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레인베이글 Jun 15. 2019

제철 음식 먹는 삶이 진짜 잘 사는 인생

아내가 부탁해 주문한 책이 왔다.

노석미 작가의 에세이 <먹이는 간소하게>.

먹이라는 단어가 생소해 처음에는 무슨 책인지 갈피를 못 잡았다. 동물과 관련된 책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먹이는 요리와 음식을 대신해 부르는 작가의 단어였다. 서문에는 "음식이나 요리가 아닌 먹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은 소박하다거나 간소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싶기 때문이다"라고 쓰여 있다.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고 작은 정원이 딸린 작업실에서 소소한 일상을 산다. 사방이 산이고 작은 텃밭에서는 감자와 호박, 쑥과 민들레가 계절에 따라 오고 간다.

회화를 전공한 작가의 책에는 아기자기한 그림이 한가득이다. 사람과 고양이 두 마리, 그리고 다양한 제철음식들. 이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제철음식 먹으며 소소하지만 행복하게 살아요~"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맛있어 보이는 제철 음식 그림과 간단한 조리법, 그리고 그 음식을 만나고 즐기던 순간의 글이 소담하게 담겨있다. 계절별로 작가가 즐기는 제철음식은 다 먹고 싶고 다 만들어보고 싶다.


봄에는 달래달걀밥, 냉이무침, 쑥개떡, 루콜라피자. 여름에는 마늘새우구이, 깻잎장아찌, 닭죽, 오이소박이, 부추전. 가을에는 송편, 단호박수프, 고구마줄기무침, 연근구이. 겨울에는 고구마구이, 가래떡구이, 곶감, 시래기밥...아, 글을 쓰면서도 침이 고인다. 이 음식들과 연관된 그 계절의 추억들도 피아노 건반음처럼 톡톡 마음을 두드리며 지나간다.

"달래는 이름도 예쁘지만 그 향을 맛는 순간 밥맛이 돈다. 달래 한 줌을 캐서 달래장을 만들어 달래달걀밥을 해 쓱쓱 비벼 먹는다"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부는 새봄, 갓 돋아난 시금치를 듬뿍 넣어 김밥을 만다. 겨울을 이겨낸 시금치는 잎이 두툼하고 그 맛은 초록색에서 나온 것인가 싶게 고소하다"

이런 문장을 귀여운 화풍의 그림과 함께 보고 있자니 좋기도 하고, 입맛도 돌고 "그래 이런 게 진짜 행복한 일상이지" 싶으면서 평온한 기분이 되었다.


<럭셔리>란 잡지에서 기자로 일하던 시절,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 럭셔리한 걸까요?"였다. 한 분이 그러셨다. "제철 음식 먹을 수 있는 삶 아닐까요?" 나이 지긋한 신사 분으로 먹는 것 좋아하는 친구들과 미식회(수요일에 떠나는 모임은 아니었다)를 하는데 어떤 때는 배를 빌려 타고 바다까지 나가 낚시로 잡은 제철 생선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살맛, 입맛이 돌면서 행복해진다고. 그 설명을 들으며 어찌나 입맛을 다셨던지. 맑고 깨끗한 하늘,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느끼며 갓 잡은 생선살을 발라 갑판 위에서 먹는 즐거움은 나도 몇 번 경험해 봐서 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내와 결혼을 약속하고 처갓집에 처음 인사들 드리러 갔을 때였다. 여름의 초입이었던 것 같은데 장모님은 저녁상을 물리고 수박이며 참외를 내놓으셨다. 적당한 크기로 자른 수박을 드시며 장인어른이 그러셨다. "체철음식만큼 좋은 게 없어. 결혼하고 애 낳으면 애들한테도 제철 과일 많이 먹여~" 딸을 내 주신다는 거구나, 흡족한 기분으로 먹어 그런가 과일이 더 달게 느껴졌다.


장인장모님은 충남 공주에 사셨는데 제철과일을 무척 즐기시는 분들이었다. 토마토와 복숭아, 포도를 재배하는 과수원 사장님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그 계절이 되면 그 과수원에서 과일을 한 박스씩 가져오는 것이 일상의 규칙이었다. 나도 몇 번 따라간 적이 있는데 노지에서 빨간 다라에 연결해 놓은 호스 물에 갓 딴 복숭아를 씻어 먹었던 기억이 새록하다. 초록은 눈부시고, 복숭아는 탐스럽게 익었고, 볕은 따사롭던 기억. 백도와 황도 두 박스를 트렁크에 넣고 돌아오면서 내내 기분이 좋았다. 부자가 된 것 같고,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제철음식을 먹는다는 건 그 계절의 공기를 느끼는 입체적 경험기도 하다. 10년도 더 된 어느 해 겨울. 강원도 고지에 있던 리조트취재를 간 적이 있다.  취재를 마치고 저녁 끼니를 위해 나가려는데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해 멀리 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리조트 정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포장마차가 있어 들갔는데 그곳에서 먹은 과메기를 잊을 수 없다.


눈이 소복소복 쌓였고 한번씩 화장실(그냥 바깥)을 가려고 바깥으로 나오면 저 위로 달이 보였다. 거센 바람에 천막이 날아갈듯 휘날렸지만 안에는 난로가 있었고 파카를 입고 있어 춥지는 않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먹는 과메기는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뒤짚은(그래야 향이 더 강하게 난다) 깻잎 위에 사각 김을 올리고 마늘과 청양고추를 넣은 후 기름지고 꼬들꼬들한 과메기를 올려 입안 가득 넣었다. 과메기 한 입에 꼬박꼬박 소주 한 잔. 그날 사진가와 소주를 5병 가량 먹은 듯 한데 고지라서 그런지 숙취도 없었다. 그뒤부터 매년 겨울이면 한두번씩 꼭 과메기를 먹는다. '겨울에는 과메기지!' 외치면서.

성공한 삶을 사는 많은 분들을 인터뷰했다. 그분들에게 "어떤 삶이 럭셔리한 삶일까요?"라고 물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답변이 "시간이 있는 삶"이었다. 결정하고, 신경써야 할 일이 많다보니 운동할 시간 정도야 어떻게든 빼지만 1박 2일 여행을 떠나는 것조차 녹록치 않다는 거였다. 놀라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다. "남자가 대기업 간부면 아내와 자식만 좋다"는 우스갯소리가 왜 나오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연봉은 적지만 소소한 일상은 그럭저럭 누릴 수 있는 내 삶이 제법 괜찮아 보이기도 했다(그래서 계속 소소하게만 사는 것인지도).

계절은 돌고 돈다. 제철음식은 매년 약속처럼 돌아온다. 누군가는 그 제철음식 먹는 소소한 즐거움과 행복을 찾아 지금까지의 고단한 삶을 버린다. 사는 재미가 없으면 입맛부터 떨어지고 다시 사는 건 입맛을 되돌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이들에게 제철음식은 그 계절의 기운과 공기까지 담아 상처를 위무한다. 음식은 그렇게 단순한 한 끼를 넘어 삶의 이유이자 전부가 된다. 


<먹이는 간소하게>를 뒤적이며 뭘 먹어야 하나, 여름의 메뉴를 살펴본다. 그런데 놀랍게도 할 줄 아는 게 없네...찬물에 밥 말아 된장에 풋고추라도 찍어 먹어야 겠다.







이전 03화 일의 의미? 어쩌면 사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