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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한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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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베이글 Jan 13. 2019

한옥에서 겨울나기

대책없는 감상주의자의 즐거운 한옥생활

나는 (오래된) 한옥에 살고 우리 집 화장실은 마당 건너 밖에 있다. 한옥살이는 겨울에 특히 힘들다. 화장실까지 밖에 있다보니 어느 때는 오줌보가 터질 것 같은데도 소변을 참곤 한다. 화장실 문은 얇은 알루니늄 판. 황소바람이 들어올 새라 화장실로 들어감과 동시에 서둘러 문을 잠궈야 하는데 영하 10도로 떨어지는 날이면 잠금쇠가 꽁꽁 얼어 꼼짝을 안 한다. 며칠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드나들 때마다 뜨거운 물을 바가지에 담아 잠금쇠에 쪼르르.


유리창문에도 얼음꽃이 피는데 유치원생인 둘째는 유리창에 보석이 맺혔다며 좋아한다. 빨리 나가자고 해도 계속 만지고 훑어내며 재미있어한다. '그래 이런 경험은 어디서도 못 할 거다.'


난 잘 하는 게 별로 없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불편한 것을 나름 잘 참는다. 대책없는 감상주의자이자 색다른 경험을 좋아하는 지라 화장실이 밖에 있는 집에 이사올 때도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그래 이런 것이 건축가 승효상 선생이 말하는 ‘불편한 건축’이지 않을까 싶었다. 몸은 불편하지만 감정은 풍성해지는. 추운 날에도 샤워도 꼬박꼬박 하며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그러다 어느날 추위가 풀린 날이었는데 몸 곳곳에 살얼음이 낀 것 처럼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도저히 탈의할 엄두가 안 나더라. 잠시 기다린 후 낮게 쉼호흡도 뱉어 봤는데 마찬가지였다. 결국 반반 나눠 씻었다. 먼저 하의만 벗고 아래를 씻고, 주섬주섬 바지를 챙겨 입은 후 이번에는 상의를 벗고 쪼그리고 앉아 세수를 했다. 바지가 다 젖을테니 몸통에는 물도 못 껴얹고 겨드랑이만 대충 닦았다. ‘아 이게 뭐하는 짓이냐?’ 같은 생각도 안 들었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날이 하도 추우니 거실 나무문마저 얼었다. 바깥과 온도차가 심해 유리창에 물이 맺혀 아래쪽으로 떨어지는데 그 물마저 얼어 나무문 아래쪽을 고체처럼 붙잡고 있는 것이다. 힘을 빡 줘 옆으로 밀면 드르륵 작은 얼음 깨지는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는데 저러다 유리창이 깨지는 것 아닐까 걱정이 됐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황소바람이 들어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하기도 했다.  한 번은 헤어 드라이기로 문 이곳 저곳을 말려 주었다. 한옥아, 제발 잘 버텨주라, 하는 마음 뿐이었다.  


이렇게 겨울을 나다보면 한옥과 전우애가 생기는 것 같다. 특히 겨울의 한옥은 여기저기 계속 살피고 돌봐줘야 하는 어른 같다. 아내와도 전우애가 생긴다. 아내가 가장 난감해 할 때는 세탁기 호스가 얼어 빨래를 못할 때다. 작년에도 세탁기와 연결된 수도 호스가 언 날이 있었다. 수도 꼭지와 연결되는 부분에 얼음이 얼어있는지 밸브를 조금만 돌려도 물이 화산처럼 역류했다. 사람을 불러야 하나 싶었는데 지난 번 한옥 살 때부터 수도며 보일러를 봐 주시던 주씨 아저씨가 이제 일을 안 하신단다.


아무래도 호스만 꽉 물리면 될 것 같아서 다음 날 아침 철물점에 갔다. 세상이 좋아져 요즘엔 물건이 다 간단하게 잘 나온다며 수도 꼭지 아래에 설치하는 잠금 장치를 건네 주셨다. 집에 돌아와 이렇게 저렇게, 어찌저찌하며 잠금 장치를 설치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밸브를 돌렸는데 콸콸  물이 세탁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싸, 성공! 못도 잘 못박는 나로서는 한 뼘 성장한 듯한 기분이었다. 고쳤다!!! 소리를 치며 방으로 들어가니 아내가 그러더라. "진짜? 신기하다. 자기도 실력이 늘긴 하는구나..."


매섭고 긴장해야 하는 나날이지만 사이사이 빛 같은 시간도 있다. 아침이면 고구마를 찌는 일. 20~30분간 가스불을 켜 놓으면 주방이 따뜻해지고 창문으로는 뽀얀 김이 어린다. 뭔가 노스탤지어적인, 그런 정서를 느끼는 시간이 좋다. 한 번씩 거실 문을 열고 화장실을 가다 보면 옆 빌라 위쪽으로 휘영청 떠오른 달이 보인다. 달빛이 우리집을 포근하게 비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늑한 평화로움을 느낀다. 며칠 전에는 김밥을 싸 먹었는데 한 줄을 통째로 들고 뜨끈한 아랫목으로 뛰어들어가 우적우적 씹고 있으면 행복한 기운이 몸 전체로 퍼진다.


헤르만 헤세 에세이를 읽다 보니 이런 글이 있더라. 나이 들어 추억이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살겠나. 귀 얇은 나는 이런 말을 들으면 또 금세 위안이 된다. 한옥에 살면 이런저런 추억과 이야기가 돼지저금통에 넣는 동전처럼 차곡차곡 잘도 쌓인다. 머리는 기억 못해도 몸은 기억할 것 같은 나날들. 매번 반복인데 봄아 어서 와라! 싶다가도 하루하루 지나가는 겨울이 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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