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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베이글 Jun 13. 2019

인스타그램의 효용이랄까?

나를 찾아줘

인스타그램 따위, 다 자랑질이야 비웃던 때가 있었다. 실은 너저분한 일상인데 카메라 앵글에 들어가는 부분만 세팅해 찍어 그럴싸하게 보이도록 하는 '인스타그램과  리얼' 같은 피드를 볼 때면 피식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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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내가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하고 있다.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강원국 선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글쓰기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연결되는 것이라고. 자신이 쓴 글에 사람들이 반응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기며 서로 연결되는 기분을 느낄 때 흐뭇한 마음이 된다고. 40이 넘은 나는 인스타그램에서도 길게 쓴다. 짧게 사진만 툭 올리는 것이 인스타그램의 묘미이자 핵심이란 말을 후배들에게 수도 없이 들었지만 잘 안 된다. 짧은 단어 몇 개는 글도 뭣도 아닌 것 같고 이래서야 내 감흥이 뭔지 그 무늬가 어떤 것인지 알 게 뭐냐...란 말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지인들은 그런다. 옛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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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길게 글을 쓰는데 좋아요 수는 페이스북보다 많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는데 첫째 인스타그래머들의 인심이 페이스북보다 후한 것 같다. 이건 로직의 문제인데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를 누르기가 훨씬 간편하다. 하트표시를 따로 찾지 않고 사진만 두 번 톡톡 건드려도 되니 '안녕, 나 왔다 가요' 하는 기분으로 흔적을 남기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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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을 길게 한다. 나이가 들면 다들 할 말이 많아지는데 페이스북의 주사용자층은 중년이다보니 벽지만큼 긴 글도 부지기수다. 인스타그램은 그렇지 않다. 감각적인 사진과 짧은 글이 대다수다. 그런 생태계에서 내 긴 글이 신선해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인간 또 길게 썼네, 손가락 아팠겠다, 동정하는 심정으로 하트 하나 툭 날렸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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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그렇게 하트를 받고 연결되는 기분이 들어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하는 중인데 최근 느낀 효용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나를 알아간다, 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과 정말 동경하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기분이 좋을 때 인스타그램도 하게 되는데 나는 언제 기분이 좋은가를 살펴보면 나란 사람이 보이고 그래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이런 일을 해야 하는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책, 공예, 아트...정도로 수렴됐다. 손맛이 느껴지는 것, 그리고 아름다운 창작물이랄까?

그간 올린 피드를 쭉 훑어보며 살펴보니 아름다운 그림이나 공예품을 볼 때, 직접 음식을 하며 좋은 남편이나 아빠, 선배인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 그리고 오늘처럼 책을 읽고 리뷰를 쓸 때더라. 어디 가서 맛있은 걸 먹고 비싼 걸 사는 데서는 별 감흥을 못 느낀다. 일상에 지칠 때 나를 위한 처방전을 내린다면 그 내용은 미술관이나 갤러리, 공방에 더 자주 가고, 가족을 위해 더 자주 음식을 만들고, 더 자주 책 읽는 시간을 마련하라, 는 것이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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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피드를 올리다보니 좋아하는 것들의 범주도 점점 좁혀진다. 그림은 전위적인 것보다 질서있고 아름다운 것이 좋다. 음식은 파인 다이닝보다 집반찬에 마음이 간다. 자기계발서보다는 소설과 에세이를 좋아한다. 취미가 뭐냐는 질문은 40 이 넘어서도 늘 고민되는 질문인데 예전 같으면 막연히 독서라고 했을 것을 이제 에세이 와 소설 읽기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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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의 또 다른 효용은 생각의 단초를 저장하기 좋다는 점이다. 시작하기에 가장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 중 하나가 바로 글쓰기 아닐까. <언어의 온도>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이기주도 첫 문장이 안 떠올라 괴로워했다더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는 그 막연한 이야기, 커서만 깜빡이는 그 백색 화면이 어떨 때는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인스타그램은 사진을 먼저 선택하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사진으로 소재와 내용이 간추려지는 셈이라 글쓰기가 한결 편하고 수월하다. 글쓰기란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다. 마감의 부담, 분량의 부담, 미문의 부담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글쓰기. 모르긴 몰라도 인스타그램에 이런저런 일상사와 소회늘 끄적이다 본격적으로 글을 한 번 써볼까? 여기에 살만 조금 붙이면 꽤 괜찮은 글이 나오겠는데? 생각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렇게저렇게 아이들을 뛰어놀게 하는 놀이방 같달까. 나는 오늘도 인스타그램에 부담 없이 긴 글을 올리는데 개중 몇개는 살을 붙여 브런치에 옮기려고도 생각하고 또 이렇게 의도치 않게 시동이 걸리면 인스타그램을 건너 뛰고 바로 브런치에 글을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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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기록한다는 건 그 순간을 충만하게 즐긴다는 것이고 그것만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도무지 뭘 좋아하는지, 어떤 무늬로 살고 싶은지 모르겠는 때가 있는데 그것에 대한 실마리는 인스타그램의 피드에 담겨있을 수도 있다.


글을 쓰다보니 마치 인스타그램 홍보팀 직원이 쓴 글 같은 꼴이 되어버렸는데(인스타그램과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다) 좋았던 순간을 스스럼 없이, 남 의식 하지 않고 열심히 올리는 것에도 '깊은 발견'이 담길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물론 그 발견의 도구가 굳이 인스타그램일 필요는 없지만 인스타그램이 아닐 필요도 없다. 도무지 어떻게 글을 시작해야 할 지, 내 취향이 뭘 지,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을 때는 일단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고 비공개 계정으로라도 마음이 움직였던 순간을 꾸준히 올려보면 어떨까 싶다.


p.s 최근 좋아하는 수필가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았다. 자식 문제로, 어떻게 교육을 시켜야 하는 문제로 한국 교육의 획일성과 편협함을 지적한 글이었다. 갈팡질팡해 보였다. 라디오에서 인생 상담을 하고, 많은 수필을 통해 단단한 가치관을 드러낸 그였지만 각자의 세상살이는 어려운 것이구나 생각했다. 묘하게 위안도 되었다. 누구도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그러니 나만 왜 이럴까, 라는 망망한 자책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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