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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베이글 Oct 29. 2019

일의 의미? 어쩌면 사치

퇴사를 앞두고 많은 것들이 달라지고 있다. 생경함을 넘어 놀라운 자각을 할 때도 많다. 돈의 무서움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 가장 큰 변화이다. 오늘 아침에는 슈퍼에 갔다가 우유 하나만 달랑 사왔다. 며칠 째 집에 과일이 없는데 포도값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 한 송이가 3200원. 예전에는 포도 한 박스를 사고 연시도 한두팩 곁들여 샀을 것이다. 일상의 태도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아니 찌질하게 바꾸는 것은 역시 돈이다.


이른 아침, 아내의 가게에 갔다. 아내는 오늘 명동성당에서 주최하는 겨자씨마켓에 나간다. 그곳에서 쿠션도 팔고 이불도 팔고 행주도 판다. 원래 어제 잠시 가게에 나가 마켓에 가지고 갈 물건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몸이 안 좋아 가지 못했다.


아침 6시도 안 돼 가게 서대문에 있는 가게에 도착했다. 가게는 막 이사를 마쳤던 몇 달 전과 확연히 달랐다. 이솜들, 큰 가방들, 큰 비닐에 담긴 베게들로 번잡했다. 아내는 도와 달라는 말도 없이 솜을 꺼내 돌돌이로 앞뒤를 깨끗하게 민 다음 커버에 차곡차곡 넣어 달라고 했다. 재미없는 일이었다. 단순 노동이었다. 커버 지퍼를 열고 무턱대고 솜을 넣고 있으니 아내가 시범을 보인다. 솜을 반으로 탁 접은 다음 지퍼 안으로 솜을 밀어 넣고 양쪽 귀를 톡톡 채운 다음 뒤집어서 평평하게~ 내가 했던 것과 달리 모양이 예쁘고 단정하다.


그렇게 네모난 쿠션 10개, 동그란 쿠션 6개, 베개 6개의 속을 채웠다. 중간중간 작은 가위로 실밥을 잘랐고 커버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 단순노동을 하면서 아내가 하는 일을 곁눈으로 지켜봤다. 아내는 내가 속을 채운 베개를 가져가 실을 한 번 둘러 예쁘게 묶었다. 라벨 구멍에 실을 한 번 더 넣어 매듭을 지으니 그저 베개였던 물건이 선물용으로도 손색 없다. 아내는 그렇게 장사를 한다. 키친 크로스는 세탁기에 한 번 돌리고 건조기에 말려 실로 감싼 후 배송한다. 건조기에까지 돌리고나면 먼지가 없어지고 훨씬 뽀송뽀송한 질감이 되기 때문이다. 그 촉감 때문인지 키친 크로스는 늘 인기가 많다.


퇴사를 하면서 많은 이유를 다. 상사에게 후배에게 지인에게 친구에게. 그때 가장 많이 한 말이 일의 의미를 찾겠어서였다. 선택과 집중을 하고 싶다는 얘기도 했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것 하며 살고 싶다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만 온전히 시간을 쓰며 뭔가를 해보고 싶다고. 매너리즘에 빠졌는지 재미가 없다는 말도 몇 번 했다.


일의 의미라, 어딘가 있어 보이는 말이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 사회의 인정과 보람이 반반씩 섞여있는 말 같다. 중요한 가치인 것도 알겠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버는 일이라도 스스로 의미 부여를 하지 못하면 그 일은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수초처럼 부유한다.


아내의 가게에서 단순노동을 하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의 의미'를 논하는 건 어쩌면 허위이고 사치가 아닐까.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저 먹고살기 위해, 아이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일한다. 어엿할 것 없는 월급을 받으며 하루하루 삶을 영위한다. 일의 의미와 재미도 중요하지만 그건 생계 너머의 일이다. 남자들은 직업 없이도 무위도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여자들은 무슨 일이라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여자들이 저 멀리 있는 개념 따위 찾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일을 어떻게 해?', 나를 포함해 많은 남자들이 드라마에서, 현실에서 하는 그 말이 오늘은 유독 부끄럽게 느껴진다.


<나를 지키며 일하는 방법>을 비롯해 직업론, 인생훈 등으로 유명한 강상중 교수가 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일을 하면서 업그레이드하는 자아의 향상이다. <나를 지키며 일하는 방법> 역시 그저 먹고 살기 위한 밥벌이가 아닌 자기 인생을 만들어가는 방법에 관해 설파하는 책이다. 나 역시 그 책을 밑줄 그으며, 열심히 읽었다. 그 책이 많은 이들에게 등대가 됐을 것이다. 이제껏 나는 그런 책에 갇혀 살았고 일의 의미, 일의 재미,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등에 관심을 두었는데 오늘은 그저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인다.


아내가 일의 의미와 재미를 못 느끼고 그저 생업을 위해 하루하루 고생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내는 그 일이 재미있고, 그렇게 돈을 벌어 여행을 갈 수 있는 삶이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집 가훈은 '여행'이다. 다만, 그렇게 열심히 사는 아내를 보니, 아내의 삶의 현장을 두 눈으로 보니 '일의 의미'를 언급하며 퇴사를 결심한 내가 유아적인 것 같고 아내에게 미안하고 그렇다. 일의 의미와 재미를 따지기 전에 가족의 생활을 지켜내는 일이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 싶은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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