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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May 01. 2023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7)

오슬로 회담

<오슬로 회담>

1990년 가을, 

노르웨이 사회학자 테르예 뢰드-라르센과 

외교관인 그의 아내 모나 율은 가자 지구를 방문했다. 


 가자지구는 전쟁으로 찢긴 이스라엘 국경 지대로 

당시 100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이들은 유엔 직원의 안내로 이 지역의 삶에 대한 설문 연구를 진행 중이었고 

난민 캠프를 돌아보던 도중, 

팔레스타인 젊은이들과 이스라엘 군인의 충돌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스라엘군의 총탄이 바람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던지는 돌이 그들 주위로 무수히 떨어졌다. 
 부부는 공포에 떨었지만, 

양쪽에서 싸우는 젊은이들의 얼굴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두 진영의 젊은이들은 두려움에 질려 있었고 반항적이며 불행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얼굴은 서로 닮아 있었다.

 

이후 3년 동안 라르센은 가자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이스라엘 사람과 팔레스타인 사람을 만났다. 

사회 과학자로서 이어진 만남이었지만 

그는 학자로서의 소관을 벗어나는 일을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라르센은 그들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수십 년간의 분쟁 속에 굳어져 버린 적대적인 이미지 때문에 

서로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양편 모두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르센은 미국이 하지 못하는 일을 노르웨이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노르웨이는 작은 나라여서 다른 나라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었다.  

분쟁의 양 국과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석유 보유국이기 때문에   이해관계도 얽히지 않았다. 
 인구 400만 명이 조금 넘는 작은 나라라는 점은 

또 다른 장점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정치적 혁신을 시도할 수 있었다.

 

라르센은 워싱턴에서의 공식 협상과 별도로 오슬로 평화 협상을 열 것을 제안했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이 협상의 호스트가 될 것이고, 

협상은 비밀리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성대한 외교 행사나 기자회견, 리무진 행렬은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협상을 지켜볼 관중도 없을 것이었다. 


 라르센은 워싱턴 평화 회의에 쏟아지는 관심 때문에 

대화가 양극화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고국에서 지켜보는 관객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체면을 지켜야 한다는 강한 압박이 있었다. 
 협상가들은 강력한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느꼈고, 

그 결과 우연한 태도를 보여주기는 어려웠다. 
 양쪽은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자신의 입장을 정하고 그 입장만 고수했다. 

이전 협상과 똑같은 뻔한 수를 두고 뻔하게 대응할 뿐이었다. 
 대본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93년 1월의 어느 눈 내리는 밤, 

이스라엘 학자 두 명이 노르웨이 별장에 도착했다. 
 론 푼닥과 야이르 허슈펠드는 고국의 정치인들을 비밀리에 대표하고 있었다. 
 그들의 상대인 팔레스타인 대표 아부 알리와 마헤르 엘 쿠르드는 

입국심사가 지연되어 조금 늦게 도착했다. 
 노르웨이 기업가 한 명이 라르센에게 보레가드라 불리는 별장과 

그곳에서 일할 사람들을 내주었고 

국제 정치에 관련된 일이라는 것 외엔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다음날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응접실에 모였다. 
 예상대로 분위기는 어색했다. 
 이 만남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라르센은 그들에게 우선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집과 아이들 이야기를 나누라고 조언했다. 
 점심식사가 끝난 후 벽난로에 불이 피워졌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표들은 낮은 커피 테이블 양편에 놓인 붉은 벨벳 소파에 몸을 파묻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워싱턴에서는 양편이 각각 100명 이상의 대표단을 보냈다. 

두 대표단은 서로 다른 호텔에 묵었고, 

각기 별도의 기자회견을 가진 후 거대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만났다. 
 미국 측 중재자들은 양편의 제안과 반대 제안을 중개했다.


 보레가드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표단들이 함께 식사를 하며 

휴식 시간도 함께 보냈다. 
 라르센은 저녁식사 테이블의 자리 배치 같이 세부 사항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참여자들은 훈제 연어와 크림으로 구운 감자 같은 노르웨이 음식을 대접받았다. 

와인과 위스키는 얼마든지 마실 수 있었다. 


총 다섯 명의 협상가들은 별장의 여러 장소에서 세션을 진행했고, 

건물 밖으로 나가 별빛 아래서 눈 쌓인 숲을 오랫동안 산책하며 

논쟁하고 토론하기도 했다. 
 시골 별장에서 주말을 보내는 분위기였다. 

맛있는 음식을 좋은 사람들과 나누어 먹으며 

밤늦도록 흥미로운 토론을 이어가는 주말이었다. 
 참여자들은 각국 수도의 권력에서 떨어져 있다고 느꼈고 

신선한 환경 덕분에 마음을 터놓고 새로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오슬로 회담은 3일 만에 마무리되었다. 
 2월이 되자 협상가들은 각자의 리더들에게 암묵적인 허락과 격려를 받고 

보레가드에 다시 모였다. 

외부에는 비밀에 부쳐진 오슬로 채널은 양측 모두에게 

공식 회담의 진지한 대안으로 여겨졌다. 
 이후 수개월 동안 노르웨이 여러 시골 별장에서 회담이 열렸고, 

참여자들은 혁신적인 합의를 향한 논쟁을 이어갔다. 

 

오슬로 프로세스는 1993년 9월 어느 아침에 열린 회의로 마무리되었다.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참석한 백악관 잔디밭, 파란 하늘 아래서 

두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한 명은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전직 장군으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이웃국가들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렀다.

다른 한 명은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였다. 

그는 이스라엘에 맞선 전쟁에서 40년 동안 싸워왔다. 

 

라르센이 첫 비밀 회담을 보레가드에서 개최한 이후 9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두 지도자는 오슬로 협정이라 명명된 공동 선언에 서명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다. 
 PLO와 이스라엘이 서로를 적법한 상대자로 인정한 최초의 순간이었다. 
 그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불가능한 일이라 여겼었다. 


두 사람 사이에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서서 두 적대자가 악수를 하도록 했다. 

아라파트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라빈은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려는 듯 망설였다. 

그리고 둘은 악수를 했다. 

 

악수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협정의 세부 내용을 둘러싸고 협상은 난항에 빠졌다.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었던 라빈 총리는 1995년 암살당했다. 


 5년 후 오슬로 협정이 기틀을 잡은 평화 프로세스는 

두 번째 팔레스타인 봉기(인티파다)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폭력사태가 격화되면서 

완전히 막을 내렸다. 

 

오슬로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의미 있는 것이었다. 

이 협정의 정신은 양국 간 평화적인 해결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졌다. 

오슬로의 남은 작은 불씨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한번 이루어졌다면, 

다시 이루어지기는 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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