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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너부리 Aug 13. 2023

고독한 그 밤에

나를 지켜 줄 무기 - 독서

    

  용한 점집에서 건강하게는 아니더라도 100살은 거뜬히 살 거라고 장담했다는 할머니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8개월 만에 쓰러지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일하는 시간을 늘려야 했다. 아들을 잃은, 여든이 가까운 할머니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셔야만 했다. 할머니는 당뇨가 있으셨기에 움직임이 불편하셨다. 주로 누워계셨기에 밥을 차려주시거나 어린 우리를 살뜰히 챙겨주시지는 못하셨지만,  학교에 다녀오면 우리와 함께 계셔 주셨다.


 5학년 여름방학이 다가오던 무렵, 할머니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할머니의 죽음'이 온전히 이해되었다. 할머니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감당할 수 없으셨다. 

  

학교라는 보호막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할머니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방학은 달랐다. 5학년, 겨울방학, 낡은 한옥에 돌보아 줄 어른 없이 12살의 나와 8살의 동생만이 남았다. 우리 곁에 엄마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아빠가 떠난 후에 내 마음은, 깊은 슬픔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할머니가 떠나신 후에는 마음 안에 차디찬 냉기가 흘렀다. 가장 비슷한 감정을 고르자면, ‘쓸쓸함’이다.

 

겨울방학을 보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내 삶에 얼마나 큰 변화를 주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그 쓸쓸함은 지금도 늘 등 뒤 어딘가에 스며 있다.  아꼈던 누군가와 헤어지거나,  의도적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들었을 때, 아이들을 돌볼 수 없을 만큼 아플 때, 때때로 갑작스럽게 나타나 나를 크게 흔든다. 이 서늘한 마음 때문에 오래 살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낡은 집, 벽을 툭치면 흙이 벽 안에서 투둑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먼 도로에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도 바로 옆을 지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페인트가 다 벗겨진 대문. 맘만 먹으면 누구나 넘어올 수 있는 낮은 벽, 대문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재래식 화장실.  동네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연탄보일러.


집이라는 공간을 따듯하다 느낀 적이 없다. 집은 그냥 엄마가 올 때까지 동생과 함께 있어야 하는 공간이었다. 엄마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부터야  집은 안전하고, 아늑한 공간으로 변한다.


연탄을 중간에 갈아야 하는 것은 내 몫이다. 친구들이랑 밖에서 놀다가, 긴 책을 읽느라, 그냥 깜박해서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불이 꺼진다.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번개탄을 사고, 성냥으로 불을 켜서 불을 살려 보려 하지만, 속수무책이다.


집 안에 있는 이불을 다 꺼내 최대한 두껍게 펴고, 덮는다. 그 좁은 이불 안에서, 하루 종일, 동생과 인형 놀이를 하거나 책을 읽는다. 춥고 시리다.  

 

기형도의 <엄마 걱정>이라는 시를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면 그 겨울의 차가운 이불속이 떠오른다. 동생에게 줄 귤껍질을 벗기면서, 인형 놀이를 하면서, 둘이 먹을 밥과 반찬을 준비하면서도 나의 등은 대문 쪽으로 온 신경이 가 있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다. 해도 시든 저녁, 찬밥처럼 담겨, 엄마를 기다리던, 내 유년의 윗목이 안쓰럽지만, 그래도 다행히 나에게는 동생과 책이 있었다.




연탄불이 꺼진 방, 엄마를 기다리며 차가운 이불속에서 읽었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라임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다. 단지 소년과 초록 나무 화분 표지가 예뻐 골랐던 책, 한 겨울 이불 안에서 제제와 뽀루뚜까를 만났다.


 제제가 뽀루뚜까를 잃었을 때, 뽀루뚜까의 죽음 자체보다 제제가 뽀루뚜까를 잃었다는 사실이 더 마음 아팠다.  자꾸 서러운 눈물이 나, 동생한테 들킬까, 이불을 머리끝까지 둘러썼다. ‘제제, 내가 너와 함께 울어 줄게.’ 제제가 나처럼 느껴져서, 그  슬픔으로, 찬 겨울을 지났다.

