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평생 '여보'와 얼마나 많은 밥을 먹었을까?
어버이날을 맞아 다 같이 외식을 다녀오는 길.
장모님이 나를 향해 "여보~" 하고 말을 건넸다. 피냉면이란 간판을 보고 "여보, 피냉면이 뭘까?"하고 묻는 내용이었는데 무심결에 튀어나온 습관이었다.
나는 "자기야, 장모님이 나 보고 여보라고 하네~"하며 농을 건넸지만 장모님의 그 한 마디가 집에 와서도 내내 걸렸다. 장인어른 돌아가신지 2년이 되어가는 지금, 장모님은 맛있는 걸 먹을 때도, 좋은 곳을 갈 때도 장인어른 얘기를 한다. 갑오징어 좋아하셨는데, 여기 함께 왔으면 참 좋아라 했을텐데...밥을 함께 먹는 사이라 식구라고 한다는 데 그런 사람이 어느날 돌연 사라진다는 것. 그래서 밥상에 숟가락을 하나만 놔도 된다는 것. 그것이 남은 사람에게 어떤 변화이고 의미일까 가늠도 안 된다. 밥은 계속 먹어야 하는데...
이른 아침 홀로 느긋하게 산책하는 걸 좋아하는 내가 "장모님, 같이 산에 가요. 지금 엄청 좋을 때!"하고 장모님에게 프로포즈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잠시나마 대화상대라도 돼 드리고 싶었달까. 장모님은 그러자고 하셨고 사위와 장모는 가벼운 옷 차림으로 수성동 계곡과 인왕산을 올랐다.
집 밖을 나서면서부터 장모님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장모님은 수다스럽지는 않지만 이런저런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고 듣고 있으면 삶의 자세나 태도에 도움 되는 것들도 많다. 오늘의 장모님은 거의 숲해설사였다.
"정서방 이게 망초라는 거야. 윗부분을 따다가 묻혀 먹으면 참 맛있는데. 벌써 아줌마들이 다 따간 것 같은데. 나 아는 건 다른 사람들도 다 안 다니까~"
"어머나, 가죽나무가 여기에 있네. 요즘에는 아예 판매용으로 키우기도 하더라고. 저 끝에 연한 잎을 따서 두룹처럼 먹는 건데 비싸~두릅보다도 비싸던데?"
"아이고 저 나무들 봐라. 불쌍해. 저건 넝쿨인데 나무 잡아먹는 넝쿨이야. 숨통을 조이는. 저렇게 나무 몸통을 타고 올라가면 저 나무들은 다 죽어. 돌아다니면서 잘라주는 사람들이 있던데 아 나도 잘라주고 싶다."
"이건 찔레야. 와 정말 많네. 저것도 맛있어. 줄기 끝을 잘라서 잎을 벗긴 다음에 씹어 먹으면 고소하니 먹을만 해. 줄기가 크고 넓은 애들이 더 맛있지. 다 못 살았을 때라 참 많이 먹었다."
이야기는 장인어른 얘기로, 딸 얘기로, 아들 얘기로, 며느리 얘기로 자연스레 흘렀다. 그러고보니 본인 얘기는 별로 안 하신 듯 하네. 병으로 고생 안 하고, 자식들한테 힘든 시간 겪게 하지 않고, 깨끗하게 가는 게 소원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남의 손에 변을 맡기는 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냐. 그런 일 없이 깨끗하게 가는 게 최고인 것 같다...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진 곳을 지날 때는 작은 줄기를 꺾어 거기에 매달린 잎파리를 손가락으로 톡 쳐 떼는 놀이도 했다. 나도 많이 했던 놀이다. 국민학교 때 여자친구가 조경아라는 아이였는데 혼자서 그 줄기를 들고 손으로 잎 한장씩 떼며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 했던 기억이 난다. 안 좋아한다...로 끝이 나면 다른 줄기를 꺾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장모님이 제안한 놀이는 그것보단 터프했다. 조르르 매달린 잎파리 아랫쪽으로 조준을 잘 하고 힘껏 손을 튕겨 최대한 많은 잎사귀를 떨구는 것. 좀 해보셨는지 손가락을 튕기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렇게 잎사귀를 다 떨꾼 줄기는 동그랗게 말더니 "이걸로는, 귀걸이를 만드는 거야~" 하고 귀에 걸어 보였다. "산에만 오면 이렇게 놀게 많다니까~"
나이든다는 것에 관해, 노인들의 삶에 관해 잠시 생각하는 시간도 있었다.
"어제 라디오를 듣는데 재미있는 책 이야기가 나오데. 일본의 의사가 쓴 책인데 노인들을 어떻게 하면 잘 이해해 줄까 하는 방법을 이야기해 주는 책이야. 노인들이 "오래 살면 뭐 하냐. 나 이제 죽고 싶어" 이런 말 잘 하잖아. 그러면 자식들이 성을 내면서 "엄마 그런 얘기 좀 그만 좀 해" 하고. 그런데 그럴 때 화를 내지 말고 다 들어주래. 그래, 그렇지, 엄마도 그래? 하면서...딸이나 며느리 얘기는 무시하고 아들 얘기만 잘 듣는다고, 아주 고약한 성질이라고 그런 얘기도 많이 하는데 나이가 들면 중저음 목소리는 그마나 들리는 데 여자들 고음은 안 들린다네. 그래서 여자들이 엄마를 부를 때는 약간 목소리를 깔고 엄마~ 해야한다는 거야"
그렇구나, 내용이 재미있어 검색을 해 보니 <노년의 부모를 이해하는 16가지 방법>이란 책이다. 일본의 안과의사인 히라마쓰 루이가 썼다.
이 세상 모든 어른은...특히 노인은 각자 하나의 도서관이라고 한다. 그들의 죽음은 곧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고. 장인어른의 인생에도, 우리 아버지의 인생에도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었을 텐데 거의 듣지 못했네. 장모님이라도 오래 사셨으면, 가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여자들은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잘 하는데 바로 그것이 인생을 버티게 하는 힘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집에 돌아와 장모님이 부쳐주신 막걸리와 부침개를 먹었다. 그리고 또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저녁에 뭐 드시고 싶냐 물으니 족발!이란다. 그러고보니 족발은 소 자도 2~3분부터 시작하니 혼자 드시기가 힘들었겠네. 저녁에 나가 사온 족발을 장모님은 참 맛있게 드셨는데 나도, 아내도 장모님이 족발을 그렇게 좋아하시는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