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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너부리 Jun 22. 2023

 미움과 용서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겠다는 선택


엄마의 그런 완강한 모습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시골의 작은 가게에서 하루를 보내다 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들어서기만 해도 무엇을 사러 왔는지 알 수밖에 없는 단골들, 시주를 받으러 오시는 스님, 택배 총각들. 교감 선생님이나 면장으로 퇴임하신 어르신들이 손님용 소파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한창 말씀하신다. 처음 보는 만물상들이 아이 하나를 들어갈 것 같은 커다랗고 검은 가방 속에 각종 물건을 담아 온다. 아니 각종 사연을 담아 온다. 그리고 다음 날은 택배가 한가득 도착하는 날이다. 행주 100개, 냄비 일곱 개, 그릇 세트, 여름용 잠옷, ‘테팔’ 아닌 ‘네팔’이라고 적힌 프라이팬. 없는 것이 없다.      


“혼자서 동생 셋을 키웠단다. 젊은 것이 손이 아주 쭈글쭈글하더라.”

“아, 진짜! 그럼 우리 집에 보내지 말고. 그냥 필요한 사람 나눠줘. 집에 더 이상 둘 데도 없다고!”      


 오후 두 시쯤, 고무장갑이 갑자기 필요 없냐는 전화를 받는다. 필요 없다고 해도 보낼 거면서, 전화는 왜 하는 건지. 나름의 예고.      


가게 주변을 맴도는 고양이들을 ‘징그러워 죽겠네.’ 타박하면서 하루 한 끼 물고기를 대접하신다. 저 배볼록이는 새끼를 밴 것 같다며 작대기로 옆의 고양이들을 쫓아내고, 먹을 자리를 확보한다.


함께 드라마를 보다가 말이 안 되는 전개에 한마디 덧붙이면,


“세상 살면서 말이 안 되는 게 없고, 이해 못 할 상황이 별로 없다.”      


며 진지하게 드라마 속 인물들을 옹호하신다.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그럼요, 그럼요.”이다. 자기를 좀처럼 내보이지 않으신다. 상대방이 하는 말에 응수하는 대답이 거의 다이다. 어린 시절에는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직장에 다니고 나서야 타인의 말에 늘 긍정으로 대응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손주들의 말에도 눈으로, 귀로, 웃음으로 그리고 온 마음으로 답해주신다.


“나가세요.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가 어디냐고 찾아왔냐는 말도, 욕도 한마디 없었다. 할머니의 울부짖는 소리가 집안을 메웠으나 엄마는 고요했다. 무가당 주스 두 병이 든 상자를 들고,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던 두 모자. 내 뒤에 바싹 붙어 있던 동생. 엄마는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쓴다. 그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처럼 왔다갔다 분주하다.      


가끔 이유 없는 불안감에 종일 심장이 두근거려 숨쉬기도 힘든 날이 있다.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이 그랬다. 오후부터 불안감이 극도로 높아,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계속 대문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두근거림이 진정되었다.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갑자기 굳어버리던 엄마의 표정, 옷을 챙겨 입고 할머니에게 우리를 부탁하던 순간. 그날의 일은 모든 순간이 또렷하고, 그 모든 순간이 미치도록 괴롭다.      


보험도 들지 않은 음주운전 차였다. 처참한 모습에 경찰 아저씨들도 신원확인을 말렸다 한다. 아빠를 치고도 몇백미터를 더 달렸다고 한다. 그렇게 늦은 밤은 아니었지만. 인도도 없던 시골길에서 일어난 사고,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정말 허망한 죽음이었다.      


태어나 처음 치르는 장례식, 친척들의 울음소리와 우리를 바라보던 눈빛, 머리에 꽂혀 있던 하얀색 머리핀.      

울지 않았다. 아빠를 화장하는 순간. 아빠와의 물리적 이별의 그 순간에. 열한 살의 나는. 아빠에게 엄마 앞에서 울지 않겠다, 우리 가족은 절대 내가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내가 입원을 했다. 의사 선생님은 심리적 충격을 더 큰 원인으로 짚으셨다. 다리를 다시 움직이고, 자연스럽게 걷는데 보름이 넘게 걸렸다. 스스로 가엾게 여기지 않으려고 버티던 날들이었다. 다행히 겨울방학이 금방이었기에 퇴원 후, 학교를 길게 나갈 필요는 없었다.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엄마는 딸의 간병을 해야했다.


아빠가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집이 우리 모두 아직은 낯설던 그때. 그 모자의 방문은 우리를 흔들어 놓았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여자와 엄마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을 지키는 사람. 남편이 죽인 사람의 집에 아이의 손을 잡고 찾아왔지만, 용서를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지 않았을까.      


그들을 대하던 엄마의 태도는 분노도, 슬픔도, 냉랭함도 아닌 완강함이었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사람처럼,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처럼.      


엄마는 끝내 아빠를 죽인 가해자와 합의를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1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1994년이었다.       

누군가의 무신경한 말처럼, 얼마라도 합의금을 받고, 우리를 키우는 데에 보탰더라면, 경제적으로 조금은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의 엄마를 마주한 사람이라면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살다보면 끝내 용서하지 못할 일들을 만난다. 도망칠 필요도 없지만, 그곳에 메여 있을 필요는 없다. 때로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 용서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다.


그날 이후로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재판이 끝난 이후로 30년 동안, 엄마는 아빠를 죽인 자에 대해 우리에게 한마디도 꺼내신 적이 없다. 감옥에서 나온 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마음만 먹으면 금방 알 수 있는 작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언급하지 않으셨다.  


친척 어르신이 '이사를 갔다, 어디쯤 살고 있다.'는  말에도, 고개를 숙이고 대답만하실 뿐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용서도 없었지만, 엄마는 아빠를 죽인 사람을 미워하느라 자신을 소비하며 보내지 않으셨다. 대신 남은 우리의 삼시 세끼를 챙기고, 갑자기 늙어버린 할머니와 우리를 돌보셨다. 담담하게 그리고 차곡차곡 오늘을 살아 나가셨다.     


그리고 나는,

 연신 죄송하다 말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도,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버티던 나보다 몇 살은 어린, 그 아이를 보면서 그날 밤 태어나서 처음으로 ‘용서’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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