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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Jan 05. 2022

보행자 중심의 걷기 좋은 도시(3)

<하나씩 맞추어진 런던의 퍼즐-킹스 크로스>

세계적으로 21세기에 추진된 도시재생사업과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된 사례를 하나만 꼽는다면 

아마도 ‘킹스 크로스’ 일 것이다. 


 킹스 크로스 재생사업은 시민참여, 민관협력, 공공공간 조성, 

보행 환경 개선, 역세권 활성화, 산업 유산 재활용, 복합개발, 주거지 활성화 등 

오늘날 도시재생이 추구하는 화두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킹스 크로스 역은 1850년에 런던 북부지역을 효과적으로 연계하기 위한 

증기기관차 정류장으로 건립되었다. 

이어서 1868년에는 바로 옆에 중부지역을 연결하는

 ‘세인트 판크라스 역’을 추기로 건립하여 명실공히 영국을 대표하는 역세권으로 발돋움했다.

킹스 크로스 역

한편, 킹스 크로스 역은 1863년에 개통된 세계 최초의 지하철을 포함해 

여섯 개의 지하철 노선이 통과함으로써 

현재도 런던 시내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교통 허브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킹스 크로스 역은 20세기 초반까지 기차역과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교통 허브의 위상을 유지하면서도 경제적 상황은 좋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킹스 크로스 일대는 

산업 지역으로서의 경쟁력을 상실한 채 빠르게 쇠퇴했다. 
 공장, 창고, 물류시설을 중심으로 조성된 8만여 평의 부지는 순식간에 활력을 잃었고, 

설상가상으로 매춘과 마약 그리고 각종 범죄까지 증가했다. 


킹스 크로스 지역은 산업이 활발할 당시에도 공공공간과 주거환경이 열악했으나, 

쇠퇴한 이후에는 그야말로 처참할 지경이었다. 

부지 곳곳에 부서졌거나 문을 닫은 채로 버려진 산업시설은 런던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채 방치된 시설이 유발하는 환경 오염도 심각했다. 


어느덧 킹스 크로스는 런던의 대표적인 빈민가로 전략했다.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1987년에 영국 의회는 영국과 프랑스 해협을 철도로 연결하는 ‘해저 터널 법’을 수립해 

영국과 유럽 대륙을 직접 연결하는 원대한 계획을 수립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긴밀한 공조로 유럽의회의 승인과 세부절차가 신속하게 마무리됨에 따라 

다음 과제는 영국 철도역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1994년 세인트 판크라스 역이 결정되었다. 
 킹스 크로스 역과 세인트 판크라스 역을 연계한 대규모 역세권이 

런던 전체에 몰고 올 사회경제적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킹스 크로스 역이 영국의 북쪽 지역과 런던 시내를 연계하고, 

세인트 판크라스 역이 유럽 대륙을 연계하는 역할 분담이 이루어짐으로써 

전 세계 어디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없는 독특한 역세권이 탄생했다.  

 


일련의 준비 과정을 마친 후 2001년 킹스 크로스 재생사업을 추진할 시행사를 공모했고, 

제안서를 제출한 총 24개 개발회사 중에서 세 개 회사가 최종 후보로 선정되었고, 

단 한 장의 설명서만을 제출한 ‘아전트’ 사가 선정되었다. 


 아전트 사는 화려한 미사여구를 생략하고 

킹스 크로스 재생사업이 성공하기 위한 핵심을 ‘과정’으로 집약했다. 


 아전트 역시 매력적이고 세밀한 제안서를 제출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비현실적이고, 

위험성이 크다는 전제하에 어떤 과정을 통해 사업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명확히 설명했다. 
 

특히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지역 정치인 및 주민들과 소통하고, 

합의안을 도출하기 위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 


기록에 따르면 아전트는 약 5년 동안 관할 구청, 지역 정치인, 사업 주체 

그리고 주민과 350여 차례의 공식적인 미팅을 가졌고, 

약 4,000회에 걸쳐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자문 회의를 진행했다. 

