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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Oct 04. 2024

준비되지 않은 100세 시대(8)

은퇴부부에게 필요한 3공

"개구리 한 마리 오래된 연못에 뛰어드네. 퐁당!

일본의 바쇼가 지은 유명한 하이쿠다. 
하이쿠는 운문 문학중 길이가 가장 짧은 장르에 속하는데 17자로 이루어져 있다.  
직장을 마치면 적막한 가운데 변화들이 소용돌이친다.  

오랜 직장 생활을 마치고 휴식기를 갖는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별일 아닌 것 같지만 가정이라는 단위에서 보면 고요한 연못에 '퐁당' 하고 파장을 일으키는 사건이다. 
베이비부머는 대개 남성이 밖에서 일하고 아내는 가사를 돌보다 보니 반평생 서로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직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더라도 자녀가 중심이어서 부부간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갈등이 있어도 표면화되지 않는다. 

그런데 남성이 퇴직할 즈음이면 상황이 180도 변한다. 
남성이 밖에서 일하는 시간이 급속히 줄고 집에 있는 시간이 그만큼 늘어난다. 
설상가상 자녀들이 분가한 집에는 부부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당혹스러운 장면이다.
 
이런 변화에서 은퇴 부부의 충돌이 일어난다. 

그렇다고 매번 부부 중 한 명이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자녀들이 없으니 이제 둘만의 꿈같은 시간을 갖자는 것도 무리다. 
이처럼, 은퇴라는 변화에 더하여 가정구조가 자녀 중심에서 부부 중심으로 바뀔 때 은퇴 부부는 위기를 맞게 된다.  



위기를 돌파할 3가지 방책을 알아본다. 


첫째, 각각의 공간이 필요하다. 
같은 집에 살면서 사사건건 다투던 엄마와 자녀도 분가해서 살면 사이가 좋아진다. 
같이 사는 며느리보다 한 번씩 와서 용돈 좀 주는 며느리가 예뻐 보이는 이치다. 
국가도 인접해 있으면 사이가 나쁘고 떨어져 있으면 좋다.  

집에도 대문과 안채 사이에는 공간을 둔다. 
 

대문을 열고 바로 안채가 있으면 방문하는 사람이나 집에 있는 사람이나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때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이야기를 나누다 한걸음 다가가면 상대방이 반사적으로 물러나는 것도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부부도 각자의 공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집에 같이 오래 있는 시간을 줄일 필요가 있다. 
은퇴 후에 남편은 아내와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싶어 하지만 아내는 남편과의 시간을 줄이고 싶어 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괜히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편은 집에 없는 남편'이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니다.
남성들은 여기에 대해 강하게 항변하지만 원리가 그렇지 않다.
여성들은 이미 집과 그 주변의 삶을 살아왔기에 생활 패턴이 잘 짜여 있고 안정적이다.  


반면 남성은 생활공간이 집으로 옮겨오면 무엇을 해야 할지 난감하게 되어 여성의 잘 짜인 생활 패턴을 따르려 한다. 
남성이 독립적인 행동반경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다. 

은퇴하고 돌아와 집안 살림이나 구조를 새로 정비해 보겠다는 등의 생각으로 아내의 삶의 공간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가계부를 가져오면 엑셀로 깔끔하게 정리해서 지출과 수입 내역을 잘 관리하게 해주겠다고 한다. 
집안 곳곳을 다 치우는 남성도 있다.
마치 감시를 받는 느낌이어서 좋지 않다. 

관심도 적절히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은퇴한 남편이 지켜야 할 원칙 중에 '아내가 나가면 어디 가는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는다'라는 게 있다. 
부부일심동체를 잘못 해석해서 사생활마저 없을 정도로 관심 영역을 공유하고자 하는 생각은 특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둘째, 공감이 필요하다. 

남성은 밖에서 일하는 자신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그 희생 위에 가족의 우아한 삶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우아한 세계>에 나타나 있는 남성 주인공(송강호 분)의 관점이다. 
반면 여성은 집에서 애들과 함께 평생 씨름하면서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동안 남성은 밖에서 우아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남성과 여성의 관점이 이처럼 다를 수 있다.
 
이 슬픔의 격차를 이해하지 못하면 말 한마디가 섶에 던져진 불씨가 된다. 

'평생 일했으니 이제 집에서 아내가 해주는 세끼 밥 먹고 좀 편하게 지내보자'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아내도 자식 다 키우고 집안일에서 해방되어 쉬고 싶다. 
남성의 바깥일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의 깊은 슬픔을 이해하고 보듬어야 한다.  

나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배우자의 속 깊은 상처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공분이 필요하다. 

같이 집안일을 나눈다는 뜻이다. 

은퇴 전에는 밖의 일과 안의 일을 나누어했지만 은퇴 후에는 밖의 일이 없어지고 안의 일만 남는다. 
안의 일도 자녀 양육에 대한 부분은 없어지고 집안 관련된 일만 남는다. 
일이 줄었으니 혼자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 점점 힘들어진다. 
가사 일을 분담해야 한다.
 
젊은 2030 세대는 집안일을 공평하게 분담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지만 베이비부머는 여전히 아내가 집안일을 담당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지럽히는 사람, 치우는 사람 따로 있지 않다. 
쉬는 틈에 짬짬이 공부하고 요리사 자격증을 따서 아내에게 점수를 딴 친구가 있다. 
관점 하나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중요한 일을 돌보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의정을 삼공(三公)이라 불렀다. 

은퇴 부부도 가정에 공간, 공감, 공분의 3공을 두고 관리하면 위기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러면 퇴직 후 가정으로 복귀하면서 일어나는 '퐁당'도 일파만파 퍼지지 않고 곧 잦아들어 평화로운 연못이 될 것이다. 
부부의 관계망을 탄탄하게 지키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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