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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큰 송아지 Aug 09. 2021

지금, 길은 영글어가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사연을하나씩 주고싶은 오늘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평택은 아직 시골길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내가 2년 전 처음 왔을 땐 완전 시골길의 아늑함을 가지고 군데군데 길들이 끌어안은 공터에 이름 모를 꽃과 풀들이 자라고 있었지만 삼성반도체 공장 건물이 들어서자 저런 예쁜 공간들은 주차장과 원룸 건물로 메워지고 있어 아쉽다.


처음 왔을 땐 대전에서는 차를 타고 나가 이름 모를 산에 가서 채취해야 했던 나물들이 길가에 있는 것을 보고는 '아.. 여기는 나만 부지런하면 굶지는 않겠네'라는 생각을 하게도 했었다.

봄에 냉이와 달래, 유채, 참나리, 원추리는 그냥 잔디처럼 흥청망청했고, 초여름 머위와 고사리, 부추, 미나리, 가시오갈피, 꽃마리, 망초 나물도 눈에 띄는 곳마다 자랐고, 한여름 고추, 호박, 상추, 오이, 옥수수, 비름나물도 흔했고, 가을 되면 감, 사과, 대추, 호도까지 풍성했다. 


꽃이 환하게 동네를 밝힐 땐 벚꽃과 조팝나무 꽃이 온 동네를 환하게 하고, 금계국과 기생초가 온 동네를 노랗게 물들이고, 온갖 풀들의 새싹이 온 동네 길에 초록색 융단을 깔았고, 아카시아 꽃이 필 땐 동네에 향이 배어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날아오던 비릿한 밤꽃 향도 있었다. 물론 길가에 피는 봉숭아, 맨드라미들이 빛나는 햇빛 아래서 제 색감을 뽐낸다.

어렸을 때 보고 한동안 못 봤던 식물들을 여기 와서 다시 보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가을이면 묶어서 마당을 쓸던 빗자루를 만들던 싸리나무(요즘은 댑싸리 나무 축제라고 해서 이 싸리나무를 구경하러 파주까지 가기도 한다), 방학 때 만들기 숙제로 아빠가 만들어주셨던 조롱박, 노랗게 익으면 벌어져서 빨간색 열매를 보여주는 여주(우리 동네는 유자라고 불렀다), 소나 먹는 거라고 구경만 시켜줬던 노각, 염주 같은 열매가 달리던 염주 풀(염소똥 풀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보리수나무, 색색 빛깔 고운 봉숭아, 새끼손톱만 한 빨간색 통통한 열매를 가지마다 달고 있는 앵두나무, 우리 대문 안에 울타리 대신으로 심어놓았던 접시꽃(흰색 접시꽃 뿌리가 부인병에 효능이 좋다고 해서 해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꽃만 피면 우리 집으로 캐러 왔었는데 흰색이 없어지자 다른 색깔의 뿌리까지 캐가는 바람에 우리 집 접시꽃은 없어져버리고 말았다), 노란색 작은 해바라기 같은 꽃을 피우는 돼지감자, 천사의 나팔이라는 꽃나무(노란색 꽃이 아래쪽으로 핀다)랑 반대되는 지옥의 나팔(하얀색 꽃이 하늘로 향해 핀다)이라는 꽃나무 등이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천사의 나팔은 하늘에서 땅으로 나팔을 부는 것 같다고 이름을 지었는데 향도 달콤하다. 지옥의 나팔은 땅에서 하늘로 나팔을 부는 것 같다고 이름을 지었다는데 레몬맛의 향이 여름밤을 상큼하게 해 주고도 남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키도 작고 하늘을 향해 피는 꽃을 지닌 지옥의 나팔이 훨씬 예쁘다. 천사의 나팔은 너무 흔하고 키도 크고 향도 너무 댤콤하다 못해 끈적거리고 땅으로 고개를 숙여 꽃의 예쁨이 잘 보이지 않아 별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씨앗 때문에 이름이 갈린 것 같다. 천사의 나팔은 매끈한 씨앗을 가졌지만 지옥의 나팔은 마치 무기의 한 종류인 철퇴같이 생겼기 때문인듯하다.

길도 잘 정비되지 않은 신작로 같은 맛을 가지고 있다. 이 길가에 바로 밭이 접해있어서 밭과 길의 경계를 표현하기 위해 맨드라미, 봉숭아, 싸리나무 등을 심었다. 이게 얼마나 정겨운지 미소가 절로 난다.

집집마다 울안에 감나무, 매실나무, 사과나무, 대추나무, 호두나무를 한 그루씩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 읽었던 소설에 감나무집, 대추나무집, 호두나무집이라 불렀던 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조롱박, 오이, 호박, 유자들을 보면 싱그러움이 가득하다. 시멘트 벽을 초록색 덩굴손이 뻗어나가는 모습은 생명력이 가득하다. 게다가 열매라도 달려있으면 손이 저절로 뻗어진다.

다른 집 대문에 올려진 능소화도 제 색감을 다하고 있다. 그 밑에서 서면 그 집 이야기를 소곤소곤 들려줄 것도 같다. 

아기 고양이 2마리도 제 집 앞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다. 얘네는 한가로이 앉아 그루밍을 하다가 내가 던져준 간식에 엉덩이를 가뿐하게 떼어내는 귀여운 아이들이다. 


이제 여기 평택 우리 동네도 더 이상 개발되지 않고 이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나도 이제 여기에 뿌리를 내리려고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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