 

2006년에 최종 합의에 이른 마스터플랜은 원칙적으로 

각종 비즈니스, 상업, 문화예술, 교육시설을 통한 경제 활성화 및 일자리 창출을 핵심으로, 

공간적으로는 최고 수준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마스터플랜의 특징은 전체 부지의 40%를 다양한 공공공간으로 조성하고,

 철저하게 보행자 중심으로 부지를 계획하며, 

새롭게 공급되는 주택 중에서 35%가량은 저렴한 임대주택을 포함할 뿐 아니라, 

지역 주민을 위한 문화 및 여가시설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숫자로는 10개의 공원과 광장, 

20개의 거리, 3만여 평의 공공공간, 50여 개의 신축 건물, 

2,000여 채의 주택 등이다.


막대한 예산과 수많은 이해 당사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초기부터 일관되게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아전트의 비전이 적절히 반영된 것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먼저 2007년에 문을 연 세인트 판크라스 역의 백미는 

빅토리안 양식의 고전 건물을 최대한 활용해 조성한 내부 공간이다. 


 유로스타가 진입하는 플랫폼은 새롭게 보강된 아치형 지붕과 천장으로 밝고 아늑하다. 

실제 낮에는 인공조명이 거의 필요 없을 정도다. 


세인트 판크라스 역 내부


 또한 지상층의 유휴 공간을 활용해 조성한 쇼핑몰은 

방문객이 세인트 판크라스 역의 매력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 

연속된 아치형으로 이루어진 벽돌 구조를 상가의 모듈로 활용했고, 

전면에는 유리를 설치해 고풍스러운 쇼핑몰의 느낌을 한껏 살렸다.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고, 영국과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최첨단 초고속 열차가 진입하는 역사이지만, 

19세기 건물과 공간을 고스란히 활용했다는 점에서 전축 재생의 정수라 평가할 만하다. 


다음은 2012년 개장한 킹스 크로스 역으로 중앙 홀의 지붕은 

나무줄기를 연상시키는 유연한 곡선의 캐노피로 지지되어 

넓은 무주 공간을 창조함으로써 내부에 진입한 이용객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킹스 크로스 역 중앙 홀


 새롭게 디자인된 중앙 홀은 열차 시간을 확인하고, 

기다리는 대합실이자 휴식 공간이다. 

절제된 흰색 구조물은 내부 공간에서 빅토리안 시대의 황토색 벽돌과 대비되어 화려한 공간감을 연출한다. 

 특히 부드러운 곡선과 구조물의 실루엣을 두드러지게 하는 

중앙 홀의 조명은 혁신적인 디자인의 백미다. 
 이 뿐만이 아니라 부드러운 곡선으로 설치된 중층에 레스토랑과 카페를 마련해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들을 위한 안락한 휴식공간이자 

킹스 크로스 역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전망대와 같은 역할을 제공한다. 

 

엄청난 규모의 유동 인구가 오가는 만큼, 

킹스 크로스 도시재생사업 부지가 킹스 크로스 역과 세인트 판크라스 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역세권으로 발전하리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따라서 다음 단계에서 풀어야 하는 과제는 두 개의 역에서 

도보로 7분여 가량 떨어진 북쪽 배후 지역과의 공간적 연계다. 


 이 지역은 리젠트 운하를 중심으로 조성된 전형적인 산업 및 물류 지역이었으므로 

이미 극도로 낙후된 상태였다.

쉽지 않은 상황에서 극적인 전환점이 생겼다. 

2002년에 런던 예술대학에 소속된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가 

그래너리 빌딩과 창고로 이전하는 계획에 전격적으로 합의한 것이다. 


 그전까지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는 런던 시내에 협소한 공간을 사용 중이었으므로 

화물 터미널 부지의 1만 2000여 평 공간은 5000여 명의 학생과 교직원을 수용하는 

예술대학으로서 훌륭했다. 


초기에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가 그래너리 빌딩에 입주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도 적지 않았다. 

킹스 크로스 재생사업과 예술대학이 어우러질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러나 2011년에 모든 공사가 마무리되고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가 이주하자마자 

이 판단은 예상을 뛰어넘을 적절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편, 위치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너리 광장 근처에 접근하면 

시선을 압도하는 독특한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가스 홀더스 런던’이다. 


