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주말을 반납해가며 혼신의 힘을 다해 시험대비 수업을 준비했던 일상을 기록했었는데요,
중간고사가 다 끝난 후, 교습소를 오픈한지 9개월 정도 되는 시점에
저에게 아주 지독히도 큰 슬럼프가 찾아왔습니다.
슬럼프는 좋은 신호라고 생각해요.
더 이상 현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는, 다음 단계로 넘어 가야한다는 뜻이거든요.
어쩌면 교습소를 오픈하고 제대로 겪은 첫 시험기간이었습니다.
지난 겨울 기말고사는 교습소를 오픈한지 얼마 안되었던 시점이라 제가 오랫동안 가르쳤던 학생들이 아니어서 그 아이들의 성적에 제 영향이 크지 않았었거든요.
이번엔 제가 최소 5개월, 최대 1년 넘게 가르쳤던 아이들이 보는 시험이라 오랜 기간동안 아주 꼼꼼하고 단계적으로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시험을 잘봤습니다. 물론 못 본 몇명의 아이들도 있구요.
그런데 왜 슬럼프가 왔냐구요?
시험 결과를 딱 보고 나니까요,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느껴지더라구요.
공부는 내가 시키는게 아니라 스스로 하는거구나.
내 역할은 아이들이 '제대로' 공부하도록 태도를 바꿔주는 일이구나.
진도 나가고 모르는 문제 알려주는 것이 내 역할이 아니었구나.
시험준비하면서 제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아이랑 신경전을 벌이면서 잘못된 공부 습관을 뜯어고쳐둔 학생이 있습니다. 문제집 여러권 후루룩 풀어재끼는 것이 습관이 된 학생이었는데, 절 만나기전까지 심화교재까지 풀어놓고선 막상 시험을 보면 50점도 안나오는 학생이었습니다. 처음 이 학생을 만났을 때 좌절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숙제를 해온 것을 보는데요, 정말... 암울하더라구요.
"갈길이 멀겠구나"
이 아이는 배울 생각이 없어보였습니다.
저는 처음 아이를 만나면 파악기간을 갖기 위해 숙제를 안해와도 크게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일단 지켜보는겁니다. 제가 혼내지 않는데도 이 아이는 숙제를 배껴오는겁니다. 그것도 풀이과정까지 아주 정성껏이요.
숙제 교재에는 완벽한 풀이과정이 적혀있고 틀리는 문제도 거의 없는데, 막상 수업시간에 문제를 풀려보면 제대로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아이는 이전 학원에서 엄청 혼나면서 배웠다고 하던데 그런 영향인지 한동안 숙제를 아주 철저하게 배껴왔고,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철저하게 숨겼습니다. 차라리 숙제를 안해오면 제가 수업시간에 풀게 하면서 모르는 것을 설명해줄 수 있을텐데, 이 아이는 숙제를 완벽하게 배껴왔다보니 수업시간에 틀리면 들통이 날까봐 어려운 문제는 아예 풀려고 하지도 않더라구요.
처음 1달은 이렇게 의미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대체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하지? 자기의 진짜 실력을 나한테 보여주게 만들어야하는데.."
매일 저에겐 이 고민밖에 없었습니다.
혼내지 않을테니 숙제 다 못하면 못하는대로 가져와라.
숙제 양 줄여줄테니까 식 생략하지 말고 모든 과정 식 써와라.
이렇게 두가지를 한달 내내 외쳤습니다.
답지를 배끼는 아이들의 문제는, 단순히 숙제를 안하고 거짓말 쳤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정답지를 보면 얼마나 쉽고 빠르게 답을 알 수 있나요? 답지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생각을 잘 안합니다.
생각해야하는 그 지루한 시간들을 못견딥니다.
저는 이렇게 잘못된 습관에 길들여진 학생을 붙들고 매일 전쟁을 치뤘습니다.
기본서 1권, 난이도 쉬운 유형 문제집 1권을 골라서 이 두권을 각각 3번씩 풀게 했습니다.
처음에 풀 때에는 모르는 것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지만 두번째부터는 스스로 생각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풀때마다 똑같은 문제를 질문하는 학생이었지만 절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는 뭐든 빨리 빨리 답을 얻는 것에 길들여져서 제가 설명을 해주어도 풀이과정을 제대로 기억하지 않은채 답만 적고 넘어가는 학생이었습니다. 2번째 풀 때부터는 제가 절대 알려주지 않았고, 정해진 분량을 다 풀때까지 집에 안보냈습니다. 그러자 어느순간부터 포기하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식으로 한 학생 한 학생 잘못된 습관을 뜯어고친 한달을 보냈습니다.
잘하는 학생은 잘하는 학생에 맞게 비어있는 부분을 한단계 한단계 채워가면서 정말 촘촘히 공부시켰습니다.
이렇게 저를 잘 따라왔던 아이들은 놀라울만큼 성적이 올랐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반면,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바뀌지 않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이 부분이 정말 고쳐지지가 않는구나. 고쳐져야 성적이 오를텐데"
그래도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성적이 오르지 않을까 기대했었지만, 잘못된 공부방식이 고쳐지지 않은 아이들은 성적이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가 진짜 해야할 일은 수학을 알려주는 것보다 아이들 공부습관을 바로잡는 것이구나.
이게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체계적으로 공부를 시켜도 성적이 안오르구나.
이 사실을 깨닫자 이유 모를 거대한 회의감이 밀려오더라구요.
아마도 이 회의감의 정체는, 이런 생각들 때문에 생긴 것 같습니다.
'차라리 수학을 잘 가르치는 것이 쉬운데, 앞으로 난 이렇게 계속 지독한 전쟁을 치뤄가면서 아이들을 뜯어고쳐야하나? 그래야만 아이들 성적이 오르는거네?'
'아이들에게 진짜 필요한건 수학 선생님이 아니라 학습코칭이 아닐까?'
'수학을 가르치는 것 자체는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
아직 저는 이 슬럼프를 겪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이 슬럼프를 계기로 제 인생의 다음 챕터로 향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