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문동에 쓸모책방이란 곳이 있다. 몇달 전 이곳을 처음 알게 됐는데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시골에 온 것처럼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 주택가. 소박하지만 솜씨있게 고친 단독주택 한 켠에 마련한 조그만 서점. 사장님은 이곳을 좁작서점이라 부른다. 1쩜5인용 서점이라 칭하기도 한다. 2명도 아니고, 1.5명 정도면 딱 좋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곳이 대략 1.5평 정도라는 의미기도 하다. 1점이 아니고 1쩜이라 쓰시는 지는 모르겠다. 사장님을 뵌 적이 있는데 사실 1.5평도 조금 안 된다며 웃으셨다.
좁작서점은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가게 앞에는 작은 화분과 화단이 있고 작은 창문에는 동사무소와 서울의 이런저런 기관에서 하는 행사 포스터가 걸려있다. 지난 번 갔을 때 본 포스터에는 "어르신 쌍문1동에 얽힌 옛날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기록공간쌍심지'란 곳에서 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어르신들과의 만담 같은 토크쇼를 기획하고 싶던 터라 내심 반가웠다.
좁작서점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흐뭇해진다. 특히 좋아하는 건 이 문구. "잠깐 빨래 널고 올게요. 바쁘시면 감나무를 향해 '저기요!' 하고 불러 주세요" 단정한 글씨, 배려하는 마음. 이런 문장을 A4지에 써 창문에 붙이시는데 종이 테이프에는 유모차 끌고가는 엄마, 고양이와 강아지, 꼬마 그림이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스팸깡통에 파종한 토마토 모종이 텃밭으로 옮겨가 구슬처럼 매달린 날, 나스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읽고 난 감상문도 올라온다. 그 작은 1.5평 서점이 사장님께 선물하는 자유와 기쁨은 참으로 크구나 생각한다. 작은 공간을 결심하는 것이 더 어려운데 그곳에서 큰 쓸모를 발견하고 실행으로까지 옮기신 걸 생각하면 참 단단한 내면을 가지셨구나, 삶의 기준이 명확한 분이구나 싶다. 무엇보다 부러운 건 일상에서 읽고 느끼고 기록하는 시공간을 마련했다는 것. 하루하루 정신없이 사느라 이 세 가지를 마음껏 못하는 게 나는 내내 아쉽다.
그집에 다녀온 후 나중에 나이가 들면 집 한켠에 그렇듯 작은 서점을 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규모에서만 자유로워지면 생각보다 빨리 실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쓸모의발견 사장님께 물어보니 요즘엔 작은 서점도 많고 큰 출판사에서도 유통 시스템에 신경을 많이 써 인터넷에 접속해 몇 분만 시간을 쓰면 손쉽게 필요한 책을 주문, 구비할 수 있단다.
만약 그런 책방을 한다면 나는 에세이만 취급하고 싶다.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삶들, 다양한 생각들이 각각의 책으로 묶여 한 곳에 모인 공간은 웬지 정원이랑 비슷할 것 같다. 비슷비슷한 생김새지만 또 저마다 개성이 확실하고 향도 다른. 오솔길 걷듯 여유로운 마음으로, 입가에 미소도 한 번씩 지으며 읽기에는 역시 에세이만 한 것이 없고 내 공간이 그런 기쁨을 찾는 사람들로 채워지면 좋겠다. 여기까지 쓰고나니 집은 누가 준대? 에세이 팔아 월세나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 돈으로만 상상력이 귀결되는 이 가여운 현실. 돈을 생각하니 계획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드는데 한 십 년 또 열심히 살면 나도 작은 집과 그곳에 딸린1.5평 정도는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나이가 들수록 소소한 일상을 향한 바람이 커져간다. 공연을 보고 온 날은 할아버지가 돼서도 이렇게 한 달에 한두 번 좋은 공연 즐길 만큼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고 맛있는 외식을 한 날은 또 이 만큼만 노년에 풍족했으면 좋겠다 싶다. 읽고 싶던 책을 사들고 오는 날은 한달에 책 10권 정도만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삶이었으면 하고...(그런 바람이 의식주 전반에 걸쳐 많긴 하다;;)
북유럽 국가들에게서 내가 가장 시샘하는 건 지속가능한 일상이다. 그곳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잃었다고 해서, 큰 병이 걸렸다고 해서 일상이 끊기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러니 평온한 일상을 더 평온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내 경우 친구들과 기분 좋게 술자리를 하면서도, 가족 여행을 마치고 행복한 상태로 돌아오는 길에도 불쑥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일 할 수 있을까, 그 때는 뭐 먹고사나...행복의 순도를 떨어뜨리는 불순물 같은 걱정과 불안이 훅 하고 침투하는데 북유럽의 그들은 이런 순간이 우리보다는 적을 것 같다. 다함께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가 '우리의 일상' 이외에 또 뭐가 있을까. 입법하고 행정하는 분들은 왜 그걸 모르는 걸까.
같은 서울, 그런데 어느 소읍처럼 고요한 기운이 흐르는 쌍문동 작은 서점의 소식을 보며 오늘도 대리만족을 한다. 옆집 자두나무에 열린 자두 소식이 올라왔는데 마당에 자두나무가 있는 집은 또 처음 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