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이 본 9.11 사태
2024년 올해의 마지막 도서로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선택했다.
큰 기대감을 가지고 읽어갔지만 기대한 만큼 만족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표현하면 나에게는 어려운 책이었다.
본문을 다 읽도록 찾지 못했던 만족감은 책 뒤에 실은 부록을 읽으면서 찾을 수 있었다.
부록 3에 실린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 말자>의 글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화요일(2001년 9월 11일]에 발생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의 고통, 그리고 유명인사들과 텔레비전 논평자들이 들려준 독선적이기 그지없는 철부지 소리나 노골적인 거짓말, 이 양자가 빚어내는 불협화음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뿐만 아니라 우울하게까지 만든다.
이번 사건이 있은 뒤 일종의 검열을 거쳐 나온 여러 발언들은 대중들을 어린아이 취급하려는 캠페인에 모두 동원된 듯하다.
이번 사건이 '문명'이나 '자유', '인류'나 '자유 세계'에 가해진 '비겁한 공격이 아니라, 미국이 맺은 특징 동맹관계와 미국이 저지른 특정 행위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자 스스로 초강대국이라고 자임하는 이 국가에 가해진 공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목소리는 도대체 모두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현재 미국이 이라크에 폭격을 퍼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시민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만약 '비겁하다'는 단어를 쓰려면, 타인을 죽이려고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자들보다는 반격을 당하지 않을 만큼 하늘 저 높은 데까지 올라가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자들에게 쓰는 것이 훨씬 더 적합하다.
용기를 봐도 그렇다.
지난 화요일의 대학살을 저지른 자들을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그들은 전혀 비겁하지 않았다.
우리의 지도자들은 만사가 문제없다고 우리를 확신시키려 애쓰고 있다.
미국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비록 이 날이 불명예스러운 날로 기억될지라도 우리의 기백이 꺾인 것은 아니라고, 미국은 지금 전쟁 중이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만사가 문제없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번 사건은 진주만 사건이 아니다.
우리의 대통령은 미국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고 우리를 확신시키려는 로봇 같다.
부시 행정부가 해외에서 추진하고 있는 정책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백악관 안과 밖의 여러 유명인사들도 다 같이 일치 단결해 부시 대통령을 지지해야 한다는 말 이외에는 아무런 발언도 자유롭게 표하지 못하는 듯하다.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워싱턴과 그밖에 다른 곳에서는 미국의 어리석은 첩보활동과 방첩 활동에 관해서, 미국이 기존의 대외 정책(특히 중동정책) 대신에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들에 관해서, 그리고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지동 군사방어 프로그램에 관해서 이미 수많은 토론이 이뤄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중들은 엄청난 현실의 괴로움을 견뎌달리는 말밖에는 듣지 못하고 있다.
소련의 당 대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만장일치의 박수, 자축의 박수는 한심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최근 미국의 관료들과 대중매체 논평지들이 독실한 신자인 척하며 만장일치로 무책임하게 지껄여대고 있는 말들, 현실을 감추려는 수사도 성숙한 민주주의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지금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자신감을 부추기고, 슬픔을 조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오래전부터 심리요법이 정치, 특히 논쟁을 수반하고 허심탄회함을 장려하는 민주주의 정치를 대신해 왔던 것이다.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은 강하다"라는 말을 우리는 끊임없이 들어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말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미국이 강하다는 사실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그러나 꼭 강해지는 것만이 미국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다.
9.11 사태는 미국인뿐만 아니라 전세계인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정치인들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러한 조치를 당연히 여기는 시기에 이런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비난이 폭주할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임을 알면서도 대중에게 글로 남기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수전 손택이라는 사람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자지게 하는 글이다.
그녀는 1933년 뉴욕에서 태어나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