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이야기(11)

팔레스타인 문제와 9.11 테러

by 산내

9.11 테러를 바라보는 아랍인들의 생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미국이 그동안 이슬람 세계에 가해 왔던

오만불손한 독선과 이중잣대에 대한 통쾌한 보복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로

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미국의 지나친 친 이스라엘 정책과 문제를 지적했다.

물론 그들도 급진적 이슬람 원리주의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테러 자체를 두고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미국에 대한 응징이라는 데는 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온건그룹이나 지성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9.11 테러는 이슬람 심장부를 겨냥한 지울 수 없는 테러였다는 것이었다.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으로 각인된 이슬람의 호전성을 더욱 부각했을 뿐이며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공습과 이라크 공격의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무고한 이슬람 시민이란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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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종교적 범위로 세계 13억 인구의 56개국에 달하는 문화권으로 나타나며,

아랍은 종족적 개념을 나타낸다.

중동은 19세기말 영국이 세계를 지배할 때 구분해 놓은 지정학적 개념으로

영국을 중심으로 오른쪽을 동쪽으로 표현하면서 아시아를 극동,

발칸과 그리스 지역을 근동 그리고 중간지역을 중동으로 분류했다.



이슬람과 서구의 대결을 지울 수 없는 운명으로 바꾸어 놓은 사건은

1947년 11월 27일 유엔 총회 표결이었다.

그날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리하여 아랍과 유대 두 개의 독립국가로 분할하자는 안이 통과되었다.

당초 아랍인이 중심이 되는 팔레스타인 연방 안이 우세했으나

미국의 집요한 제3세계 회유 작전으로 결국 연방 안 대신 분할 안이 통과되었다.


당시 인구비에서 1/3, 전체면적의 7%를 소유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전역의 56%를 분할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경작 가능한 대부분의 땅은 유대인 차지로 되었다.


2천 년 동안 그 땅의 주인으로 살아온 아랍인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과 좌절을 맛보았다.

1947년 그날, 아랍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유엔표결의 현장에 영국은 없었다.

갈등의 씨앗을 뿌려 놓은 영국은 기권을 택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은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식민 치하의 아랍인들을 끌어들였다.

영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워주는 대가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지역 독립을 보장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1915년 12월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알려진 비밀협상이 맺어졌고

영국은 로렌스 대령을 급파하여 아랍인들의 오스만 공격을 진두 지휘했다.
아랍인이 오스만 제국의 전략적 요새인 아카바를 함락함으로써 연합국은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1917년 영국은 미국의 참전과 독일의 내부 정보 탐지를 위해 유대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영국 외상 벨푸어는 영국의 은행 재벌 로스 차일드와 비밀리에 회동,

소위 벨푸어 선언이라는 비밀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유대인의 전쟁참여 대가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민족국가 창설을 약속해 주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16년 5월 16일 또 다른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대표 사이크스와 프랑스 대표 피코 사이에 체결된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골자는 전후 중동의 분할에 관한 것이었다.


이 비밀협정에 따르면 프랑스는 시리아의 해안지대와 그 북부를

영국은 팔레스타인과 바그다드를 점령하기로 약정했다.


다시 말하면 팔레스타인 한 지역에 아랍인에게는 아랍국가의 독립을,

유대인에게는 유대 민족국가의 창설을 약속해 주고,

영국과 프랑스는 자기들이 그곳을 점령하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이다.

상호 모순되는 3개의 비밀조약과 강대국의 비도덕적 정치음모가 오늘날 중동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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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1월, 유엔으로부터 국가창설은 인정받은 유대인들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으로 건국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 땅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 토착 아랍인의 저항이 워낙 완강하여 큰 차질이 초래되었다.


1948년 4월 9일 유대인 테러 조직이 예루살렘 서쪽의 아랍 마을을 습격하여

254명의 주민을 무차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전 이스라엘 수상인 메나헴 베긴이 테러대장으로 진두지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기습만행이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자

불과 1달 만에 100만 가까운 아랍인이 공포에 떨며 인근 국가로 도피해 감으로써

소위 팔레스타인 난민문제가 생겼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은 아랍인을 몰아낸 곳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웠다.

아랍 국가와 제3세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아랍인의 심장부에 유대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이집트를 중심으로 한 아랍국가들의 즉각적인 저항은 전쟁으로 돌입하여 1948년 1차 중동전을 유발했고,

1956년 아랍민족주의를 표방한 이집트 대통령 낫세르의 지도하에 2차 중동전이 벌어졌지만

결과는 모두 아랍인의 패배였다.


1967년 소위 6일 전쟁으로 알려진 3차 중동전쟁에서 영토의 회복은 고사하고

기존의 아랍의 영토인 가자지구, 요르단 강 서안, 골란 고원, 시나이 반도마저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했다.


아랍인은 미국의 일관된 정책과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가치기준을 원한다.

아랍권을 겨냥하고 있는 200여 기의 핵탄두를 가진 이스라엘이

핵무기 확산금지조약에도 가입하지 않고 핵사찰의 예외를 묵인해 주면서

적대관계에 있는 아랍국가들의 자위 개념인 핵 시설은 물론 사소한 화학무기 프로젝트까지 철저히 파괴하는

미국의 이중성에 아랍인은 좌절하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에 행해진 항공기 자살테러도 그랬다.

아프가니스탄 폭격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유발해 놓고도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강행했다.


이라크가 핵 관련 시설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스라엘마저 인정했고

미국을 제외한 다른 서방국가들도 이라크의 현실적 위협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미국이 확인되지도 않은 대량 살상무기 운운하며 이라크를 공격했지만

영국을 제외하고 누구도 미국의 억지 논리에 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유 이권과 향후 나누어 먹을 파이에 탐이 나서 미국과 등을 돌리지는 않았을 뿐이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반미성향이 강한 어떠한 아랍국가도 공격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엄청난 재앙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국제적인 연계조직을 이용한 이슬람 급진조직의 테러활동은 위축되겠지만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반미테러의 더 거센 위협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서구가 자기 성찰을 통해 진정으로 빼앗긴 자들을 어루만져 주고,

착취한 최소한의 양식을 나누어 줄 차례다.

무고한 미국 시민들이 희생당한 참혹한 테러현장에서

서방세계가 경악하고 분노와 슬픔을 보이고 있을 바로 그 시각,

아랍인들은 지난 60년간 이스라엘의 테러로 숨진 수만 명의 형제와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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