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태도를 바꾼 말들
동네 지인들끼리 간단한 저녁 모임이 있었다. 서촌으로 이사 온 은주 편집장님 집이 모임 장소였다. 막걸리와 도토리묵과 초장을 곁들인 문어 접시를 앞에 두고 우리는 '와 맛있겠다' 를 연발하며 기분좋게 모여 앉았다.
함께 음식을 나르고, 자리를 세팅한 우리는 돈 얘기부터 병든 어머니를 모시는 얘기까지 이런저런 소재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술과 맛난 음식이 있으니 이야기가 술술이었다.
퇴사를 하고 유리 작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은주 편집장님과 출판사에 다니다 그만두고 지금은 작은 갤러리를 하는 이 대표님이 농담처럼 가장 많이 한 말은 "그렇지? 그렇다니까.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게 아니라니까" 였다.
은주 편집장님이야 오래전부터 워낙 친했고 오늘은 갤러리 대표님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아트업계에 계셨던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갤러리를 하게 됐을까? 출판사에 다니던 그녀가 회사를 그만 둔 이유는 너무 힘들어서였다. 번 아웃. 거의 창립 멤버라 거의 모든 기획을 도맡았다. 기획단에 있거나 집필이 들어갔거나 이렇게 저렇게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15개 정도였다. 다음에 무얼 할 지는 기약도 못하고 회사를 그만 뒀다. 너무 힘든 채로 오랫동안 버텨온 까닭에 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쉬는 사이 조금씩 마음의 에너지가 채워졌을까? 작은 전시를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알게 됐고 그곳에서 그녀는 시어머니의 간장을 전시했다. 성북동의 한 요리사가 직접 담근 간장 판매하는 걸 봤는데 '어, 우리 시어머니니 간장도 기가 막히게 맛있는데' 하는 생각이 발화점이 됐다. 간장 전시라니, 재미있겠다 싶었던 거다. 간장 옆에는 시어머니의 말씀도 함께 적어 전시했다. 시어머니가 늘상 강조하던 신념 같은 말이었다.
-부지런히 먹어라
-명 길고 복 많으면 됐다
-내 중심 잡고 살면 그게 종교다
-형편껏 정성껏 대접해라
-서로 손 안 벌리고 사는 게 부조다
어찌나 명쾌하고 위트 넘치는 지 우리는 감탄을 하며 웃었다. 그 시어머니의 며느리는 평소에도 이 말들을 자주 되뇌이는지 카세트 테이프를 튼 듯 술술 외워 들려주웠다. 언제 그 시어머니를 만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평소에도 나이 지긋한 어른들을 좋아한다. 이 고생 저 고생,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어보고 마침내 단순하게 정리한 삶의 기술을 가진 분들. 그분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인생이 쉽고 만만해진다. 인생 까짓 거 별거 없네, 아등바등 살지 말자! 하는 배포가 생긴달까.
여튼 그 일을 계기로 갤러리 대표님은 전시하는 재미에 눈을 뜬다. 글만 갖고 놀았을 때는 느끼지 못한 공감각적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갤러리 한 번 해볼까? 하는 제안에 남편은 두 팔 벌려 환영. 며느리가 자기 어머니의 전시를 그렇게 뽀대나게 해 주고, 주변 반응도 좋다보니 으쓱 하는 마음이 들었고 아내가 더 고맙고 이뻐 보였으리라. 그녀가 하는 일을 적극 돕고 싶은 마음도 들고. 남편의 경제적 지원을 등에 업고 그렇게 그녀는 작은 갤러리의 사장이 되었다. 퇴사를 할 때만 해도 아득하고 막막했지만 퇴사는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그건 은주 편집장님도 마찬가지였다. 잡지사 기자로, 출판팀 편집장으로 애면글면 노력하고 살았고 회사를 그만두는 순간 이제 어떻게 사나? 막막했다. 50이 넘은 나이에 퇴사를 했으니 주변에서도 부담스러워 쉽게 연락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선배는 "50되기 전에 나와라~ 그 나이가 마지노선이다" 하고 선언하듯 말했다. 퇴사 후 1년 넘게 좌절스럽고 의기소침해 지는 시기를 보냈지만 그 '나쁜' 어둠의 세월에도 조금씩 볕이 들어왔고 그녀는 몇몇 기회와 인연을 붙잡아 최근 유리 작가로 데뷔했다.
인생 선배들은 그런 과정을 겪고 나서 누가 승진을 했네, 돈을 만히 벌었네, 잘 나가네 하는 말을 들어도 크게 요동치지 않는 듯 했다. 다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고 그 승진이, 그 소득이, 그 출세가 다른 불안과 불운을 안겨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저 좋은 사람들과 이렇게 맛있는 것을 먹고, 마음 편히 고민과 사는 이야기를 나누면 족할 뿐.
며칠 전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다시 봤다. 막강 패션 매거진에 들어와 좋은 옷을 입고 화려한 생활에 점점 빠져들면서 남자친구와의 관계는 점점 틀어지고 하루하루 어떻게 보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일상이 이어진다. 촬영 현장에서 이런 고민을 털어놓자 입사 때부터 그의 편이었던 상사가 이렇게 말한다.
"한쪽이 잘 되면 한쪽은 탈이 나지. 승진할 때 쯤이면 인생이 다 뒤집어질 거야."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가까운 것. 일희일비하지 말지어니, 인생지사 세옹지마 라는 격언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이리라.
내게도 좋은 것과 좋은 것이 아니었고 나쁜 것이 나쁜 것이 아니었던 일이 무수히 많다. 손님들로 꽉 찬 비행기에서 가운데 좌석에 낑겨 앉았던 때가 있었다. 복도쪽 좌석 하나가 비었길래 이륙 후 안전 벨트 사인이 꺼지자마자 약삭 빠르게 자리를 옮겼는데 모니터가 고장이었다. 다시 돌아가자니 그새 옆사람이 내 자리에 책이며 노트북을 올려 놔 치워달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긴긴 비행 시간을 영화 한 편 못보고 괴롭게 보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내게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밀물과 썰물처럼 교대로 찾아올 것이다. 어떤 날은 밀물의 주기가, 또 어떤 날은 썰물의 주기가 길겠지. 어떤 때는 행복에 겨워 웃음이 절로 나고 또 어떤 때는 끝간데 없이 우울하겠지만 좋은 게 꼭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게 꼭 나쁜 게 아니니 좋은 일이 생겼다고 너무 오바하지 말고, 나쁜 일이 생겼다고 너무 침울해지지 말아야지 싶다.
그것이 반백년 산 인생 선배들이 오늘 가르쳐 준 인생의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