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짐이

다시는 그렇게 무너지고 싶지 않아

by 윤슬하


끊임없이 매일 글을 쓰던 날의 나는, 글을 쓰고 올리고 그렇게라도 삶을 붙잡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 더 이상 글도 쓰고 싶은 것도 없어졌다. 어떤 날은 괜찮았다. 어떤 날은 아팠다. 더 이상 파고들 나 자신도 없었다. 그냥 내가 사람이어서 그렇구나 그렇게 인정하고 나니 새삼 뭘 그리 열심히 의미까지 파고들었는가 싶었다.


그런데 유달리 두통은 가시질 않았다. 감정도 느껴지고 우울하지도 않은데. 아마 나는 생각하는 걸 멈추지 못했던 것 같다. 멍하게 누워있거나 티비만 본다는 게 내 적성에 그리 맞지 않아서.


그러다 알았다. 내가 그리도 집요하게 파고든 건 단 하나, 두 번 다시는 그렇게 또다시 무너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다짐이었다.


다짐이는 작은 불씨 모양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불빛처럼 생겼다. 두 손 위에 올라오는 작은 크기. 눈은 작지만 진지해서 한 번 보면, 아 의지가 있구나라는 게 느껴진다. 표정은 단단하지만 따뜻하고.

웃는다기 보단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결심한 표정이다. 불씨 위엔 핑크감쟈의 상징인 리본을 닮은 아주 작은 깜빡이는 불꽃이 달려 있다.

다짐이는 늘 말한다.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라고


다짐이는 불타오르는 결심이 아니다. 아주 작은 불꽃으로 겁나고, 불확실하고, 자신은 없지만... 단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감정이 있다.


"나는 다시는 이렇게 무너지고 싶지 않아."


이 한 문장으로 태어난 존재가 다짐이다.

짐이는 '겁과 지켜내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가진 감정이다.

1.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아.

2. 근데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무서워.


이 두 감정이 서로 이어져 있을 때, 그 중간에서 태어난 감정이 바로 다짐이다.

다짐이는 말한다.

"지금 당장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돼. 하지만,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라고


다짐이는 멈춰 있는 상태에서도 작동하는 감정이다. 결심이란 보통 행동을 요구하는데 다짐이는 아니다. 그냥 누워있어도 드라마를 봐도, 쉬고 있어도, 아무것도 안 해도 조용히 속에서 작동하는 감정이다. 왜냐면 다짐이의 기능은 전진이 아니라, 재파괴 방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나를 버리면서까지 사랑하거나 나를 포기하면서까지 버티고 싶지 않아." 이게 다짐이의 역할이다.

다짐이는 절대 빛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진짜다. 별 감정이 없고, 그냥 힘들었고, 이제 지치고, 그냥 편하게 살고 싶고. 거창한 꿈도 큰 슬픔도 없다.

이게 다짐이가 보여주는 현실성이다. 거창한 열정이 없다는 건, 거창한 슬픔도 사라졌다는 뜻이니깐.

다짐이는 아주 현실적이다. 감정적 과몰입, 환상, 집착, 불안을 놓고 다시 예전 패턴에 나를 던지지 않는다. 누구 마음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내가 스스로 안전한 환경을 찾도록 안내한다.


이상 나를 소모하며 타인의 감정을 채워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경계는 나의 에너지를 내게로 돌려준다. 타인을 향한 거절도, 적당한 거리도 다짐이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런 경계와 침묵들을 행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않는다는 것과, 나를 향한 타인의 말들도 지금의 나를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있기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타인의 힘듦을 들어주는 것도, 감정을 채워주는 것도, 아픔을 보듬어 주는 것도 모두 나에게 제일 먼저 주었어야 할 가장 당연한 것들임을 다짐이를 만나고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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