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레인베이글 Apr 28. 2019

내게 매운고추를 먹게 해 준 사람

이제는 없는 작은 형수

"먹어 봐야. 더 크게 아...상추쌈은 볼태기찜을 해야 맛있어야. 고추도 넣고, 마늘도 넣고, 오이랑 당근도 넣고."


작은 형과 작은 형수는 삼겹살을 유독 좋아했다. 나도 마찬가지. 그래서 형네 집에 갈 때면 낮이건 밤이건 메뉴는 늘 삼겹살이었다.

작은 형수가 차린 삼겹살 식탁은 언제나 풍성했다. 익은 김치 말고도 온갖 채소를 한 데 준비했다. 상추와 깻잎, 치커리를 가득 넣은 스테인레스 그릇 옆으로 당근, 양파, 오이가 빼곡하게 담긴 넓은 접시가 놓였다. 또 그 옆으로는 또 매운 넘치도록 많이 자른 고추와 마늘 그릇을 놓고. 마침내 갓 지은 밥과 지글지글 삼겹살이 놓이면 꼴깍 군침이 돌았다. 상추와 깻잎, 치커리를 올린 후 양파, 오이, 당근을 넣고 그 위에 매운 고추와 마늘까지 넣으면 상추쌈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는데 그걸 한 입 가득 넣고 우적우적 씹으면 참으로 맛있었다. 어쩔 때는 도저히 한 입에 넣지 못하고 입에 넣었던 걸 살짝 빼내야 했는데 그럴라치면 작은 형수는 "염병, 한 입에 넣어야 맛있어야!" 하며 손을 뻗어 상추쌈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매운고추를 먹는 건 고역이었다. '상추쌈엔 무조건 청양고추'가 작은 형수의 신념이었다. 심지어 크게 썬 청양고추. 나 초등학교 때 작은 형수가 시집을 와 한참 고기를 잘 먹던 중고등학교 때부터 삼겹살을 먹었는데 그때부터 형수는 청양고추를 들이밀었다. "삼겹살에 밍밍한 풋고추가 뭔 맛이냐. 알싸하게 먹어야 맛있지"하고 넣어준 청양고추는 하...어찌나 맵던지 혀가 마비되고 눈물이 쏙 빠져나왔다. 그럴 때는 또 숟가락으로 밥을 왕창 퍼 입으로 넣었다. 물도 마셔봤지만 매운 기운을 혀 전체에 퍼뜨려 오히려 더 힘들었다. 우유가 좋다, 콜라를 마셔라 여러 조언에 다 시도해 봤지만 밥을 왕창 먹는 것 밖에는 답이 없었다. 그래서 그 많은 삼겹살을 먹으면서 밥도 늘 두그릇씩 먹었던 듯 하다.  


매운고추가 정말이지 맵게 느껴졌던 건 쇠주 때문이었다. 작은 형수는 소주를 늘 쇠주라 불렀다. 우리 막둥이랑 쇠주 한 잔 해야지, 막둥아 쇠주 한 잔 먹게 넘어온다, 막둥아 와서 쇠주에 삼겹살 먹어야...상추쌈으로 볼태기찜을 한 후 형수는 언제나 짠~하고 쇠주잔을 내밀었는데 소주가 들어가는 순간 청양고추의 매운 맛은 입 안 곳곳을 바늘처럼 쑤셔댔다. 게다가 "쇠주는 원샷"이었다. 그래야 삼겹살이 더 맛있다는 이유였다. 삼겹살, 매운고추, 쇠주, 밥 가득...이 반복됐고 작은 형수의 그런 스파르식 훈련으로 나는 매운 고추 잘 먹는 사람이 되었다.

집에 돌아올때는 버스 타는 곳까지 마중나오며 늘 용돈을 찔러주었는데 그렇게 용돈을 줬다는 걸 형수는 형에게도, 우리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한 때 좋아했던 정수라를 닮은 얼굴, 쇠주를 걸친 후에는 막둥아 노래방 가자, 하고 고민할 새도 없이 노래방으로 끌고가던 화끈한 성격의 형수가 좋았다.  


