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사미코(발사믹)
얼마 전 딸아이가 선물로 받은 이탈리아 식초와 올리브 오일을 보내왔다.
그때 받은 발사믹 식초는 다른 분께 선물했고 올리브 오일은 조금씩 종지에 담아 빵을 찍어 먹는데 그 맛이 깔끔하고 고급스럽다.
그리고 발사믹 식초가 와인으로 담근 고급 식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사믹은 영어로 된 표기이며 이태리어로는 '발사미코'라 불린다.
유럽에는 대부분의 식초를 와인을 숙성해서 만들지만 발사미코는 전혀 다른 클래스에 위치한다.
원래 이 이름을 쓰려면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의 포도로, 그 지방의 전통적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마시기 어려운 질이 낮은 와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사미코를 위한 포도즙을 따로 발효시킬 정도다.
이를 오래도록 다양한 나무통에 넣어 숙성시키는데 일반 레드 와인 식초보다 훨씬 더 진한 빛깔과 맛을 지니게 된다.
21세기가 되기 전까지 이 식초는 유럽에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웰빙 바람을 타고 일종의 유행이 되어버렸다.
비싼 것은 와인 중의 최고 등급만큼이나 값이 나간다.
일반 와인 식초가 2유로 정도라면 진정한 발사미코 식초는 100만 원이 넘는 것도 있다.
도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에 숙성 간장이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숙성 식초가 있다고 보면 된다.
진정한 발사미코는 종갓집 며느리처럼 장인 중의 장인이 정성껏 다루며
나무통에 익혀 만든다는 점이 다른 것이다.
일반 와인 식초는 품질이 좋지 않은 와인을 산화시켜 얻지만,
발사미코는 와인과는 관계없이 순전히 식초를 만들기 위해 포도즙을 따로 발효시킨다.
이렇게 알코올이 된 용액을 그냥 공기 중에 놓아두면 박테리아가
알코올을 산화시켜 식초로 변화시킨다.
이 식초의 비법은 몇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모데나 지역의 아주 작은 동네에서 비밀리에 전수되던 것이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 아가조티라는 사람이 1860년에 자기 가족에게 전해오던 비법을
편지로 친구에게 알려주면서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졌다.
만드는 방법은 포도를 으깨 걸쭉하게 만든 미스트를 뚜껑 없는 큰 솥에 넣고
마치 포토쨈을 만들 듯이 30~50퍼센트까지 끓여 졸인다.
그다음 오랫동안 위에 뜨는 많은 부분을 따라내는 과정을 거친 후에
이 지역의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자연적인 발효를 시작한다.
다시 참나무, 밤나무, 체리나무, 노간자나무 등 서로 종류가 다른 나무통에 넣어
오랜 숙성 과정을 거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이 처음에는 큰 통에서부터 시작해서 1년에 한 번씩 점점 작은 통으로 옮긴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무통의 미세한 틈을 통해 액체가 증발되기 때문에
작은 통으로 바꿔 통 안에 공간이 없이 가득 차게 해야 균등한 품질의 발사미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로 다른 통에서 오는 맛과 향이 식초 안에 똑같이 배어들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예를 들면 참나무 통에서 시작해서 밤나무, 체리나무, 노간자나무 등 각각 다른 통으로 넘어가는 거다.
시간이 갈수록 식초는 향이 다양해지고 신맛은 줄어든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단맛이 증가하고 색은 검어진다.
발사미코의 생산단계는 모데나의 컨소시엄에서 관리, 감독을 하며
맛과 향에 따라 네 종류로 구분하는데
포도 잎사귀 한 개는 그 농도와 향이 어린것으로 아직 신맛이 느껴진다는 뜻이고,
두 개는 많이 부드러워졌고 강한 맛이지만 균형감이 생겼다는 말이다.
세 개는 조화로우면서 향이 농축되고 다양한 맛이 입에 오래 남는 것을,
네 개는 그 맛과 향이 강하고 복잡하며 최고의 조화를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중에 나와 있는 발사미코 식초라고 다 같지 않다.
'tradizionale'라는 말이 붙어야 바로 모데나 지역에서 생산된 것이다.
그냥 발사미코 식초라고 쓰여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3년에서 5년 정도 숙성한 것으로
향은 좋지만 아직 신맛이 강하다.
향을 첨가하거나 캐러멜을 넣은 저질 제품들도 있다.
진정한 발사미코는 그 숙성 기간이 최소 12년에서부터 100년까지 된다.
100년까지 나무통에서 숙성시킨 것은 아주 희귀하면서 가격도 엄청나다.
작은 종지에 올리브 오일을 붓고 발사믹 식초를 살짝 뿌려 바케트 빵을 찍어 한 입 베어 무니 입안 가득 번지는 고소한 맛에 하루가 행복해진다.