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지옥
서로 맞물려 있던 세계 경제 시스템이 1929년에 붕괴되어 모든 사람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몇 백만 명의 커피 재배업자, 수입업자, 로스팅업자들이 대공황을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들여다보면,
당시의 경제적 혼돈이 전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당시의 위기는 어떤 이들에게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파산, 절망, 심지어 죽음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수십 억에 이르는 브라질의 커피콩에게는 대학살의 전조였다.
브라질에서 대공황은 브라질의 구 공화국과 커피 독과점 실력자 지배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1930년에 부정선거로 줄리우 프레스테스가 집권한 후,
10월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브라질 남부 출신의 정치가
제툴리우 바르가스(Getulio Vargas)가 대신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
상파울루의 커피 제왕들조차도 이 반란을 환영했다.
어떻게든 커피 가격 안정책을 규합해야 하는데 정부가 신통치 않아 제대로 못 해냈기 때문이다.

1929년에 파운드당 22.5센트이던 커피 가격은 2년 후에 8센트로 폭락해 있었고,
1930년에 브라질의 창고에는 2천6백만 자루의 커피가 방치되어 있었다.
이전 해에 전 세계에서 소비되었던 양보다 1백만 자루가 더 많은 양이었다.
이런 절망적 상황인지라, 변화라면 그것이 뭐든 무조건 반갑게 여겨졌다.
땅딸막한 체구에 변호사 출신으로 실용적인 성향을 가졌던
바르가스는 전례 없이 긴 기간 동안 브라질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는 어딜 가든 시가를 물고 다니며 나라의 문제점을 진심으로 염려하는
친근한 경청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른 라틴아메리카 독재자들과는 달리 바르가스는 대체로 공포보다는 온건함을 내세웠다.
그리고 취임 직후 커피나무를 새로 심는 것을 금지시켰다.
바르가스는 상파울루에 군정장관을 임명하기도 했는데,
이 군정장관은 임명되자마자 5퍼센트의 임금인상을 명령하고 혁명 참전군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주었다.
바르가스는 커피숍 커피 한 잔의 값을 반으로 깎아 버리며 경영자들을 격분시켰다.
한편, 커피 재배업자들과 판매업자들을 달래기 위해
상파울루 출신의 커피 전문 은행가 주세 마리아 휘터커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휘터커는 "자유로운 거래 체제로 돌아가는 것이 절실하다.
가장 먼저, 악몽같이 끔찍한 커피 재고부터 처리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정부에서는 커피의 엄청난 과잉 재고를 태워 버리려 했고,
이는 단지 시장이 "수요와 공급이라는 전통적인 법칙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하려는 조치였다.
그 첫해에, 브라질인들은 7백만 자루 이상의 커피를 그렇게 폐기 처분했다.
이 정도면 대략 3천만 달러어치에 상당하는 양이었는데도,
여전히 수백만 자루의 커피가 창고를 메우고 있었다.

외국의 저널리스트 하인리히 야콥은 1930년대 초에 저공 비행하던 비행기에서
불에 타고 있는 커피를 처음 보고 다음과 같이 섰다.
아래쪽에서 향기로우면서도 톡 쏘는 독한 냄새가 올라와 객실을 가득 메웠다.
감각이 마비된 듯 얼얼하다 못해 거의 고통스러웠다. (・・・)
이제 냄새는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독한 가스 때문에 귀도 울렸다.
힘까지 빠지는 것 같았다"
브라질인들은 필사적이었다.
과학자와 발명가들은 남아도는 커피의 다른 용도를 찾으려 애썼고,
공공사업부 장관은 커피콩을 벽돌 모양으로 압축해서 철도용 연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정식 허가했다.
커피에서 알코올, 기름, 가스, 카페인, 셀룰로오스계 부산물 등을 추출하려는 실험들도 시도되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신문에서는 커피 생두를 같이 섞어 제분한 밀가루로
"기막힌 맛과 모양의 영양가 높은 빵을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제안까지 내놓았다.
포도주 양조업자들이 커피 과육으로 그런대로 마실 만한 화이트와인을 만들어 냈는가 하면,
커피 꽃은 압착되어 향수의 원료로 이용되기도 했다.
또한 몇 년 후에는 한 발명가가 커피콩으로 새로운 종류의 플라스틱을 개발했다.
한편 브라질인들은 커피와 관련된 획기적 제안들을 짜내서 외국 정부와 접촉하기도 했다.
가령 소비에트 연방을 정식으로 인정해 주며 러시아산 밀이나 가죽과 커피를 맞거래할 구상을 했는가 하면, 아시아 전역에 브라질의 커피숍 수천 개를 열어서 자국산 원두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계획도 세웠다.
이런 계획들은 대다수가 별 성과를 얻지 못했으나
미국의 남아도는 밀과 커피를 거래하려던 계획은 1931년부터 실제로 성사되었다.
비옥한 테라사를 보유한 브라질은 내수용 밀을 충분히 재배할 수 있었는데도
브라질 내에서 실제 재배되는 양은 필요한 양의 8분의 1에 그쳤다.
이는 커피 단종재배에 몰두한 근시안적 관행이 낳은 또 하나의 결과였다.
그러나 커피-밀의 맞거래는 문제점을 낳았다.
우선 미국의 운송업자들은 브라질의 해운회사가 그 모든 밀과 커피를 수송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이전까지 브라질에 밀을 공급했던 아르헨티나인들로서도 이 거래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미국의 커피업자들 또한 정부가 커피 시장에 싼 커피를 들여오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며,
그로 인해 커피 가격이 떨어질까 봐 안달했다.
미국의 밀가루 회사들도 심기가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1932년 7월, 그러니까 곡물안정위원회가 밀과 교환해서 받은 커피를 막 팔기 시작했을 때,
좌절감에 빠진 파울리스타들이 바르가스에게 맞서 반란을 일으키며 입헌정치를 요구했다.
그 여파로 산투스의 항구가 폐쇄되었고 급기야 8월에 「뉴욕타임스」에는 이런 헤드라인이 실렸다.
"머지않아 커피도 없이 아침을 먹게 될 날이 닥칠 듯하다."
리우데자네이루와 빅토리아 항구가 산투스 항구의 물량을 대체하며
기존보다 더 많은 물량의 커피를 수출했으나,
더 상급인 상파울루산 커피콩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길이 갑자기 막혀 버렸다.
미국에서는 곡물안정위원회가 1백만 자루가 넘는 커피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계약상의 제한 때문에 월 6만 2천5백 자루밖에 팔지 못했다.
그 결과 커피 부족 사태가 닥칠 기미였지만,
파울리스타의 폭동이 3개월 만에 실패로 끝나면서 커피 가격은 다시 하락했다.
1932년 11월 말에 브라질로부터 다음과 같은 진보가 날아들었다
"상파울루의 창고들이 가득 차서 국내에서의 탁송을 더 이상 받지 못하고 있음.
쌓아둘 곳이 없음. 지하실, 가정집들까지 보관에 동원한 형편임.
이대로는 계속 일이 속속 이어지고 있음. 지속할 수 없음. (・・)
국내에서의 쇄도하는 물량을 감당할 수 없음. 불태우는 일이 속속 이어지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