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량이 부족한 것 같은데요. 회원님은 상급반으로 가셔도 되겠어요"
"네? 예... 체력이 좀..."
휴, 귀신 같이 알아보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수영을 오래 했지만 자유형을 2바퀴 이상 도는 것은 힘에 부쳤다. 그런데 선생님의 말은 그게 아니었다. 제법 수영을 하는 것 같은데 다른 회원들과 진도를 맞추느라 쉬는 시간이 많으니 운동량이 부족해 보인다, 고로 상급반으로 가라, 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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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말을 듣고 좀 감상적이 됐다. 수영을 시작한 지 어언 20년이다. 리조트에 가서도 수영 한 번 못하고 돌아오는 내가 한심해 대학생 때부터 수영장을 기웃 거렸다. 그 긴 세월동안 꾸준히 수영을 한 건 물론 아니다. 1년 이상 쉰 적도 많았다. 그럼에도 아예 포기하진 않았다. 머리가 무지하게 나쁘고 운동신경도 떨어지는데 근면함 하나는 타고 난 사람처럼 이사가는 집 근처에 수영장이 있으면 등록을 했다. 첫 수업에 들어가 "수영 배워보셨어요?" 하는 질문을 받으면 "네...배우긴 했는데 자유형이 잘 안 돼서..." 어물쩡저물쩡 대답한 후 또 열심히 팔을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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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길게길게 한 수영은 기쁨과 좌절이 2:8 정도로 섞인, 대체로 별 재미없는 시간이었다. 어쩌다 모든 동작이 간결하고 스무스하게 이어져 속도가 나는 날은 쾌속정이 된 것 같았다. 속도감...이라는 게 얼마나 짜릿하고 살 맛 나는 것인지 실감했다. 그런데 다음 날 또 수영을 할라 치면 또 그런 속도가 안 나왔다. 배에 돌맹이를 채워 놓은 것 마냥 자꾸만 가라앉았다. 속도는 또 왜 이렇게 안 나는지... 미친듯이 발장구를 쳐도 마찬가지였고 옆 레인의 그닥 수영을 잘 하는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나를 앞질러 갈 때면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런 날은 몸이 더 빨리 피곤해져 1시간도 못 채우고 수영장을 빠져나오곤 했다. 그나마 평영과 접영은 괜찮게 했다. 아내는 평영 폼이 제법 좋고 날쌔 보인다며 자발스러운 내 성격과도 잘 맞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정석으로, 우아하고, 편안하게 하는 자유형은 영영 그른 것인가...모든 수업은 자유형부터 시작하는데 속도가 안 나 뒤따라오던 회원 손이 내 발가락에 닿을 때가 많았으니 자유형은 내게 참으로 스트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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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계속 수영을 한 데는 마음 속 의식의 영향이 컸던 듯 하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인생을 동경했었다. 그처럼 전 세계를 여행하며 글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좋아하는 자동차를 빌려 스코틀랜드로 위스키 여행을 떠나고, 클래식음악 콘서트를 음미하고, 그렇게 얻은 자양분으로 또 새로운 글을 쓰고...그런데 그는 수영을 잘했다. 체력 관리의 비결 중 하나가 수영이었다. 25m 레인쯤 쉬지않고 50바퀴 이상 왔다갔다하는 건 일도 아니다. 일정한 속도로, 지치거나 힘에 부치는 기색없이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수영을 하는 것은 내가 이루고 싶은 가장 멋진 모습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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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도 보고, 네이버 동영상도 봤다. 호주의 수영국가대표 이언 소프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하면 자유형을 잘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자연스러운 롤링이 중요하다고 해 한 동안은 몸통을 좌우로 돌리는 연습만 했다. 그 결과 몸통이 좌우로 너무 돌아가 뒤집힐 지경이란 지적까지 받았다. 강사 분들도 여럿 거쳤다. 그런데 구립 체육센터라 그런지 한 명 한 명 자세를 교정해 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수강생은 많고 선생님은 초급반과 중급반을 오가며 수업을 했다. 힘든 분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저 자세 좀 봐 주실래요? 묻지 못했다. 많은 날 우리는 그저 돌기만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개인 레슨을 받자! 다짐하고 등록을 하러 갔는데 대기 인원이 많아 6개월 이상 기다려야 한단다. 2개월쯤 기다렸을 때 체육센터는 리노베이션 공사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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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동네 사설체육관으로 옮겼다. 첫 수업 시간. 어디까지 배우셨어요? 의례적인 질문을 받는다. 접영까지 하긴 했다...는 의례적인 답변을 한다. 한 번 보죠! 하더니 접영을 한 번 해보랜다. 그렇게 모든 회원이 보는 앞에서 접영을 했다.
자유형도 그렇게 해 보였는데 "손을 너무 들어올린다. 몸통으로까지 넘어가면 안 된다. 허벅지까지 오면 끝. 거기서 팔꿈치를 들어올려 그대로 앞으로 뻗으면 된다"는 코칭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 설명이 유레카! 였다. 자유형만큼 쉽고 빠른 영법이 어디 있냐는 듯, 내가 언제 자유형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냐는 듯 속도가 났다. 팔이 몸통까지 올라가지 않고 허벅지에서 후딱 넘어오니 동작이 간결해지면서 힘도 들지 않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휴대폰 메모장에 이렇게 적었다. 손가락에도 마음에도 약한 전율이 이는 듯 했다.
팔은 허벅지까지만
어깨 뒤로 안 빠지게
팔은 세워서 직각으로 올려
높이 들면 힘있게 들어가고 속도도 올라가!
기억하기 쉽게 키워드와 맥락을 꼼꼼하게 살펴 가며 입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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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또 다음 날, 또 또 다음 날 이 문장을 기억하며 수영을 하는 데 예전처럼 도로아미타불이 되지 않고 제법 빠른 영법이 가능해졌다. 아 어찌나 흐뭇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격렬하게 좋진 않지만 포기하지 않은 나를 칭찬해 주고 싶긴 하네, 하는 마음이었다. 포기하지 마라, 하다 보면 하게 된다 같은 유치찬란한 문장도 떠올라 스스로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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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과 달리 수영 가는 시간이 즐거워졌고 기다려진다. 오늘은 뭘 배우게 될까. 어떤 즐거움은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마침내 찾아오는데 무궁화호 열차처럼 그렇게 천천히 당도하는 기쁨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떤 건 몇 달 해보지도 않고 빨리 포기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미련이나 후회 따워 남지 않고, 또 어떤 건 별 이유 없이 계속하게 된다. 그렇게 뜨뜻미지근한 채로 계속하게 되는 것들에게 별 애정을 주지 않게 되는데 앞으론 그러지 말아야겠다, 계속 하게 하는 것 만으로 그것은 충분히 고마운 것이란 생각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