장 많고, 샘도 자꾸 내 주위를 맴도신다. 나의 습득 속도가 너무 느려서 피해를 볼까 긴장이 바짝 된다. 그래도 이 정도면 빠르게 따라가고 있는 거라고 자기 위안을 해본다. 포토샵도 배워서 달인이 되어볼까? 하는 헛생각도 해본다.


토, 일 세 시간을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나오니 미안하다. 유일하게 집에서 네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을 욕심내어도 괜찮은 걸까? 아이의 학원비보다 비싼 돈을 내가 써도 괜찮은 걸까? 여러모로 남들에게 민폐가 되나 싶다. 이틀 연속 컴퓨터를 세 시간 넘게 만졌더니 오른쪽 어깨와 허리 디스크 통증이 다시 살아난다.  


그. 럼. 에. 도. 새로운 것을 배우는 즐거움이 미안함을 이겼다. 전혀 접해보지 않은 세상에 들어선 미묘한 설렘이 나를 환기시킨다. 세상은 넓고, 배울 것은 많다. 짧게 배운 모든 분야의 실력은 미약하지만, 그 분야의 시작점을 아는 것만으로도 나름대로의 보람과 즐거움이 있다.


딸의 그림책도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이 프로그램이 내 인생에 또 사용될 날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선 시도했으니 후회는 없다. 망하더라도, 이왕에 망한다면 많이 시도하고, 멋지게 망하자는 생각으로. 그냥 버텨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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