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기억
아침부터 내리는 비가 여행자의 발목을 잡았다.
호스텔 공용공간에서 세탁과 건조를 마쳤지만 여전히 비가 내린다.
호스텔에서 조식을 먹었지만 점심시간이 되니 시장기가 느껴져 현태가 프런트에 가서,
“우산 빌려줄 수 있어?”
“지금은 다 빌려가고 여분이 없는데…”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현태가 불쌍해 보였는지
사무실로 들어간 직원이 우산을 들고 와 현태에게 건네준다.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베트남 쌀국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이태리 커피 바에서 커피 한잔했지만
비는 멈추지 않는다.
저녁 시간이 되자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춘다.
하루 종일 숙소에서 보낸 시간이 아쉬워 구시가지 흑맥주 집을 다시 찾아 나섰다.
어제 방문한 집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지만
오늘은 다른 전통 있는 맥주 집을 찾아 자리를 청하니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많았고 빈좌석도 예약석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간신히 구석 자리를 마련해 알트 비어와 헤어링 그리고 삶은 소고기 요리를 시켜
어제 실망했던 알트 비어의 참 맛을 보기 위해 한 모금 마셨지만
맥주 맛은 어제와 차가 없다.
현태가 알트 비어를 처음 접했던 시기는 25년 전,
그 당시 우리의 삶은 많은 것이 부족했고 맥주라고는 OB와 크라운으로 다양성이 없었다.
그때 찾아간 독일 맥주 집은 별천지였고
그 감성이 맥주 맛에 더해졌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좋은 추억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 뇌의 특별한 기능인 기억의 조작이 이루어져
무지개 빛으로 덫 칠하니 기억 속에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적인 맥주 맛을 만들었고
지금 그 맛을 찾으려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의 조작에서 벗어난 현태는 현실의 알트 비어를 헤어링과 함께 마시고 쓴웃음을 짓고 자리를 일어서며
'알트 비어 너는 변함이 없건만 인간의 간사함이 너를 이상한 맥주로 만들려 했구나.'
오랜만에 화창한 날씨에 아침 바람이 신선하다.
커피가 맛있는 이태리 커피숍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기 위해 앞서 가전 현태가 뒤를 따라오던 재인에게 다가가
“아직도 이동하는 날에는 마음이 조급해지고 걸음걸이가 빨라져. 너는 어떻니.”
“저는 그럴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있어요.”
“아빠보다는 엄마가 준비성은 더 철저하지 주위 사람들까지 모두 챙기니
같이 있는 사람은 편하지만 자신은 많이 힘들지.”
“예 그렇죠.”
아내 생각에 젖어 걷고 있던 현태를 재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부른다.
“아빠! 어디 가세요? 이태리 커피숍은 여긴데…”
오늘 목적지인 암스테르담을 가기 위해서는 뒤셀도르프 중앙역에서 Monchengladbach역으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ICE를 타고 암스테르담 중앙역으로 이동해야 한다.
연착한 암스테르담행 기차에 올라 재인이 예약한 좌석 64, 66번을 찾으니
중년의 남자와 아들이 자리에 앉아 잠을 자고 있다.
‘남의 좌석에 앉아 자는 척하는 모양인데…
지난번 배불뚝이 독일 아저씨에 당한 만큼 너희들을 쫓아내고 내 소유권을 주장해야지…’
두 사람에게 다가가는 현태를 재인이 다급하게 말리며,
“아빠, 여기는 37호실이고 우리는 39호실로 더 가야 해요.”
재인이 예약한 좌석은 아쉽게도 역방향 좌석,
기차가 네덜란드 국경에 가까워지자 앞 좌석 젊은 여자가 좌석 사이 공간으로 얼굴을 내밀며
“혹시 두통약 가진 것 있나요.”
재인이 가방에서 두통약을 꺼내 두 알을 건네자 옆에 앉은 남자 친구에게 약을 먹였다.
정신이 돌아온 앞 좌석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안마해 주더니
손을 허벅지에 놓고 문지르면서 가슴과 치마 속으로 손을 넣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대중이 이용하는 기차 안에서 이런 짐승 같은 놈이 있나?
아까운 우리 약이 짐승 한 놈을 살려 놓았네.’
기차가 암스테르담에 현태는 속이 답답하고 구토와 두통증세가 심해짐을 느꼈다.
역방향에 앉아 생리통으로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재인을 곁에 두고
나라도 먹어야 재인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크로와상 한 개를 먹었는데 이게 체한 모양이다.
몸이 좋지 않은 재인을 돌보기는커녕 자신의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다.
기차는 예정 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어 오후 2시경 암스테르담 역에 도착했고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호스텔로 찾아가 Check-In을 하니
도미토리 내에 있는 더블침대로 예약이 되어 있다.
좁은 침대에 두 사람이 도저히 잘 수 없어 침대 하나를 더 요구하니 같은 방에는 여분이 없다며
옆방 6인실에 있는 싱글 침대 하나를 추천해 2박에 89유로를 추가 지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