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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의 우산

#수필

정화의 우산


왕나경


비가 종일 내리던 날이었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만큼 분주했다.저녁 여섯 시가 넘어 남편은 회사 일이 있어 늦는다는 전화를 해왔고, 홀로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막 끝마쳤을 무렵 동생 정화가 전화를 걸어왔다. 언니 집에 오겠다는 말과 함께였다.


한 달 전, 나는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동생은 새집 구경을 핑계 삼아, 평소와는 다른 기색으로 찾아왔다. 나는 방금 식사를 마쳤지만 동생의 밥상을 따로 차려 주었다. 동생은 “언니, 너무 맛있다” 하며 반찬을 싸달라 했지만, 정작 밥은 반 그릇도 채 먹지 못했다.


“왜 그래, 밥을 왜 이렇게 안 먹어?”

“응, 언니. 요즘 내가 많이 아팠어. 그래도 언니 새집에 오니까 좋다.”


창백하게 야윈 얼굴을 보니 어린 시절의 앳된 모습이 겹쳐졌다. 나는 , “정화야, 네가 참 예쁘다. 꼭 어릴 적 얼굴 같아.” 동생은 빙긋 웃으며 “언니 보니 살 것 같다”며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마치 어릴 적, 늘 내 그림자처럼 함께 다니던 그때처럼.


형부가 야근이 아니라면 함께 외식을 했을 텐데, 동생은 끝내 혼자 밥을 먹고는 “언니, 우산 하나 줘. 낡은 거면 돼”라며 집을 나섰다. 나는 오래된 우산 하나를 건네며 “굳이 안 가져다줘도 되는데” 하고 배웅했다.

그 우산, 낡은 살대 사이로 스며드는 빗방울처럼, 내 마음에도 구멍이 나 있었다.

그날, 나는 왜 더 좋은 우산을 내어주지 못했을까.

“다시 가져와” 웃으며 말했더라면, 동생은 조금 더 머물러주지 않았을까.


그날 밤 열 시가 넘어 남편이 퇴근했고, 새벽 한 시 무렵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처형, 어서 S 병원으로 오세요. 정화가 쓰러졌습니다.” 달려간 병원에서 들은 말은 믿을 수 없었다. 의료진은 이미 ‘사망’이라고 했다.


그때가 벌써 열두 해 전 오늘이다. 이맘때만 되면 몸이 먼저 앓는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너져 내린다.


정화는 미술을 전공한 선생님이었다. 우리 육남매 중 막내로, 가장 곱고 착하던 동생이었다. 그런데 그 착한 아이가, 그렇게 예고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동생이 아직도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무심한 언니를 그리워하며. 그래서 오늘은, 동생이 잠든 그곳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낡은 우산을 펼쳐 든다.

빗줄기 사이로 동생의 웃음소리가 흩날리고, 젖은 바람 사이로 동생의 눈빛이 스민다.

정화야, 너는 내게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빗속의 그림자다.

오늘도 나는, 우산 아래 서서 너를 기다린다.

꼭 네가 다시 올 것만 같아서―

정화야, 정화야.


2025년 9월31일

동생 정화 12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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