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의 쿠데타
1944년에 과테말라에서 독재자 우비코가 타도된 이후,
새로운 대통령 후안 호세 아레발로는 강제 노동을 폐지하는 한편,
전시 중에 독일인에게 몰수한 커피 농장의 소유권을 국가로 귀속시켰다.
그러나 아레발로는 농지개혁을 시도하진 않았다.
1951년에 장군 출신인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은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과테말라를 "경제적 독립 국가”로 개혁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다음 해에 과테말라는 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키며,
공유지 또는 주인이 있으나 휴경지인 땅에 대해 재분배를 규정했다.
아르벤스 정부는 1백 곳이 넘는 예전 독일인 소유의 커피 농장을 농민조합에 양도하기 시작했다.
이때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가 외국 회사 가운데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회사의 바나나 재배 예정지 대다수가 휴경지였기 때문이었다.
1954년에 토지 소유욕에 목마른 농민들이 커피 농장을 불법으로 점유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몇몇 과테말라 공산주의자의 부추김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신임 국무부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개인 변호사로서 유나이티드 프루트사의 대표로 나섰다.
게다가 그와 형제지간으로서 CIA의 국장이던 앨런 덜레스는
몇 년 전부터 유나이티드 프루트사의 이사로 재임 중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 바나나 회사의 우려보다 더 심각한 심정으로 과테말라의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미국의 관점에서는 아르벤스가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에 위협이 되는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1953년 8월에 CIA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설득하여 작전명 '석세스'
즉 아르벤스 정권을 끌어내리기 위한 CIA의 비밀작전을 인가받았다.
이들은 우익 성향의 외교관 존 푸리포이를 과테말라 주재 미국대사로 임명하는 한편,
미주기구 OAS 카라카스 회의에서
자신들의 개입 구상을 정당화시켜 줄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1953~1954년에 과테말라 의회에는 공산당 의원이 네 명뿐이었고,
아르벤스는 공산당원을 단 한 명도 자신의 내각에 임명하지 않았다.
사실, 공산당원들은 그의 정권을 지지했지만
아르벤스는 민족주의자였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6월에 CIA는 과테말라의 쿠데타를 뒤에서 지원하여 아르벤스를 끌어내렸다.
작전명 석세스는 과테말라에게 오랜 재앙이었다.
CIA에서 발탁된 인물이었던 과테말라의 새 대통령,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 장군은 대통령직에 오르기 무섭게
농지개혁법을 무효화하고 문맹자들의 선거권을 박탈시켰으며,
비밀경찰을 부활시키고 정당, 노동단체, 농민 조직을 불법화했다.
미국 정치인들은 이런 상황에 나 몰라라 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 해에,
일곱 명의 의회 대표단이 과테말라에 순회를 왔다가
카스티요 아르마스를 접견했다.
그런데 이 대표단이 제출한 보고서에서는
“공산주의 노선의 정부를 타도"한 것에 대한 격찬이 담겨 있었다.
카시티요 아르마스는 1957년에 암살되었고
정부의 암살단과 게릴라 부대가 여기저기 누비면서
과테말라는 30년 동안 억압과 폭력과 공포의 세월을 보내야 했는데,
이런 내전의 나락은 미국의 개입이 남긴 유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