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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베이글 Jun 13. 2019

별 것 아닌 일이 참 별 거야! 그치?

너무도 잘 알겠던 빈센트의 그 말

북촌 한옥에 사는 빈센트는 한국말이 유창했다. 어 그 빈센트? 맞다. SBS 다큐멘터리에도 나온 가회동 집사, 그 빈센트 할아버지 맞다. TV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빈센트의 말에는 사족이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 이런 것도 좋지 않을까?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하는 뉘앙스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풍차로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확신, 확신, 확신만 있는 남자!


올 초부터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쓸모인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고, 그러니 여러분 하루하루 스트레스 말고 나를 융숭하게 대접하며 즐겁게 살자고 외치는 사회에서 여전히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제목이 오히려 신선하게 와닿았다. 자기 집을 취향대로 고친 후 하루하루를 단순하고 경쾌하게 사는 빈센트도 인상적이었다.


빈센트. 올해 예순여덟. 북촌 작은 한옥을 임대해 사는데 그곳에 ‘아폴로니아’란 행성 같은 이름을 붙이고 목재에는 금색 벽지를, 가구는 핑크색으로 칠한 남자. 요리와 빵 굽기를 좋아해 웬만한 음식은 직접 만드는데 그 맛이 또 기가 막힌다. 솜씨가 좋아 의자 같은 간단한 물건은 직접 만들고 단추 디자이너이자 패션모델 출신인 한국인 아내와 산다. 미국에서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인종차별을 당하는 동료를 위해 회사에 이의 제기를 했다가 혼자만 불이익을 당하고 쫓겨난 데서 보듯 아니다 싶으면 들이받고 본다.

북촌에 있는 빈센트의 집. 구석구석 매만지고 꾸미고 신경 써 따뜻한 집이다.

의 인생과, 인생에 대한 생각이 궁금해 인터뷰를 자처하고 북촌 한옥을 찾았다. 동그란 안경테에 꽁지머리를 한 그가 외투부터 벗으라며 옷을 건네받았다. 역시 빨간 바지 차림이었다. 샴페인을 따르는 그는 익살맞은 지배인 같았다. “샴페인을 따를 때는 코르크 마게를 이렇게 누른 상태에서 세심하게 철사 매듭을 푸는 것이 중요해요. 안 그러면 위로 퐁 솟구칠 수 있거든. 이 샴페인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샀고, 어떤 맛인지 설명해주는 것도 매너지.”

 

샴페인을 마시며 둘러본 집은 컬러풀했다. 핑크빛 조명과 금빛 컬러로 마감한 목재 기둥, 마당에서는 다양한 색깔의 조명이 반짝였다. 화장실마저 눈부셨다. '자고로 똥통이 깨끗해야 한다. 그곳도 엄연한 집 아니냐'라는 마음으로 손 본 공간. 휴지통을 세면대 옆에 매립했는데 그곳에서도 핑크색 조명이 반짝였다. ‘블링블링 인테리어’의 이유는 명쾌하다. 이왕이면 화사했으면 좋겠기에!


주방은 이 집의 하이라이트다. 아예 통째로 모든 가전과 가구를 짜 맞추듯 했다. 편하고 즐겁게 요리를 하기 위해서다. 빈센트는 진열장의 폭과 너비를 일일이 체크하고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 놓을지까지 디자인한 후 주방 가전 브랜드 밀레에 맞춤 주문을 넣었다. 작은 물건들은 직접 도면을 그려 을지로 장인들에게 맡기거나 직접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싱크대 옆에 있는 양념 보관함. 을지로에 맡겨 완성한, 스테인리스로 견고하게 만든 수납함에는 30여 개의 양념통이 빼곡했다.

놀라운 건 이 집이 임대라는 거다. 구석구석 돈 들인 티가 팍팍 나는 이 집이 남의 집이라는 걸 아는 순간 잠시 질문의 방향을 잃었다. 공중파에서도 ‘빈센트가 사는 법’에 흥미를 느껴 다큐멘터리를 찍었는데 돈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고 한다. 언제 집을 비워줘야 할지도 모르는데 남의 집에 이렇게 큰돈을 들이고도 괜찮은 건지…나도 계속 캐묻고 싶었지만 이런 질문은 ‘여유가 있나 보네’ 생각하고 적당히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돈으로 삶의 배경과 이유가 수렴되는 순간 누군가의 집에 대한 생각과 로망과 삶의 가치관 같은 것들은 순식간에 의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돈이 있으니까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이지만 돈이 있다고 해서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빈센트는 내가 살 곳인데 돈 쓰는 게 뭐가 아깝냐고 반문했다. 정독도서관 쪽에 아내의 4.5평 작업실이 있는데 월세인 그곳도 실력 발휘를 해 멋있게 수선을 한 모양이었다. 단 하루를 쓰더라도 내 아내가 쓸 곳인데 뭐가 고민이냐!

