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이야기(13)

엘 고르도와 보고타 그룹

by 산내


리카르도 파야 카세레스(Ricardo Falla Caceres)는

자신의 조국 엘살바도르가 피바다로 변해 가는 동안에도

국제 커피 자금의 흐름 속에서 막대한 돈을 굴리고 있었다.


일명 '엘 고르도(뚱돼지'라는 뜻)로 불리던 파야는 당시에 "영리한 전략가"라거나

"커피 시장에서 존경과 두려움을 받고 있는 무시무시한 경영자" 등의 무수한 수식어가 따라붙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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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말과 1978년 초에는 무역회사 콤파니아 살바토레나데카페SA의 수장으로 활동하며

뉴욕 커피 · 설탕 거래소에서 가격을 끌어올리는 능력을 발휘해 보임으로써

커피 생산업자들을 감탄시키기도 했다.


이때 감시 역할을 하던 선물거래위원회(Commodity Futures Trading Commission)는

당시의 상황에 너무 놀란 나머지 1977년 11월 23일에 비상 명령을 발동하여

12월의 커피 계약 거래를 중단시키면서 반대매매와 기존 계약의 이행만 허용했다.


그러다 브라질에 가벼운 혹한이 닥친 직후인 1978년 8월,

브라질,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멕시코, 베네수엘라 등

라틴아메리카 8개국의 커피 부문 대표단이 보고타의 비공개회의에서 파야를 만나 전략을 세웠다.


국제커피협정에서 정한 파운드당 77 센트라는 협정 발동 기준 가격은

혹한 피해 후의 인플레이션 상황에서는 비참할 만큼 부적절했고,

그래서 생산국들은 커피 가격을 부양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과거의 경험상, 소비국의 동참 없는 쿼터제는

늘 누군가가 규정을 어기게 되어서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


그러다 생두 가격이 파운드당 1달러 아래로 떨어지자

생산국들은 1억 5천만 달러의 기금을 모은 후 파야에게 선물시장을 주무르도록 했다.


첫 회동 장소의 이름을 딴, 그 유명한 '보고타 그룹'은 이렇게 해서 탄생되었다.

아무튼 당시는 수요와 공급이 대략 균형이 잡혀 있던 터라 시장 조작의 성공 가망이 꽤 높았다.

거짓 품귀 정보나 품귀 우려에 대해 사람들이 더 쉽게 반응할 터였으니까.


사실 커피 시장은 소심한 이들에게는 어울리는 세계가 아니었다.

당시의 어느 금융 분석가가 지적했다시피,

커피는 다른 상품에 비해 소량으로 거래되는 만큼 유동성이 낮아서 위험성이 컸다.

"커피를 거래하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피도 눈물도 없이 이기적인 몇몇 큰손 투기꾼, 생신국의 현지인과 업계 사람들 소수이다.

또한 종종 로스팅업체들도 끼어들곤 한다." 이 금융 분석가의 말이다.


1979년 9월 무렵 보고타 그룹의 활동이 미국 언론에게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일례로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Jack Anderson)은

"커피 담합의 가격 사기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냈다.


파야의 활동은 미 국무부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국무부의 줄리어스 카츠는 의회에 나와 증언하는 자리에서,

보고타 그룹이 "가격을 부양하기 위해 공모적이고 일방적인 행동을 벌이고 있다"며 비난했다.


또한 보고타 그룹에게 국무부의 심각한 우려에 대해 전하기도 했으나,

파야는 냉대적 반응을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경기장은 당신들 것일지 몰라도 공은 우리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커피가 없으면 선물시장의 거래 자체가 없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파운드당 1달러 85센트였던 당시의 커피 가격은 사실상 불합리한 수준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제 커피, 설탕, 코코아를 취급하고 있던 뉴욕 거래소에서는

보고타 그룹이 너무 많은 선물계약을 사들이는 식으로 가격을 끌어올려

"시장을 쥐어짜는" 행위를 못하도록 막기 위해,

1979년 12월에 다시 한번 반대매매 외의 거래 중지를 발동시켰다.


1980년 봄에 파야는 보고타 그룹을 설득해 자신의 무역회사

판카페프로 두크토레스데카페S(이후 '판카페'로 표기함)를 세웠다.

이 무역회사는 코스타리카 소재의 파나마 회사로 설립되었고 투자금만 무려 5억 달러였는데

이 돈은 그가 이전의 무역을 통해 벌었던 돈과 기부국들로부터 새로 받은 돈을 합친 자금이었다.

이 투기세력이 회사를 만든 것은,

선물거래위원회의 시도를 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따른 것이다.


한편 미 의회는 이 핀카페 회사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써,

협정 발동 기준 가격을 보다 합리적인 수준인 파운드당 1달러 68센트로 재협상했던

국제커피 협정의 시행법을 지연시켰다.

내부 정보통에 따르면, 그 후 미국 세관원들이 런던으로 향하던 파야를 뉴욕 공항에서 붙잡아

어느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관원들은 그에게 판카페의 해체를 약속하기 전까지는

미국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갈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또한 해체에 동의한다면 미국의 국제커피협정 전면 동참을 위해 힘써 주겠다고도 했다.

결국 파야는 압박에 굴복하여 판카페를 해체시켰고 의회는 즉각 시행법을 통과시켰다.

커피 가격은 공급과잉에 대한 기대에 따라 떨어졌다.


메릴린치의 한 논평가는 가격을 끌어올릴 수나 있었을지에 대해 회의를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것이다.

커피가 아무리 검은 액체라 해도 석유는 아니라는 것"


미국이 국제커피협정의 부활에 합의하게 된 속내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즉, 또다시 냉전시대의 두려움에 발목이 잡혔던 것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니카라과에서의 산디니스타 혁명과 더불어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에서의 좌파 게릴라 운동이 전개되던 터였다.


그런 탓에 라틴아메리카의 커피 생산국들이 궁지에 몰릴 경우

공산주의가 승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고조되었다.

브라질의 생산량이 회복세로 돌아오고 세계 소비량이 정체된 상황이라,

또다시 커피의 공급과잉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쿼터제가 시행되지 않는다면

가격은 다시 참담한 수준으로 떨어질지 몰랐다.


결국 가격이 파운드당 1달러 20센트 수준까지 떨어졌던 1980년 말,

소비국과 생산국들이 다음 해에 세계 수출 할당량을 5410만 자루로 합의하면서

국제커피협정 체제가 개시되었다. 브라질은 운 좋게도 세계 할당량 중 25퍼센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1962년의 40퍼센트보다는 낮은 수준이었지만

1979년 기준의 실질적 시장 점유율인 18퍼센트에 비교하면 유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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