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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너부리 May 03. 2023

나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

<너의 숲으로> 를 읽고 / 아이의 숲과 아빠의 숲은 공존할 수 있을까?

아이의 숲은 여유롭다. 내딛는 걸음마다 그 순간을 즐긴다. 아빠의 숲은 숨이 가쁘다. 목표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각자 서 있는 숲의 모습은 다르다. 그리고 아빠는,  아이의 숲으로 향할 용기를 낸다. 


누군가의 숲에 온 마음을 던져 본 적도, 타인에게 나의 숲을 온전하게 열어본 적은 더더욱 없는 것 같다. 

그 이전에, '나의 숲'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일을 쉬고 한 달 동안은 '나의 세계'에 집중했다. 매일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잠이 들 때까지 1분도 쉬지 못하고 움직이던 삶에서 벗어났다. 항상 쫓기는 듯한 삶에서 벗어나니 '나'라는 인간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의 나를 일정한 기준으로 구획을 나누어 분류한 다음 다시 정연하게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를 낳고 가족을 위해 여러 해 동안 일을 쉬었다. '직장'을 돌아갈 곳이라고 칭했고, 육아를 하면서도 스스로를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라 규정지었다. 하루 종일 씩씩한 사람, 많은 일을 시간 안에 뚝딱 해내고, 사람들의 말을 다 들어주면서도 항상 활기찬 사람. 직장 안에서의 '나'의 모습이다. 집안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일을 하는 동안 풀려 퇴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쉼은 좀 다르다. 절박하다. 육아 때문이 아닌 나를 위해서도 쉼이 필요했다. 여러 이유로, 이 일을 내가 계속해도 되는 것인지, 일에서 받는 부담감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 계속 드는 시기이다. 지금, 나에게, 직장은 머무는 곳은 될 수 있어도 돌아가고픈 곳은 아니다.


사십 대가 되어 나를 다시 들여다 본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성공을 원하는지 깊이 고민해 본 적도 없다.  올해 계획에는 직장으로 돌아갈 준비도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일을 그만둔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는 있을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머릿속만 복잡할 뿐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성공하는 사람들은 시대의 흐름과 필요를 읽어내는 감각, 그에 따르는 노력, 시작하는 용기를 가진 분들이다. 무엇이든 한 박자씩 늦는 나와는 거리가 멀다.


'나의 세계'를 규정짓는 일은 극도의 N형인 내게 정말 중요하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지구, 환경, 세계, 사회, 정치, 문화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가치와 올바름'과 같은 조금 허세스러운 주제들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내가 원하고 있는지 내 마음을 늘 살핀다.


'엄마, 동생, 학창 시절, 친구들, 아빠의 죽음, 가난, 공부, 도서관, 책, 작가들, 뮤지컬 넘버, 대학, 직장, 연애, 결혼, 아이들, 엄마.'


이것저것 적어나가다 보니 과거의 나보다 현재의 '나의 세계'가 훨씬 풍요롭다. 마음을 채우는 주된 감정도 지금이 훨씬 더 안정적이다. 결혼 후, 물리적으로는 잃은 것이 확실히 많지만, 심리적, 감정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우면서도 안전하다.


나의 세계에 집중하는 만큼 아이들에게도 그 세계가 얼마나 중요할지 엄마로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걸음은 아이들의 숲을 향해 있을까? 


첫째는 요즘 반짝이는 것과 고양이를 좋아한다. 둘째는 자동차와 공룡에 푹 빠져 있다. 아이들의 교우관계나 좋아하는 책, 음식, 놀이, 가수.. 들도 알고 있다.


일을 쉬면서 아이의 배움을 넓히겠다는 마음으로 가장 먼저 학원 스케줄부터 정리했다. 코딩이나 AI 수업처럼 살면서 필요할 것이라 여겨지는 분야의 학원 정보를 찾았다. 코로나로 경험하지 못한 체험 활동들을 신청했다. 학부모 총회에 참석하고, 선생님과 대면 상담을 했다. AI 시대에 필요한 능력에 관한 강의를 찾고, 새로 바뀔 교육과정을 미리 살폈다.


법정 스님의 말을 빌리자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말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또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나'라는 존재일 것이다.  


엄마는 아이들이 보고, 듣고, 먹는 것, 읽는 책, 배우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가장 영향력이 큰 존재이고, 밀접한 사람이다. 엄마인 내가 아이들이 살 미래의 세계에 대해 잘 아는 일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의 세계를 위해 가장 우선시 할 일이 맞는 걸까? 


오늘 아이들의 눈을 몇 번이나 바라보았었나, 질문이 아닌 대화를 한 시간은 얼마나 되었는지. 나의 아이들은 스스로의 세계를 안전하고 다채롭다고 여기고 있을까?


아이들은 늘 자신의 숲을 열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 눈으로, 입으로, 때로는 손을 내밀어 엄마의 세계를 두드리고 있다. 즐거운 일도, 슬픈 일도 펼쳐 놓고 '나'를 초대하고 있다. '너희는 나의 우주'라고 늘 말하면서, 현재의 우주가 괜찮은 지에는 무심했다. 아이들의 지금, 여기의 세계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 참 오만한 엄마이다. 


오늘은 아이들의 숲에 함께 있어주고 싶다. 하지만 내일은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나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는 결국 다르다. 다만 아이들의 숲으로 방향을 살짝 틀어보려고 한다. 아이들이 커가며 우리의 세계는 분명 부딪칠 것이다. 서로의 세계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치더라도 빠르게 회복했으면 한다. 아이들의 세계를, 반짝거리는 그 숲을 존중하고 지켜줄 수는 있지만, 나는 그 숲에 늘 함께 있어줄 수 있는 엄마는 아니다. 각자의 숲을 인정하고, 함께 성장하기를 바란다. 


숲의 공존을 위해서는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알아야 하고, 어떤 것을 해나가야 할지. 어려운 과정이겠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귀를 열자. 눈으로 보고, 또 몸으로 듣자. 아이들의 하루에 집중하자. 어제와 같은 하루지만, 조금씩 변화하는, 그래서 또 특별한 하루이고,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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