 

 6학년 담임 선생님께서는 가끔 청소가 끝난 후, 마지막까지 남겨 남는 문제집이나 본인 자녀가 읽던 책을 선물로 주시곤 하셨다. 친구들 사이에서 선생님이 차별한다는 이야기가 돌고, 함께 다니던 친구들은 나를 미묘하게 멀리했다.

  

점심시간,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등나무 보라꽃이 참 예쁜 계절이었다. 같은 반 친구 한 명이 “우리 엄마가 너처럼 가난한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건 힘든 일이래. 그래서 선생님이 예뻐하시는 거래.”라는 말을 툭 던졌다.

 

가, 난, 한, 아이,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규정지은 적은 없었다. 그 친구는 일종의 칭찬으로 건넨 말이었겠지만, 직접적으로 듣는 것은, ‘나=가난’을 공식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깝다고 생각한 이들이 우리의 가난을 입에 올려 이야깃거리로 삼을 수도 있다. 괜찮지는 않았다. 아무도  탓할 수 없었다. 도서관에 가서 내 편을 찾았다. 내가 선택한 내 편은 이순신이었다. 도서관에 있는 이순신 책을 다 찾아 읽었다.


‘나는 이순신이고 너희는 원균이며, 너희가 틀렸고 내가 옳다.’는 말도 안 되는 편견에 갇힌 말을, 학창 시절 내내 마음에 품었다. 원대하면서 고독한 날들이었다.

 

 ‘학원도 다니지 않고, 학습지도 없다. 학교 수업만 들어서 성적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며 태연하게 굴었다. 주홍글씨,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작가 이름도 읽기 어려운,  이해도 안 되는 책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글씨를 읽었다.




당당한 척, 곧 무너질 것 같은 그 허름한 집에 오히려 더 많은 친구들을 초대했다. 피하고 싶은 상황에서 더 뻔뻔해지는 방어기제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나 보다. 그 허세가 나를 지켰는지도.

 

엄마를 기다리던 밤에, 당당하기 위해 고독했던 그 순간 모두를 책들이 지탱해 주었다. 그 수많은 말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던 ‘이순신’, 심훈의 ‘상록수’부터 강경애의 소설까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작품을 읽었다.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의 '나'가 조세희의 난쏘공을 필사한 것처럼, ‘외딴방’을 필사했다. 그때 미친 듯이 읽었던 책들은 나를 지키는 무기들이었다.


무언가 괴로운 상황이 생기면, ‘우리 선조들은 아무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도 이 나라를 지켰는데,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를 되뇌었다. 참 거국적이면서도 엉뚱한 사춘기였다.


  ‘삶은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나가는 것이다.’, 신경숙의 외딴 방에서 봤던 문구인가. 작은 일에 상처받을 때마다 내 안의 쓸쓸함이 다시 돋아날 때마다 나를 다독이며, 버티게 해 준 하나하나의 문장들.


 예전만큼 책을 읽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책수집러이다. 그리고 무엇을 시작하든, 책이 옆에 있어야 안심이 된다.  40년 만에 운전을 시작할 때에도 '초보 운전 탈출하는 법'이라는 책을 구입해 읽었다. 지인들은 책으로 운전을 배우는 사람은 처음이라며 웃었지만.


유년, 청소년 시절은 책에 빚진 삶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책을 통해 세계를 이해했고, 수많은 삶들을 만났다. 무엇보다 마음의 고통을 흘려보내는 법을 배웠다. 책과 하는 시간이  오래될 수록, 쓸쓸한 순간도, 마음이 공허한 순간도 줄었다.


가끔 그때의 나를 닮은 아이들을 만난다. 그럴 때면,  넌지시 말한다.


"샘이랑, 너를 지켜줄 무기를 만나러 가자. 그 무기는 네가 겪는 어려움을, 어쩌면... 아무것도 해결해 줄 수 없을 수도 있지만, 묘하게도  너가 조금 더  견디는 힘을 보탤 수는 있어. 나는, 네 옆에서 너를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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