 

“난 이 집에서 100년을 살 거야”라고 호언하는 빈센트는 그야말로 평생 살 것처럼 공을 들였다. 지금도 매일매일 손을 본다. 무선 네트워크 기기를 대들보 위로 올렸는데 어지럽게 선이 엉켜 있는 모습이 거슬려 가림용 금속판도 만들었다. 이렇게 공을 들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사는 집이니까. 내 하루하루의 바탕이니까. 그 말에는 일체의 주저함이나 의구심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맞는 말이다. 전세로 2년만 산다 해도 내가 살 집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인데, 대충 살며 그 세월을 포기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빈센트의 생각이다. (도 한옥에 사는데 2년간 살 요량으로 전세를 얻어들어가면서 1000만 정도를 들여 수선을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을 만큼 낡은 집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우리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느그들이 미쳤지. 미쳤어')


무얼 하더라도 허투루 하지 않고 나의 기준대로 정확히, 야무지게 하는 것은 빈센트 삶 전체를 관통하는 신념이다. 음식을 포함해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고, 디자인하는 것은 고스란히 일상의 활력으로 돌아온다. “칭기즈칸이 한창 토벌을 하며 영토를 확장할 때 가차 없이 죽인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 줄 알아요? 머리만 쓰는 자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칠까만 궁리하거든. 손쓰는 사람들은 안 죽였어요. 생각도 단순하고 쓸모가 있으니까.”


두 손을 쓰는 기쁨은 곧 인생의 기술로 치환됐다. “돈만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오래 못 가. 주변에 돈 뜯어먹으려는 사람들뿐이고 본인도 가진 게 돈밖에 없기 때문에 이 돈이 줄어들면 어떡하나, 누가 가져가면 어떡하나 걱정이 끊이지 않지. 그러니 죽을 때도 자신 있게 못 죽어요. 손쓰는 사람들은 달라. 아내 구두가 더러우면 깨끗이 닦고 손님이 온다고 하면 정성껏 요리를 하고 집 안을 늘 깨끗하게 유지하지. 그런 게 소확행인데 그런 것들이 모여서 대확행이 되고 인생에 자신감이 붙어. 별것 아닌 것들인데 별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요?”


"별 것 아닌데 참 별거야. 그치?"하는 말을 너무도 잘 알 것 같았다.


오랫동안 한옥에 살고 있는데 한옥살이가 주는 즐거움이 뭐 대단한 게 아니다. 함석판과 기와에 툭툭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것, 밤하늘을 올려다봤는데 달이 떠 있는 것, 작은 창문을 통과한 빛이 노란 장판 바닥으로 떨어져 일렁이며 조금씩 다른 무늬를 만들어내는 것. 별 것 아니라 소소한 기쁨과 놀라움을 주지만 그렇듯 잔잔한 감흥이 주는 효과는 꽤 크다. 때론 폭우보다 잔잔하게 내리는 몇 분간의 비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잠시 목을 축이고 마음이 촉촉해지는 것 같다.


최근에는 마당에 캠핑 의자 하나 갖다 놓고 10여 분간 푹 하고 허리를 젖힌 후 햇빛만 쐬었다. 식물처럼. 감은 눈꺼풀 안으로 빛의 알갱이들이 어떤 때는 가늘게, 어떤 때는 무리지어 지나갔다. 사람도 자연임을, 광합성이 필요함을 느낀 시간이었다.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 시간에 따라 다른 무늬를 만들어낸다.

또 하나의 별 것 아닌 일은 마당 청소다. 의자 두 세개 갖다 놓으면 꽉 차는 작은 마당. 야외 공간이다보니 수시로 지저분해질 수 밖에 없는데 비질을 하고 물 청소를 하며 집중을 하다보면 시간도 금방 지나고 상쾌한 기분이 든다. 물청소로 젖은 바닥에서, 깨끗해졌구나 하는 말끔함을 느끼며 책을 보거나 과일을 먹는 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내친김에 또 하나 이야기하자면 쓰레기 분류 수거. 한옥살이를 하다보면 쓰레기통을 밖에 두기 마련인데 쓰레기를 분류하는 일은 오랫동안 나의 일.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분류하고, 작은 부피의 택배 박스는 바닥에 툭 던져 놓은 후 그 위로 점프해 종이 박스를 납작하게 만든다. 내용물을 꽉꽉 채우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가 버릴 음식물을 찾고, 거실과 아이들 방을 돌며 버릴 물건을 수거한다. 그렇게 가져온 것들을 봉투에 넣고 하나씩 차례로 묶는데 그 작업 역시 후련함과 개운함을 안겨준다. 별 것 아닌데 참 별 것인 것이다.


P.S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선생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자 빈센트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 선생님 아니야. 내 이름은 빈센트야!” 책에도 밑줄을 그은 문장이 많았지만 내겐 이 말이 멋있게 와닿았다. 선생님이란 호칭을 거부하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건강하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중장년이 많아지면 대한민국 사회가 좀 더 근사해 질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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