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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베이글 Oct 25. 2019

"진정한 멋은 늘 '안'쪽에 있다"

잡지사와 디지털 미디어에서 15년 넘게 문화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그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간혹 “그간 만났던 사람 중 최고의 인물을 한 명만 꼽는다면 누구예요?”하는 질문을 받는다. 내

대답은 10년 넘게 똑같다. “이어령 선생님!”

한국 초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했고 편저와 공저를 빼고도 50권 넘는 책을 냈고 문학 평론가, 에세

이스트로 유명한 그는 미적 감각이 뛰어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일곱 살짜리 꼬마가 그 넓은 운동장에서 굴렁 하나 덜렁 굴리며 큰 원을 그리는 모습은 동양적 여백

의 미가 탁월한 명장면으로 회자되는데 이 아이디어를 낸 이가 이어령 선생이다.


종종 인터뷰에서 그가 남긴 말이 떠오르는데 최근 몸이 안 좋아 대외활동도 거의 못하고 있다는

풍문을 들으면 마음이 아프다. 연락 한 통 드리고 찾아 뵙고 싶은데 내가 뭐라고 선생 입장에서

는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 될까 주저스럽고. 얼마 전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에는 ‘이어령 마지

막 인터뷰’라는 부제가 붙었다.


선생과 인터뷰를 한 것은 잡지 <럭셔리>에 있을 때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 멋지고 럭셔리하

게 사는 걸까요?” 하는 것이 인터뷰의 주제였다. 평창동 자택에서 만난 그는 막힘이 없었다. 그

수많은 사람, 역사, 일화, 지식, 통계가 틀어 놓은 수도꼭지의 물처럼 술술 흘러나왔다. 생각도 럭

셔리해야 하지만 패션에도 럭셔리가 있어요. 이런 이야기도 필요할 거예요. 그럼 이 이야기도 좀

해 볼까요? 하며 인터뷰를 리드하기도 했다. 워낙 대단한 분이라 괜히 ‘쫄아서’ 몇날 며칠 자료

조사를 하고 어렵게 질문지를 만들었는데 달변인데다 알아서 주제 보충까지 해 주신 덕에 출력한 질문지를 볼 필요가 없었다.


몇몇 말씀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


“럭셔리한 집이라면 자고로 모든 물건에 손때가 묻어 있어야 해요. 이를 테면 20~30년을 쓴 지하

공간도 있고, 대대손손 내려오는 가구도 있어야 해요. 가구가 오래돼 삐걱거릴지라도 굉장히 고가

高價한 추억이 담겨 있으면 이것이 럭셔리가 되는 거예요. 요즘에는 새로 지은 최고급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은데 포르말린 냄새가 나는 집은 럭셔리한 집이 아니예요.”

 

“어렸을 때를 한 번 생각해보자고요. 어쩌다 좋은 손목 시계를 차면 “지금 몇 시지?”하며 팔을 높이 치켜 들어 시계를 보곤 했을 겁니다. 이 같은 의식적 행동은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여서 비

싼 반지를 끼면 “아, 머리야” 하며 손을 머리에 갖다대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악어백을 들고 머

리부터 발끝까지 요란하게 치장하지요. 하지만 이런 행동은 천하게 보일 뿐이지요. 럭셔리는 항상

‘안’에 있는 법입니다. 선진국의 부자들은 비단 같은 겉감으로 사치를 부리지 않아요. 대신 최고급

안감을 댑니다. 옷을 벗을 때, 옷이 바람이 펄럭일 때 살짤살짝 그 안감이 비칩니다. 외피는 최고

급인데 안감으로 무명 같은 싸구려 원단을 썼다면 이는 결코 럭셔리한 패션이 아닙니다. 패션 고

수일수록 “네가 이걸 알아?” 하고, 혼자 ‘속’으로 즐기는 법이지요”

이 인터뷰가 나가고 주변에서 전화를 많이 받았다. 선생에게는 그렇게 세간의 눈과 귀, 입을 단박

에 끌어당기는 힘과 매력이 있었다. 워낙 ‘큰’ 분이라 잡지 발행 전 혹 틀린 부분이 없는지 확인

을 해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10분도 안 돼, 비서를 통해 연락이 왔다. “정리 참 잘 하셨답니다. 고

칠 것 없다세요.” 아, 이 말을 듣고 어찌나 기뻤던지. 그가 정말 기사를 다 읽었는지 지금껏 궁금하다.

인터뷰를 할 때는 세게, 거침없이 이야기를 다 해놓고 막상 기사가 나갈 때 쯤이면 “이 부

분은 좀 빼 주시면 안 될까요?” “이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좀 순화를 시키면 좋을텐데” 하

고 연락을 해 오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이어령 선생의 인기가 더 뛰어오른. ‘시시한 사람들 같으니, 애초에 말을 말던지, 이어령 선생님 같은 분이 정말 없구나~’


선생의 말씀이 가장 많이 떠오르는 곳은 고속도로에서다. 선생을 인터뷰 하고 나서부터 나는 가급적 1차선을 타지 않는다. 물론 운전을 잘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목적지까지 빨리만 가느라 주변 풍광 한 번 볼 여유 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러 맨 끝차선을 타고 달

리며 하늘도 보고, 들판도 본다. 선생이 그랬다.


“제아무리 부자라도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삶은 럭셔리하지 않습니다. 롤스로이스, 벤츠 같은 최고급 차를 탄다고 한들 빨리 이동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럭셔리는 사라져요. 빈티지 자동차라도 여유 있게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이 훨씬 고급스러운 것입니다. 거대 기업의 CEO 역시 마찬가지예요. 이동 중에도 쉴 새 없이 시계를 보고, 리포트를 체크하고, 전화를 하는 것은 럭셔리와 거리가 멀어요. 아침 공기를 깊이 마시는 여유, 해가 뜨고 달이 기우는 것을 보는 마음의 여유는 럭셔리의 또 다른 조건이지요. 우리나라는 리빙Living과 라이프Life의 개념 구분이 모호한데 이는 럭셔리한 삶을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리빙은 그야말로 먹고 자는 ‘수단의 삶’이고, 라이프는 춤을 추고, 산책을 하는 것처럼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삶이지요. 럭셔리한 삶은 물론 라이프 쪽에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럭셔리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됐지만 이어령 선생이 들려준 이야기는 더 근사하게 사

는 법이 아닐까 싶다.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삶의 방식이 아닌 멋스럽고 여유로운 삶.


선생의 쾌유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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