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전, 커피업자들의 불행
앙골라에서는 내전 탓에 커피 수출이 급감하면서
1974년에 520만 자루던 수출량이 1984년에 들어서자 30만 자루에도 못 미쳤다.
한편, 중앙아메리카의 세 국가는 오랜 내전에 휩싸여 있었다.
1980년에 과테말라의 한 농민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맨발이지만 수가 많다.
지주와 권력자들이 부는 우리가 만들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을 멈춘다면 그 자들도 더는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한다.
우리가 없으면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말은 맞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흐름은 달랐다.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과테말라의 루카스 가르시아 장군이
게릴라군 퇴치 작전을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1981년에는 대량학살이나 다름없는 사태가 전개되었다.

잔학한 짓을 벌이기로는 게릴라군도 다를 바가 없었으나,
그래도 군대가 자행하던 짓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많은 원주민이 게릴라군에 가담한 것이 사실이긴 했으나,
군인들은 원주민이 눈에 띄었다 하면 가담 여부에 상관없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죽였다.
그러던 1982년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루카스 가르시아가 축출되면서,
기독교도로 거듭난 리오스 몬트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리오스 몬트는 처음엔 사면을 선언했으나 오래지 않아 피비린내 나는 학살전이 재개되었다.
대다수 커피 재배업자들은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들의 농장에 별 피해가 없기 만을 빌었다.
라 파스의 소유주인 발터 한슈타인도 바로 그런 처지에 놓여 있었다.
군대에서 한슈타인에게 트럭을 요청할 때마다 그는 트럭이 고장 났다고 둘러댔다.

게릴라군도 그에게 집요하게 접근해 왔다.
상황이 그랬는데도 군대는
한슈타인이 게릴라군에게 너무 친절히 대했다며 농장에 3백 명의 군인을 야영시켰다.
군대가 떠나고 나자 이번엔 게릴라군이 한슈타인이 군대를 너무 친절히 대했다며 농장에 불을 질러 버렸다.
1983년에 쿠데타가 일어나 리오스 몬트가 또 다른 군 독재자로 대체되었으나
암살단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상황은 여전했다.
인접국인 엘살바도르의 폭력과 압제는 과테말라만큼 끔찍했다.
면적이 뉴저지주와 대략 비슷한 엘살바도르는 인구가 4백만 명이 넘어 서반구 최고의 인구 과밀 국가였다.
"서서히 굶어 죽느니 차라리 싸워서 빨리 끝장을 보는 편이 낫다"
어느 게릴라 전사가 했던 말이다.

미국은 살인 행위에 반대하는 확고한 도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중앙아메리카 전체가(니카라과처럼) 공산주의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될까 봐 두려운 나머지,
엘살바도르나 과테말라의 압제 정권을 헬기와 반군 진압 훈련으로 지원하면서
온건한 개혁을 하도록 슬쩍슬쩍 설득했을 뿐이다.
1980년에 엘살바도르에서 카터 행정부의 압박에 못 이겨
토지개혁법이 통과되긴 했으나
이 법은 커피업계 독과점 실력자들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 법을 은폐물 삼아 군을 토지 분할 시행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더욱 가혹한 압제를 가했다.
보다 못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1980년 3월 23일에 강력한 어조로 설교를 했다.
"수많은 피로 물든 개혁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정부가 그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길 바랄 따름입니다.
너무나 큰 고통에 시달려온 우리 국민의 이름으로 간청합니다.
이제 그만 압제를 멈추십시오."
그다음 날, 로메로는 추모 미사를 올리던 중 총에 맞아 사망했다.
억압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군사정권 통치를 인정했던 커피업계 실력자들은
제대로 통제도 안 되는 괴물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는 깨우침에 이르렀다.
그들 대다수는 평화 협상, 제한된 민주주의, 자유 시장을 지지했다.
과테말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농장주들은 게릴라군과 암살단 사이에 끼어 난감한 처지였고,
특히 대규모 농장주들이 더 위험에 몰렸다.
인접국인 니카라과에서는 대다수 커피 재배업자들이 지긋지긋한 소모사 정권을 타도했던
1979년의 산디니스타 혁명을 지지했었다.
그런데 새 정권은 ENCAFE라는 정부기관을 창설해 커피 수출을 국영화시켰고,
ENCAFE에서 생산자들에게 지불해 주는 가격은 국제시장 가격의 10퍼센트에 불과했다.
산디니스타 정권은 이렇게 수익을 몽땅 가로채 놓고는 수월한 조건으로 대출을 내주어,
농장주들을 빚더미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혁명 초기에 산디니스타들은 소모사가 보유했던 광대한 커피 재배지를 취하여 국영기업으로 운영했다.
자기 딴에는 "혁신"을 시켜 농장주들에게 되돌려주겠다고 떠벌이며 농장들을 인수했으나,
결과적으로 그 혁신이란 것은 황폐화, 목재 수학, 방치가 되어 버렸다.
농장을 다시 돌려준 경우도 드물었다.
누구든 산디니스타 정부의 정치나 정책에 의문을 제기했다간 자본주의 기생충이라는 딱지가 따라붙었다.
산디니스타군은 어쩔 수 없이 통제구역'으로 이동해야 할 입장에 몰리자
20만 명의 농민들을 그들의 터전에서 강제로 쫓아냈다.
수많은 이들이 반정부군의 보호를 받기 위해 온두라스 국경을 넘어 도망치면서,
(총인구의 7분의 1에 해당하는) 50만 명의 니카라과인들이 망명자 신세가 되었다.
산디니스타 정부는 이런 망명사태에 대응해 캄페시노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것을 '농지 개혁'이라고 불렀으나 엄밀히 말하면 군의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반정부군에 가담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캄페시노들은 농장을 운영해 본 경험도 없는 데다 의욕을 자극할 만큼 수익이 거의 없자
커피나무가 썩어 가도록 방치했다.
1986년 무렵 대단지 커피 재배업자들은 대다수가 그저 무기력증에 매달려 버텼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커피나무에 들인 막대한 투자금에 매여서 이대로 버리고 떠나지도 못한다."
실제로 한 재배업자가 했던 말이다.
그들은 손해를 보면서 은행 대출로 겨우겨우 농장을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많은 농장주들이 몰수를 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유지 보수와 수확을 하면서 버텨 냈다.
어느 농장주는 체념조로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이웃에서 초상이 나면 그다음은 내 차례일 것이다.
니카라과의 개인 재배업자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