형수와의 술자리는 내가 대학생이 돼서도, 제대를 해서도, 아내와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제 어른이 되었지만 작은 형수는 여전히 나를 막둥이라 불렀고 여전히 삼겹살을 좋아했고 한 상 가득 채소쌈을 준비했다. 술자리가 파하고 집에 돌아갈때면 아내한테 갖다바치느라 먹고 싶은 거 못 먹지 말고 다 사 먹으라며 용돈도 챙겨주었다.


형수와의 만남이 드문드문해지고 마침내 사라진 건 형과이 관계가 틀어지면서부터다. 형과 형수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도 몰랐던 그 날의 통화를 기억한다. 출장에서 돌아온 나는 처갓집에 가 있는 아내와 애를 보러 충남 공주로 내려가던 참이었다. 다음 날 가도 됐지만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밤 버스를 타기 위해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형수, 잘 지내고 있지? 나 출장 갔다 왔는데 와이프도 보고 싶고, 애도 보고 싶고 해서 지금 내려가려고. 사랑이 뭔지. 하하"

형수는 "그래 잘 갔다 와라. 좋을 때다"라는 말을 했던 듯 한데 잠시 대화가 끊기고 수화기 너머로 울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디. 막둥아 너는 잘 살아라"

그리고 몇 달 후 형수는 형과 이혼했고 형수의 전화번호도 바뀌었다. 형수의 안부를 물으며 전화번호라도 가르쳐 달라는 나의 부탁을 형은 들어주지 않았다.

    

형수의 가정 환경은 불안했고 불우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겼고 위로 오빠와 언니가 몇 명 있었는데 그 중 두 명인가가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그런 집안 내력을 아는 엄마는 "건강도 유전이라 느그 형수도 걱정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나 역시 형수의 오빠나 언니의 건강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까. 형수는 마치 그런 운명을 알고 이혼을 택한 사람처럼 끝내 저 세상으로 갔다. 형에게 들은 사인은 암이었다. 장례식까지 다 치르고 알려준 터라 빈소에도 가보지 못했다. 형의 복잡하고 아픈 마음도 짐작이 되는 터라 왜 안 가르쳐 주었냐고 따지지도 못했다.


 번씩 작은 형수가 생각난다. 저 세상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자식들을 끔찍하게 이뻐했는데 이혼을 하며 애들과도 이별을 하게 된 그 심정이 얼마나 아팠을지. 가장 많이 생각이 날 때는 삼겹살을 먹을 때다. 친구나 선후배와 밖에서 먹을 때는 그래도 덜 생각나는데 집에서 식두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삼겹살을 구울 때는 가슴 저 밑에서 뭉근하게 '작은 형수'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내는 매운 고추를 못 먹고, 생마늘도 먹지 않는다. 채소를 많이 차려내는 스타일도 아니다. 신혼 때는 고추며 마늘이며 채소 한 가득 차려놓고 먹으면 안 돼냐며 몇 번 투정도 부리고 직접 사다 준비도 해 봤는데 작은 형수와 먹던 그 맛은 끝내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처럼 소주를 많이 마시지도 않.


인생은 이별의 연속이다. 살다보면 자의로, 타의로 잃어버리는 것들이 끝없이 생겨난다. 정말로 좋아했던 동네 카페나 백반집 하나 없어져도 두고두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데 사람은 오죽할까. 작은 형수는 그저 구멍으로 남았다. 영원히 메꿔질 길 없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거나, 어디에서 살고 있다고만 해도 이렇게까지 먹먹하진 않을텐데 아예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다시는 통화하고 만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순간순간 새롭게 와닿는다. 왜 연락처를 알려달라 더 강하게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나를 챙겨주고 또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면서. 의리가 없었던 건 아닐까...그날 그 통화도 내내 미안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도를 아십니까?에 따라갔던 추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