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병

by 장원석

흔하다고 생각하면 흔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든 병을 나는 가지고 있다. 이 병은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데다 그 주위에 발현되는 색마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이게 병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에게는 검은색으로 보이는 병이 누군가에게는 또 황금색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녀석을 마음 속 깊게 품고 살았다.

이 병을 가진 사실에 대해 망각하고 싶어 노력해 본 적도 있었다. 사람을 이용해 보기도 했다. 내가 가진 이 검은병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꾸 내가 가지고 있는 병이 더 드러나게 되어 버렸다. 망각하고 싶은 기억을 잊어버리려 할수록 되려 그것이 내 안에서 더 확실하게 내게 존재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사람 말고 다른 것을 찾아보았다. 여행을 다녔다. 배낭을 메고 인도의 사막을 건넜고, 태국 코끼리의 등에 올라 타보기도 했으며, 중국과 홍콩 거리를 쏘아 다니기도 해보았다. 새로운 문화에서 오는 나와는 다른 삶들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내게 이 병이 있다는 사실을 사라지게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비행기 티켓에 돌아오는 입국 날짜를 바라보노라면, 다시금 가슴과 심장이 두근거리며 쿵쾅거리며 뛰고는 했다. 검은병이 또 도져버린 것이다.

돌아온 곳에서 그 병은 날 기다렸다. 내가 병에게 말했다. 넌 언제쯤 사라질 수 있겠니. 너만 없어도 내 삶이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아. 병이 내게 말했다. 네가 날 불러 낸 거잖아. 혼자 있을 때마다 넌 날 불러냈잖아. 내가 다시 병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인 순간에 왜 나타나는 건데 제발 사라져달라고. 왜 또 다시 나타나는데. 병이 다시 내게 말한다. 네가 혼자인 순간마다 왜 날 부르는 건데. 날 제발 부르지 말라고. 왜 또 다시 부르는건데.

병이 도진 내가 침대에 누워 꿈과 현실 사이에 반쯤 걸쳐져 있다. 눈을 감고 있지만 잠든 것은 아니다. 검은 강의 표면에 내가 누워있다. 아슬아슬하게 떠 있다. 이내 나는 어딘가에 떠있다는 것, 떠있는 그 곳이 강의 표면이라는 것을 자각한다. 그때 검은 강 밑으로, 그 아래로 누군가 나를 떨어뜨리려 한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고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세상이 흔들린다. 이대로 떨어져 버릴 것 같은 추락감이 나를 잡아 내린다. 눈을 뜨고 싶지만 떠지지 않는다. 추락하는 곳으로 몸을 돌린다. 온 힘을 다해, 가위에 눌린 경직된 몸을 깨우는 것과 같이 엄지손톱으로 사력을 다해 몸을 뒤집는다. 추락이 멈춘다. 나는 다시 강의 표면.

강의 표면 위 파란 하늘을 바라본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유영한다. 몸이 정확히 반쯤 검은 강과 파란 하늘에 걸쳐져 있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유영하고 있는 내가 말한다. 너구나. 반대편에 검은 강에 표류하고 있는 내가 말한다. 넌 나구나.

20년이 넘도록 나는 이 검은병을 품고 살아갔다. 추락하려는 날이 많아 질수록 몸을 돌리고 돌렸다. 그러다 어느 날은 내 몸조차 돌릴 힘이 없어 포기해 버리는 날이 있었다. 검은강 밑으로 떨어져 익사할 것 같았던 내 몸에 힘을 풀어버렸다. 죽는 걸까. 그러자 검은 강 표면 위로 잔잔히 몸이 떠올랐다. 잔잔히 떠오른 채 검은병이 말했다. 그래도 살아. 살아야지. 온몸에 힘이 풀린 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데. 검은병이 말한다. 세상이 검은색만은 아니라는 걸 너도 알잖아.

시간이 흐른다. 강위에 표류하는 검은병은 축축하고 눅눅했다. 그것은 꽤 불쾌했으며 오랜시간 무거웠다. 시간이 다시 흐른다. 표류하는 검은강 위로 아주 희미한 점이 생겨났다. 보이지 않는 하늘을 뚫고 생겨난 점이 점점 커졌다. 검은강이 사라지고, 파란하늘이 떠올랐다. 검은병이 말했다. 저것 봐. 세상이 검은색만은 아니잖아.

나는 어느 날은 검은강에 표류했다가, 어느 날은 파란하늘을 보며 유영한다. 어쩌면 검은병이 날 추락하지 못하게 떠있게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가진 검은병을 다시 품어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장이 뛰었다. 검은병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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