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헤어지지 말자

by 은색연필

내 몸은 평생을 약속한 연인을 배신했다. 그의 이름은 커피다.


열일곱에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낡은 자판기가 덜컹, 하고 뱉어낸 달달한 액체가 입에 닿던 순간, 나는 직감했다. 앞으로 함께하겠구나.


그 후로 그는 늘 내 곁에 있었다. 친구들과 카페 창가에 앉아 반나절씩 수다를 떨 때도, 야근에 지쳐 눈을 비벼댈 때도, 커피는 내 곁을 지켰다. 이러다 검은 피가 흐르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어느 날부터 몸이 이상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불을 끄고 누웠는데도 눈이 맑았다. 2시, 3시, 쉬지 않고 제 할 일을 하는 시계만 원망하며 몸을 뒤척였다. 이러다 해가 뜨겠다는 초조함이 잠을 더 멀리 밀어냈다.


'이제, 이별인가.'


커피를 끊고 나서 한동안 힘들었다. 진통제를 먹어도 소용없는 두통이 찾아왔다. 오후엔 몸이 축 처졌고, 기분도 가라앉았다. 허브티로는 빈자리를 채울 수 없어서 디카페인으로 타협했다. 괜찮은 날도 있었고, 뭔가 부족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을 버티자 몸이 안정됐다.


어느 오후, 카페에 디카페인이 없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그와 다시 만났다.


쌉싸름한 검은 액체가 목을 다정하게 타고 넘어갔다. 달콤한 쓴맛이 나른했던 몸을 순식간에 또렷하게 살려냈다. 반가웠다.


다시 만난 그와의 밀당이 시작됐다. 예전처럼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다.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이며, 관계를 조심스레 이어간다. 하루 두 잔까지만, 오후 2시 이후론 마시지 않는다는 선을 지키면서.


드립 커피가 제일 좋다. 종이 필터 위에 갈색 가루를 조심히 얹고, 가느다란 물줄기를 원을 그리며 붓는다. '보글보글' 원두가 숨을 내쉬며 부풀어 오른다. 잘 잤어? 하는 다정한 아침 인사다.


커피 향을 맡으며 키보드 앞에 앉는다.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이다 고개를 돌려 커피를 본다. 아직 남아있다. 한 모금 마시곤 중얼거린다.


"너와 헤어질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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