 1867년에 각기 다른 크기로 건립된 세 개의 가스 저장고의 구조체를 

재활용해 공동주택을 디자인했다.


 월킨스 에어 설계사무소는 기존 가스 저장고의 구조적 형태를 유지하면서 

각기 다른 크기의 주거공간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내부를 디자인하고, 

세 개의 가스 저장고가 만나는 가운데에 다시 작은 원형의 중정을 설치하는 기발한 방식을 제안했다. 


 세계적으로 산업용 가스 저장고를 공동 주택으로 바꾼 사례가 제법 있지만 

이처럼 세 개의 저장고를 합쳐서 하나의 공동 주택을 디자인한 경우는 드물었다. 

공동주택으로 개조된 가스 홀더스

공동 주택으로 변신한 가스홀더스 런던 옆에는 ‘가스홀더 넘버 8’ 으로 불리는 

그야말로 창조적인 공원을 조성했다. 
 아마도 가스 저장고를 세계 최초의 공원일 듯싶다. 


 가스홀더 넘버 8은 바로 앞에 자리한 리젠트 운하와 어우러져 

전 세계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하는 독특한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가스홀더 넘버 8은 거주자들과 인근 주민들을 위한 숨겨진 안식처 역할을 한다. 

 

센트랄 세인트 마틴스, 가스 홀더스 런던 그리고 가스홀더 넘버 8이 

창조적인 재생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면 

‘콜 드롭스 야드’가 빙점을 찍었다. 

콜 드롭스 야드

 콜 드롭스 야드는 1851년에 건립된 

화물열차로 수송된 석탄과 각종 화물을 하역하는 창고와 야적지였다. 


 1970-80년대에는 마약과 매춘이 성행하는 공간으로 변질되었고 

이내 런던에서 손꼽히는 우범지대로 전락했다. 


2019년 공식 개장 후 콜 드롭스 야드는 쇼핑, 휴식, 여가, 오락 등이 어우러진 

런던의 젊은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로 거론될 정도다. 
 콜 드롭스 야드는 재생사업으로 산업유산이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조화를 이루면서 

현대 도시에서 창조적 공간으로 재탄생할 수 있음을 명쾌하게 입증했다. 

 

지도를 펼치면 서쪽의 세인트 판크라스 역, 동쪽의 킹스 크로스 역 

그리고 북쪽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와 콜 드롭스 야드의 한가운데 마치 섬처럼 존재하는 

삼각형 부지를 볼 수 있다. 


 경제적 관점에서 이 장소를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두말할 필요 없이 

킹스 크로스 재생사업의 승패를 좌우했다. 
 이에 아전트는 전략적으로 이곳을 복합 업무지구로 계획했다.


 출발은 삼각형 부지의 중앙에 새로운 공공공간인 ‘판크라스 광장’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완만한 단차를 활용해 물과 자연이 어우러진 정원을 만들고, 

주변에 조경과 거리 가구를 세밀하게 설치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광장을 조성했다. 


 이렇게 고급스럽게 조성된 부지의 한가운데 구글이 들어옴으로써 

자연스럽게 판크라스 광장의 분위기와 특성이 정해졌다. 

 

킹스 크로스 재생사업은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할 만큼 다양한 특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로 정의하면 ‘보행 친화형 활성화 사업’이라 할 것이다. 


 전체 8만여 평의 사업 부지에 차량이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은 손에 꼽힐 정도이고, 

거의 모든 공간이 보행 중심이다. 


 킹스 크로스 재생사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20년 넘게 흔들림 없이 추진 중인 

킹스 크로스 재생사업은 다름 아닌 21세기의 런던 다움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런던에는 많은 도시 재생화 사업이 진행되었고 진행 중에 있지만, 

세 곳의 사례에서 살펴보았듯이 보행중심 도시로 걷기 좋은 도시 만들기가 바닥에 깔려 있다.  


 살기 좋은 도시는 집값이 비싸 젊은이들이 꿈과 희망을 포기하는 곳이 아니라

꿈을 키우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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